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 받을 일이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
  • 나권일 기자 (nafreesisapress.comr)
  • 승인 2003.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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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한 6급 기술직 공무원이 3년간 한 달 평균 2천만원씩 뇌물을 받아 고스란히 저축했다. 그는 업자들을 윽박지르며 적극적으로 ‘수금’해왔다. 돈이 신앙이었던 ‘뇌물 저축왕’의 엽기적인 3년 행각을 현장
저축의 날’인 지난 10월28일, 울산광역시 남구 옥동 울산지검 특수부 401호 검사실. 수사관 박 아무개씨(40)는 뇌물 수수 혐의로 긴급 체포한 피의자 노돈락씨(가명·46·울산시 신정동)가 관리하던 월급 통장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다.

6급 기술직 공무원으로서 울산시 상수도사업본부 정수사업소에서 일하며 사무관급 대우를 받는 노계장의 급여 통장에는 매달 3백50만원씩 꼬박꼬박 입금되고 있었다. 하지만 노씨는 전기요금 등 달마다 빠져나가는 공과금을 제외하고는 이 돈에 손도 대지 않았다. 월 100만원씩 입금되는 노씨의 수당 통장도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한푼도 쓰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자기 소유인 방 3개짜리 32평 아파트에 살면서 신형 SM520 승용차를 굴리고, 대학교 3학년생과 인문계 고3 자녀를 가르치려면 교육비와 생활비로만 한 달에 3백만∼4백만 원은 족히 들어갈 텐데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박수사관은 월급 통장과 별도로 노씨가 지난 3년 동안 차명으로 관리하던 세 계좌를 들여다보고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금액이 줄어들기는커녕 하루가 멀다하고 입금액이 불어나고 있었다. 노씨가 자기 형수인 최 아무개씨 이름으로 1999년 개설한 ‘경남은행 531-22-03XX430 계좌’를 들여다보았다. 2000년 9월 한 달만도 ‘9월1일 4,000,000. 9월6일 1,300,000. 9월7일 5,500,000. 9월7일 2,000,000. 9월8일 1,000,000’ 등 다섯 차례에 걸쳐 1천3백80만원이 입금되었다.

노씨는 이 돈의 출처를 부모로부터 받은 유산과 아내의 수입이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전업 주부였다. 공무원인 노씨에게 하루에 두 차례나 입금된 수백만원은 뇌물이 분명했다. 울산시청 부자 공무원 노돈락씨의 ‘화수분’ 비밀은 이렇게 풀리기 시작했다.

박수사관이 조사한 결과 1999년 4월부터 2001년 12월까지 3년 동안 노씨의 차명 계좌 1개에서만 모두 1억2천4백만원이 나누어서 입금된 기록이 나타났다. 노계장이 관급 공사와 관련해 업자들로부터 받은 돈은 한달 평균 2천만원. 평범한 공무원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액수였다. 수사팀 여기저기서 “저축왕감이네. 뇌물 저축상을 줘야 되겠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울산지검 특수부(안희권 부장검사)가 지난 11월20일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한 노계장 등 울산시청 공무원 4명의 독직 사건은 가뜩이나 경기 불황과 부동산 가격 폭등에 찌든 서민들에게 충격과 허탈감을 안겨주었다. 검찰은 노계장이 1998년 9월부터 2001년 9월까지 3년 동안 울산광역시 종합건설본부(울산종건) 건축1과 설비계장으로 근무하면서 전기·조명 설비업자들로부터 받은 것으로 드러난 뇌물 3억4천만원을 ‘공무원 범죄에 관한 몰수특례법’을 적용해 전액 몰수하고 노씨를 특가법상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했다(30쪽 딸린 기사 참조).

‘뇌물 저축왕’ 노돈락씨는 울산 토박이다. 중학교를 마친 뒤 검정고시로 고졸 학력을 따낸 노씨는 전기 기술직 8급 시험에 합격해 공직에 들어섰다. 노씨는 겉으로 보기에는 소심하고 평범한 이웃이었다. 노씨 가족이 살고 있는 울산시 신정동 ㅇ아파트의 한 주민은 노씨에 대해 ‘쓰레기 분리 수거를 잘 하는 203호 주인 아저씨’라고 기억했다. 별다른 취미 생활이 없고, 술과 담배를 전혀 못하는 데다 사교성마저 없는 노씨는 돈 모으는 일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노씨가 본격적으로 뇌물을 받기 시작한 때는 1990년대 후반부터다. 울산광역시 개청(1997년)과 더불어 울산 지역은 택지 개발과 관급 공사가 넘쳐났다. 시청이 발주하는 건축물의 기계·전기·통신·소방 설비 공사를 감독하는 업무를 맡은 노씨도 덩달아 바빠졌다. 1998년 9월, 노씨가 노른자위 자리로 알려진 울산종건 설비계장을 맡게 되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사례비와 뇌물이 들어왔다.

검찰에 따르면, 노씨는 적극적으로 뇌물을 ‘수금’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업자들에게 부하 직원들을 통해 시방서나 설계도면 정보를 미리 알려준 뒤 업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씨는 수표보다는 현금을 선호했다. 그는 업자들에게 “수표도 안되고 송금도 안된다. 현금으로만 ‘인사’를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렇게 해서 업자를 만날 때마다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씩 사례금을 건네받았다. 노씨는 돈을 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사무실로 직접 찾아갔다고 한다. 노씨와 부하 직원 최일락씨(가명·39)의 부패 행태는 뇌물 경찰을 패러디한 영화 <투캅스>의 주인공들을 빰칠 정도였다(28쪽 상자 기사 참조).

노돈락씨는 ‘뇌물 재테크’ 수완도 발휘했다. 그는 1998년 9월 울산종건 설비계장이 된 뒤 아내 박씨와 형수 최씨 이름으로 경남은행과 농협 등에 차명 계좌를 개설했다. 그리고 업자로부터 받은 돈은 그날 그날 바로 뇌물 통장에 입금했다. 하루에 두세 차례 입금하는 날도 있었다. 업자들과 직접 만나기 어려우면 노씨가 지정한 뇌물 통장으로 사례비를 ‘송금’하도록 했다. 노씨가 관리하는 통장에는 ‘우수 고객’이라는 도장이 찍혔다.

노씨는 뇌물을 돈세탁하고 분산·은닉하는 데도 머리를 썼다. 뇌물 통장으로 모은 돈을 수시로 인출해 종금사나 적금 같은 예금 상품에 투자했다. 일정액이 쌓이면 자신과 아내 이름으로 만든 투자신탁이나 근로자우대적금 같은 금융 상품에 분산 예치했다. 두 딸 명의로 각각 2천7백만원씩 입금한 통장도 만들었다. 딸들의 장래에 대비해 보험 증권도 만들어주었다. 뇌물을 받은 데 그치지 않고 증여하고 상속할 준비까지 해둔 것이다.

노씨의 뇌물 재테크 과정에는 돌발 사고도 없지 않았다. 2001년 8월에는 ‘ㅈ테크’라는 회사를 운영하던 설비업자가 직원 월급을 체납해 노동청에 제소당할 정도로 어렵게 되자 노계장을 찾아왔다. 업자는 “2000년 8월에 8백만원을 뇌물로 줬는데, 다시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노씨가 거절하자 이 업자는 경찰에 가서 불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노씨는 업자를 달랜 뒤 뇌물 원금 8백만원을 돌려주었다. 노씨는 주식에 손 댔다가 3억원을 날리기도 했다.

통장 액수만 보아도 배가 부를 정도로 저축액이 불어나면서 노계장 집안도 해가 다르게 윤택해졌다. 노씨의 아내는 수입산 세탁기 등 가전제품과 고급 가구를 사들였다. 올해 봄에는 큰마음 먹고 대형 텔레비전을 새로 장만했다.

‘자린고비’ 노씨도 삼성르노자동차의 SM520을 현금을 지불하고 새로 뽑았다. 하지만 소심한 노씨는 주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자신이 사는 2동 아파트가 아니라 1동 주차장에 승용차를 주차해두고 몰래 드나들곤 했다. 울산지검 수사관 황 아무개씨는 “노계장 집에 갔더니 이탈리아산 수입 가구와 양탄자에다 필립스제 42인치 텔레비전에, 한마디로 부티가 나더라”고 말했다.

“뉘우치기는커녕 발뺌하기 바빠”

‘울산종건 공무원들이 뇌물을 너무 자주 요구하더라’는 업계의 소문을 입수한 울산지검 특수부는 두 달을 내사한 끝에 노씨의 뇌물 수수 행각을 밝혀냈다. 검찰에 따르면, 노씨는 구속된 상태에서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발뺌하기에 바빴다. 한 검찰 수사관은 “노씨는 출고된 지 한 달 된 새 차를 중고차라고 변명했다. 면회온 아내에게도 ‘내가 알뜰하게 한푼 두푼 모은 돈인데 다 빼앗아가면 우리는 어떻게 사느냐’고 울먹였다”라고 전했다. 울산구치소에서 기자와 만난 노씨는 뇌물 수수 사실은 인정했지만 몰수 조처는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노씨 가족이 사는 ㅇ아파트의 한 주민은 “돈이 종교이고 신앙이었던 부패한 공직자다”라고 노씨를 비난했다. 울산의 뇌물 저축왕 노돈락씨 사연은 올 한해 로또만이 희망이었던 서민들을 더욱 힘빠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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