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클럽 결성…지지 분위기 ‘활활’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0.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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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클럽 결성 등 지지 확산… 노무현 대권 도전‘견인’
지난 5월7일 대전시 고속 터미널 앞 한 카페에서 이색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대전에 있는 ㅅ여고 3학년 진정희양(18)이 일어서서 다음과 같이 참석 소감을 밝혔다. “저는 정치인이라면 대통령 이름밖에 모르는 평범한 여고생입니다. 제 또래 친구들은 정치 얘기만 나오면 지저분한 말은 그만두자며 그 옆에도 안 가야 한다고 입을 모읍니다. 사회문화 시간에 선생님은 편견을 버려야 하고, 그 대표적 사례가 지역 감정이라고 가르치시지만, 현실은 교과서와 너무도 다릅니다. 그러던 중 논술 시험 준비를 위해 사이트를 찾다가 노무현 선생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든 홈페이지에 들어가 ‘우리나라에 이런 정치인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지역 감정을 타파하겠다며 어려운 곳에 출마해 낙선했지만 아직도 지역 감정과 싸우는 이 정치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제 친구들과도 ‘정치는 썩었지만 노무현 선생님은 뭔가 다르다’는 공감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룹 H.O.T.와 S.E.S 팬클럽만 출입하던 우리는 이제 노무현 팬클럽으로 접속 대상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이 여고생의 발언이 끝나자 좌중은 숙연해졌다. 개중에는 눈물을 훔치는 사람도 있었다. 한 참석자가 `정치 혐오와 무관심에 물든 한국 젊은층의 미래가 결코 어둡지만은 않은 싹을 본다고 정리하고 나서야 좌중은 열띤 토론에 들어갔다. 10대 여고생부터 40대 후반 장년층까지 각계각층이 함께한 이 날 모임은 한 정치인의 ‘팬클럽’을 전국민을 대상으로 확대하는 자리였다. 그 정치인은 지난 4·13 총선에서 지역주의 타파 기치를 내걸고 부산 북·강서 을 지역구에 민주당 후보로 나섰다가 석패한 노무현 의원. 이른바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다. 이 모임은 지난 4·13 총선 개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태동했다.

“노무현은 아름다운 바보”

4월13일 저녁 부산 북·강서 을 지역구 개표가 시작되자마자 울분과 격려의 글을 올린 5천여 전국의 네티즌들 사이에서 4월14일부터 가칭 노사모가 탄생한 것이다. 한국 정치 사상 처음으로 자발적인 정치인 팬클럽이 태동한 순간이었다. 이처럼 컴퓨터 온라인에서 조직된 노무현 팬클럽은 한달도 채 안돼 수도권·호남·충청·영남에 지부 조직을 결성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이미 온라인에서는 노무현 의원의 낙선에 애석함을 토로하는 글이 수없이 올랐다. 한국 정치 현실을 지배하는 지역주의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를 주제로 한 네티즌들의 열띤 논쟁 역시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이 논쟁에 접속한 사람은 현재까지 15만여명. 노의원이 낙선한 뒤 하루 평균 3천2백여명이 홈페이지를 방문하고 있다. 회원으로 가입해 지속적으로 글을 올리는 네티즌만도 5백여명. 낙선한 뒤 더욱 많은 팬을 갖게 된 이런 현상은 우리 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경우이다. 가히 ‘노무현 증후군’이라 할 만하다.

그동안 온라인을 통해 선발된 지역별 노사모 대표들은 이 모임을 확대 발전시키기 위해 5월7일 대전에서 전국 규모 오프라인 모임을 처음으로 가졌다. 이 날 모임은 흔히 있는 정치인 후원 모임과는 성격이 판이했다. 노무현 의원 진영이나 민주당 당원은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다. 노의원과 일면식도 없는 전국 각지의 평범한 사람들이 저마다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낙선한 노무현 의원의 열혈 팬이 되겠다고 자처하고 나선 자리였다. 그만큼 이들이 쏟아내는 말도 각양 각색이었다. “노무현 후보를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투표장에 들어가니 붓뚜껑을 든 손이 1번으로 가더라. 그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 애석하다.”(부산에서 온 한 시민)

“노무현은 바보다. 그러나 아름다운 바보다. 우리나라가 잘되려면 그런 아름다운 바보가 더 늘어나야 한다.”(전북 익산에서 온 대학생).

“우리 정치 현실을 보며 어느 부모도 제 자식에게 정치가가 되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의원을 보면서 나는 다섯 살 난 아들이 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커서 노의원 같은 정치가가 되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경기도에서 온 한 주부).

“정형근과 노무현이라는 두 출마자에 대해 부산 시민이 어떤 의식을 표출하는가 주목하다가 노의원이 낙선하는 것을 보고 너무 안타까웠다. 한국 정치 지도자 중 지역주의를 해결할 상징적 인물은 노무현 의원이라고 보아서 참여했다.”(광주에서 온 전남대 2학년생).

“개인적으로 4·13 총선에 기권했지만 노무현 의원이 낙선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 같은 방관자 자세가 그를 낙선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서지 않으면 노의원이 지역 감정 타파 실험을 중지할까 걱정되어서 적극 참여하고 있다.”(서울의 한 은행원).
“한국 정치 모순 풀어낼 매개체”

대전 모임에 참여한 전국 각 지부 대표 40여명은 열성 팬이 되기까지의 다양한 심경을 밝히며 모임 활성화 방안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들의 열정은 이 날 내놓은 ‘지역주의 문제를 노사모 팬클럽을 통해 풀어내자’는 구호에 함축되어 있었다. 막연히 한 사람의 정치인을 추종하는 데서 벗어나 노무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지역 통합 시대를 열어 가는 데 네티즌들이 앞장서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들은 그동안 노무현 의원의 홈페이지(www.knowhow.or.kr) 한켠에 임시 게시판을 설치해 의견을 교환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노사모 홈페이지를 개설하기로 했다. 새로 만든 도메인은 www.nomuhyun.org로 결정했다. 노사모 회원 가운데 인터넷 사업 종사자들을 모아 ‘노사모 홈사이트 기획단’을 꾸린 이들은 전자 민주주의 실현에 첨병이 되겠다는 포부로 다양한 컨텐츠를 개발하기로 결의했다.

한국 정치의 모순을 풀어낼 매개체가 되려는노사모가 내세우는 운영 원칙은 자발성과 순수성이다. 특정 정치인의 사조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취지에 따라 민주당원과 과거 노무현 의원측에서 활동한 보좌진은 참여를 배제한다는 원칙을 정했다. 이에 대해 이 날 모임에서 노사모 임시 회장으로 추대된 이봉기 수도권 지부장(41·BC카드회사 과장)은 이렇게 말했다.

“지역주의를 해소하고 발전적인 미래 정치를 열 수 있는 정치인이 노무현 의원이라는 데 공감하는 국민에게는 회원 가입 자격이 있다. 자발적이고 순수한 목적으로 출발하는 정치인 팬클럽이므로 운영 면에서도 시민운동의 도덕적 원칙에 충실할 것이다.”

물론 순수한 정치인 팬클럽을 내세우는 만큼 노무현 의원에 대한 이들의 지지와 사랑은 조건부이다. 정치적으로 자기에게 손해 되는 길일지라도 국민 여망인 지역 통합과 정치 발전에 앞장서 나서는 모습을 보이는 동안에만 지지와 격려와 사랑을 보내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사모는 노무현에 대한 격려 못지 않게 감시와 비판 활동도 펼칠 예정이다.

자신들의 모임을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와도 구분하는 노사모는 회원 모집 대상을 한나라당 등 야당 지지자에게까지 열어두고 있다. 지역주의 타파와 노무현이라는 공통 분모가 ‘바른 정치’라는 데 공감하는 모든 지역·계층 사람들을 겨냥한 것이다. 노사모의 궁극적 목표는 지역주의라는 거대한 괴물과 정면 승부를 벌이는 것이며, 이들에게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은 그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노사모 호남지부장 이정기씨(41)는 이렇게 말했다. “현재 호남에는 노사모 회원 45명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영남의 맹목적인 반DJ정서와 노무현 낙선 현상을 우리 호남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또 한나라당 후보가 호남에서 한 명도 당선하지 못한 것도 지역 감정이 잔존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문제를 풀려면 호남인들이 감정적으로 한번 접어준다는 마음가짐으로 나가야 한다는 공감대가 지식인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다. 노무현 의원은 그 중요한 매개체이다.”
이처럼 한국 최초의 자발적인 정치인 팬클럽으로 출발한 노사모는 오는 6월6일 대전에서 전국 팬클럽 창립 총회를 열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창립 총회를 전자 민주주의가 새롭게 도약하는 날로 설정했다. 오프라인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물론 미처 참여하지 못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네티즌에게도 현장에서 컴퓨터로 연결해 의견을 주고받고, 투표까지 진행한다는 것이다.

노사모에 참여하는 사람은 대체로 정치 불신과 지역 대결주의라는 한국 정치의 문제점을 노무현이라는 상징적 정치인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현재 노사모에는 주로 2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까지의 젊은층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인터넷을 주로 사용하는 연령층인 10대와 20대를 겨냥해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치 불신이 가장 심한 이들 연령층에게 호소력을 발휘해야 한국 정치의 미래에 희망을 걸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각인된 정치인 노무현은 대체로 우직하고 바보스럽게 한국 정치의 병폐에 맞서는 모습이다. 1989년 광주 청문회 현장에서 스타로 떠오른 이후 3당 합당을 거부했고, 지역주의 해소를 기치로 내걸고 뛰어든 몇 차례 선거에서 낙선한 정치 역정이 오히려 그를 미래 지향적 정치인의 표상으로 떠오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노사모 참여자들은 주권자들이 그런 정치인을 성원하고 격려하는 데 앞장서야 정치 혐오증을 없앨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노무현 의원이 지역 통합을 기치로 내걸고 다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다. 향후 3년간 노사모가 국민 사이에 지역주의 해소라는 정치개혁 운동을 펼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특별한 현상’에 정치학계도 주목

이처럼 정치인 노무현과 인터넷이 매개가 되어 유권자들이 펼치는 새로운 참여민주주의 방식은 정치학계에서도 적지 않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손호철 교수(서강대·정치학)는 사이버 공간에서 정치인 팬클럽이 자발적으로 탄생한 데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과거 DJ를 지지했던 연청 조직과 달리 사이버 공간을 통해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팬클럽이 공개적으로 탄생한 것은 처음 있는 일로서 한국 정치 발전에 매우 의미있고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본다. 이것은 특정 정치인에 대한 전국적 지지와 지역 감정에 제약된 지역구 지지 사이의 모순 관계를 상징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처럼 20~30대 네티즌 접속자 중심으로 펼쳐지는 참여민주주의가 얼마만큼 정치적 행동으로 연결될지는 미지수이다.”

낙선후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노무현 의원은 전국 각지 네티즌 지지자들의 이같은 성원에 한껏 고무되어 있다. 그러나 자발성을 침해할까 봐 아직껏 함구해 왔다. 한동안 정치 재개 여부를 놓고 고민해온 노의원은 노사모를 중심으로 일고 있는 전국적인 격려와 지지 현상을 지켜본 후 <시사저널> 취재진과 만나 지역주의를 해소하기 위해 차기 대권에 출사표를 던지겠다고 선언했다(22쪽 인터뷰 기사 참조). 그는 “주변에서는 내게 행복한 정치인이라고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유를 속박당하는 것처럼 짐이 너무 무거움을 느낀다”라고 털어놓았다.

물론 노무현 의원의 대권 출사표와 노사모의 지역주의 타파 운동은 아직은 현실 정치에서 힘겨운 실험일 수밖에 없다. 낙선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노의원으로서는 대권 주자감이 되기 위해 우선 당내에서부터 넘어야 할 산이 너무 가파르다. 노사모 역시 이번 총선에서 노무현 의원을 삼켜버린 현실적 지역주의의 벽 앞에서 지역주의 타파와 정치 발전이라는 이상을 아직은 네티즌 사이의 구호로만 설정해 둔 상태이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을 매개로 해서 이들이 펼치기 시작한 참여민주주의 운동이 정치 발전에 중요한 싹인 것만은 분명하다. 구태 정치에 염증을 느껴 변화를 갈망하는 대다수 국민 사이에 이들의 실험이 어떤 파자을 몰고 올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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