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영향력 압도적 1위…김정일 최초 진입해 3위
  • 김은남 기자 (ksisapress.com.kr)
  • 승인 2000.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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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여론 조사/2위 이회창과 61%P 차이
세기만 바뀐 것이 아니었다. 한국 사회의 역학 관계 또한 지난 1년 사이 아찔한 속도로 바뀌었다. 새 천년 첫해를 맞아 <시사저널>이 여론조사 전문 기관인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을 움직이는 최고의 인물은 단연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1989년 창간 이래 <시사저널>은 해마다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라는 명제를 내걸고 전문가 집단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해 왔다. 그 결과 현직 대통령이 최고의 인물로 꼽히지 않은 해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그렇지만 올해는 우열을 가리기가 무색하리만큼 대통령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비록 지목률은 떨어지지만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3위에 오른 점도 역사적인 사건이다. <시사저널> 여론조사 11년 역사에서 대한민국 국적을 갖지 않은 인물이 순위권에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노벨상이 큰 변수였다. 여론조사에 들어가기 엿새 전인 10월13일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는 조사 결과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되었다.

집권 후반기여서 ‘레임 덕’ 우려가 조심스럽게 제기되는 상황에서도 DJ는 지난해(74.4%)보다 오히려 영향력을 확장하며 1위에 안착했다(81.6%). DJ의 영향력에 대한 인지도는 정치인(96.0%)·언론인(92.0%)·행정 관료(88.1%)처럼 이른바 전통적인 권력 집단일수록 높게 나타났다(시민단체의 DJ 지목률은 57.0%에 불과해 대조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노벨상 변수로만 설명하기에는 1위와 2위의 격차가 너무 컸다. 영향력 있는 인물 2위로 꼽힌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19.9%)는 대통령에 비해 지목률이 60% 포인트 넘게 떨어졌다. 이회창 총재는 정치인(59.0%)·행정 관료(27.7%)·대기업 임원(20.8%)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영향력을 높게 인정받았다.

이번 조사 결과만 놓고 보자면, 영향력 면에서 대통령을 견제할 만한 인물은 대한민국에 없다. 정치권도 재계도 마찬가지이다. 양김 구도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김영삼 전 대통령은 DJ로부터 끊임없이 견제를 받았다. 1997년 대선 직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때를 제외하면 DJ는 7∼27% 포인트에 이르는 격차로 YS 집권 내내 그의 영향력을 위협했다.

재벌 총수의 영향력이 형편없이 떨어진 것도 이번 조사에서 두드러진 변화이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순위권 밖으로 사라진 것은 이미 2년 전이지만,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과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영향력 또한 지난 1년 사이 급격하게 ‘추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두 사람은 2.4%라는 낮은 지목률로 나란히 5위를 차지했다. 특히 정주영 명예회장은 지난해만 해도 대통령에 이어 영향력 있는 인물 2위(26.8%)에 올랐던 터라 ‘현대가(家)의 몰락’을 더욱 실감 나게 했다.

이쯤 되면 2000년은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한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시대 상황과 DJ의 개인적인 위정 스타일이 맞물린 결과로 해석된다. 남북 관계가 급류를 타고 있는 현실에서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영향력 있는 인물 3위(3.9%)에 오른 데서도 입증된다.

비록 지목률은 미미하지만 국가보안법 적용 대상인 ‘반국가 단체’의 수괴가 순위권에 올랐다는 것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분단 50년 사상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만하다. 한 북한 문제 전문가는 이번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 ‘역사적인 농담’이라고 논평하기도 했다.
이번 조사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대기업 임원(6.9%)·중소기업인(7.0%)으로부터 특히 영향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남북 경협에 직접적인 이해 관계가 걸려 있는 대기업 임원들은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과 김위원장의 영향력을 동등하게 평가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DJ의 위정 스타일 또한 대통령에게 권한을 과도하게 집중시킨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모든 국정을 일일이 챙기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계몽 군주식’ 일 처리 방식이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DJ는 독재자”라고 거침없이 선언해 온 김영삼 전 대통령이 순위권에 다시 진입한 사실이 눈길을 끈다. 거침없는 막말과 코미디언 뺨치는 좌충우돌로 시정의 비웃음을 사는 행태와는 별개로, DJ 집권후 영향력 순위에서 사라졌던 YS는 올해 8위(2.0%)로 ‘부활’했다. ‘죽은 YS를 살려낸 것이 DJ’라는 비판이 실감 나는 대목이다.

인물뿐 아니라 집단의 영향력에도 지난 1년 사이 극명한 변화가 나타났다.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 또는 세력’으로 전문가들은 정치권(27.0%)과 시민단체(25.0%)를 꼽았다. 재계의 영향력(11.1%)은 지난해의31.6%에 비해 급전직하했다. 언론계의 영향력 또한 곤두박질쳤다. 1990년대 중반 이래 영향력 있는 집단 ‘베스트 4’에서 한 번도 밀려난 일이 없었던 언론은 올해 6위로 전락했다. 두 집단 모두 자발적인 개혁에 실패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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