미국의 ‘북핵 세일즈’ 전략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3.04.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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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이 끝나가면서 세계의 이목이 다시 북한 핵에 쏠리고 있다. 북한이 다자 대화를 수용하겠다고 밝혀 새 국면을 맞은 북한 핵 문제의 진정한 해법은 무엇이며, 미국의 속셈은?
붕어빵에 붕어가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이라크 전쟁이 바로 그 형국이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명분은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증거를 찾아냈다는 얘기가 안들린다. 그렇다면 미국은 석유 이권을 어떻게 독식할까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후세인과 이라크 국민에게 백배 사죄하고 물러나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럴 가능성은 없다.
‘붕어빵’ 얘기는 이라크와 더불어 ‘악의 축’에 선발된 북한에도 적용된다. 미국은 지난해 10월부터 이라크와 마찬가지로 대량살상무기(북한의 핵 개발)를 거론하며 북한을 압박해 왔다. 그런데 그동안의 경과를 살펴보면 미국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헷갈린다. 우선 당면한 질문, 즉 ‘이라크 다음은 북한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미국 군부의 육성을 들어보자. 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3월25일부터 27일까지 하와이의 호놀룰루에서 매우 중요한 회의가 열렸다. 미군 태평양사령부와 국방대학 산하 국가전략연구소가 주최한 ‘태평양 심포지엄’이 그것이다. 2년에 한번 비공개로 열리는 이번 심포지엄에는 토머스 파고 태평양사령관을 포함한 미국 군부의 최고위급 인사들과 아태 지역의 안보전문가들이 참석했다. 첫날 회의 주제가 바로 북한 핵 문제였다. 당시 회의에 참가했던 해외의 안보 전문가에 따르면, 이날 이름을 대면 알 만한 미국 군부의 최고위급 인사가 발표했다(태평양 심포지엄은 논의 내용은 공개하되 발언자의 이름은 공개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의 얘기는 한마디로 “북한은 미국의 선제 공격 교리의 교과서적인 적용 대상이다(North Korea represents textbook case of preemption).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라는 것이었다. 즉 북한은 ‘이라크와 달리’ 핵, 미사일, 생물 무기 등을 가지고 있는 데다 사찰조차 안 받고 있다. 당연히 공격 대상이다. 그러나 또 ‘이라크와 달리’ 대량 보복 능력을 가지고 있어 한국과 일본에 치명적 타격을 가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한국이 필사적으로 반대해 선제 공격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라크는? 이라크는 ‘북한과 달라’ ‘치기 쉽다(easy to strike)’는 것이 정답이다.

국제 정치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보아서는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북한 핵 문제 역시 예외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의 경과가 이를 입증한다. 미국이 그동안 주장해온 대로 북한의 핵 개발에 그토록 노심초사했다면 적어도 북한이 지난 1월10일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고 약 90일간 어슬렁거릴 때 한번쯤은 걱정스런 눈길이라도 보냈어야 한다. 미국은 이 기간에 북측이 자신들의 지론인 ‘NPT 특수 지위’(1993년 3월12일 NPT 탈퇴를 선언하고 탈퇴 자격이 부여되기 하루 전인 6월11일 탈퇴를 유예한 상태)도 내세우지 않고 내심 협상을 기대하는 눈치를 보였는데도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다시 말해 북한이 핵무장해 NPT 체제가 교란되어도 어쩔 수 없다는 태도였다.

사실 따지자면 처음부터 석연치 않았다. 미국이 지난해 10월 북한에 제기했던 문제는 지금과 같은 플루토늄탄(PU) 개발이 아니고 고농축우라늄탄(HU) 문제였다. 플루토늄탄은 당장 핵개발이 가능하지만 고농축우라늄탄 개발에는 5년 정도 걸리기 때문에 그렇게 긴박한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플루토늄탄 개발을 차단하고 있는 제네바 합의의 틀을 유지하면서 시간을 가지고 풀어가는 것이 정답이다. 그런데 미국은 전혀 정반대 해법을 택했다. 곧바로 중유 공급 중단을 단행해 제네바 합의를 깨버림으로써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다. 결국 그 때문에 북한 핵이 5년 뒤의 문제가 아닌 당장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미국이 북한 핵 해법으로 제시한 다자 대화 구상도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 이 다자 대화 구상이 북한의 핵 개발을 막겠다는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최근의 사태 전개는 매우 고무적이다. 그동안 북·미 직접 대화를 주장하던 북한은 지난 4월12일 외무성 대변인의 발언을 통해 다자 대화를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간접으로 밝혔다.

그런데 그 원안을 제안한 미국은 당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회피하고 시간을 버는 데 열심인 것처럼 보였다. 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미국은 시간이 필요했고, 또한 중국측에 북한 핵 문제의 상당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자칫하면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 것을 염려한 중국이 열심히 뛰어 북한을 다자 테이블로 끌어내는 데까지 성공한 것 같다

미국의 처지에서는 의외의 사태 진전이다. 과거의 사례를 살펴볼 때 미국이 한반도나 동북아 문제를 다자 대화 형태로 풀어 본 적은 거의 없다.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이 적극 주창해 4자 회담이 시작되었으나 용두사미로 끝났고, 결국은 북·미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그렇다면 관건은 미국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북한 핵 문제 해결에 나설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는 지난해 10월 부시 정권이 왜 클린턴 정권 말기에 입수되어 구문에 불과했던 ‘북한 고농축우라늄탄 개발 의혹’을 새삼스레 꺼내들고 흔들기 시작했나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이라크 다음은 북한’ ‘핵시설 선제 공격’ 등 한국과 미국의 보수파와 언론들이 한국 사회에 불안감을 증폭시켜 가는 동안 향후 한반도의 운명을 판가름할 중대한 움직임이 있었다. 지난 4월8일과 9일 이틀 동안 한·미 국방 당국 간에 전개된 ‘미래 한·미동맹 정책 구상 협의’에서 한·미 양국이 기존 한·미 동맹을 앞으로 ‘지역 동맹’이라는 새로운 틀로 전환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지역 동맹이라는 개념에 대해 당시 언론은 ‘동북아 지역 및 전세계적 안전 보장으로 영역을 넓히는 동시에 해상로 확보, 국제 범죄 등을 다루는 포괄 동맹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미사여구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섬뜩한 얘기다. 비슷한 예를 1996년 미·일 신안보조약에서 찾을 수 있다. 미·일 신안보조약의 핵심도 미·일 동맹의 범위를 지역 동맹 차원으로 확대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지식인 사회는 ‘이는 곧 중국과 타이완의 무력 충돌 상황에 미국이 개입하게 될 때 일본도 미국 편에 자동 개입한다는 의미’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한·미 동맹의 지역 동맹화도 결국 같은 내용이 될 공산이 크다. 일본에 이어 한국 역시 대중국 포위 전선의 전초 기지로 만들기 위한 미국의 구도가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신안보조약의 명분이었던 일본의 ‘해상로 확보’가 이번에도 다시 거론되었다는 것은 이런 추론이 단순히 기우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지금은, 한국군은 대북 억지력을, 주한미군은 동북아의 안정에 주력한다는 역할분담론이 정석처럼 되어 있으나, 앞으로 한미연합사 작전 반경 확대나 한국군의 미사일 방어(MD) 참여 등이 논의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점은, 미국측 협상 대표인 리처드 롤리스 국방부 부차관보가 기자회견에서 “한국이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인 점을 동맹 관계에 반영하겠다”라고 밝힌 점이다. 한국군은 주한 미 2사단이 전쟁을 억지해 주는 대가로 수조원대의 미제 무기를 사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노대통령이 말한 자주 국방을 위한 대가라면 어쩔 수 없겠으나, 분명히 짚어야 할 점이 있다. 과연 대북 억지력 기능을 포기한 주한미군의 한국 주둔을 계속 허용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더군다나 앞으로 주한미군의 역할은 대중국 억지력 차원에 국한할 것이고, 이는 미국의 국익에는 합당하나 우리에게는 대단히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이치를 따지자면 오히려 기지 사용료를 받아도 시원치 않은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북한 핵 문제는 이런 문제를 덮어버리는 위력이 있다.

비슷한 일이 일본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최근의 북한 핵 위기 이후 일본의 미사일 방어 정책이 선회하고 있다. 그동안은 미국과의 공동 연구에만 참여한다는 것이었는데 최근에는 미국이 개발한 미사일 방어 체제를 사들이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 그 비용이 약 천억 엔(약 1조원)에 이른다. 결국 미국은 북한 핵이라는 가상 현실을 가지고 엄청난 세일즈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종착점은 5월에 있을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가 될 것이다. 노대통령 방미는 그동안의 한·미간 거래 명세를 확인하는 자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 대가로 미국은 고작 북한 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하나마나한 약속만 되풀이할 가능성이 높다.

1990년대 이후 미국은 북한이라는 ‘꽃놀이패’를 이용해 아시아의 평화와 단결을 교란하고 자신들의 이기적 국익을 관철하기 위한 행태를 계속해 왔다. 북한은 북한대로 각본에 충실한 배우처럼 움직였고, 한국을 포함한 중국·일본·러시아는 그때마다 전전긍긍해야 했다. 북한 전문가들 가운데는 이제 이런 악순환의 사슬을 끊을 때가 되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가 많다.

그 해법은 미국이 제시한 다자 대화에 들어 있을 수도 있다. 이번 다자 대화를 ‘아시아의 각성과 단합을 통한 북한 핵 해결’의 계기로 삼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러시아·중국·일본의 움직임이 앞으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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