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 군인 괴롭히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 李文宰 편집위원, 高濟奎·李文煥 기자 ()
  • 승인 2000.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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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참전 군인 5~10% 환자 추정 ㆍㆍㆍ당국ㆍ사회 무관심 속 고독한 투병
그것은 우연이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군이 베트남 양민을 학살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베트남전 양민학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가 <부끄러운 우리의 역사, 당신들에게 사과합니다>라는 자료집을 펴낸 지난 3월 초,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한 비구니 스님의 산문을 읽었다. 스님이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만난 미국 불교 신자들에 대한 여러 편의 에세이였다. 그 가운데 ‘월남전 참전 용사 그레그의 웃음’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다.

1967년 6월, 그레그는 열아홉 나이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1년 후 그는 육체적으로 아무런 외상 없이 귀국했다. ‘결코 잊지 못할 일들’을 겪었지만, 단지 세상의 흐름에서 1년 뒤졌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현실로 뛰어들었다. 전화회사에 취직했고, 베트남전 참전 전우와 대륙 횡단 여행을 하기도 했다. 2년제 대학도 졸업했다.

하지만 그 기억은 악착 같았다.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다는 사실조차 입 밖에 낼 수 없는 사회 분위기였다. 지독한 우울증. 한 직업을 1년 이상 계속하지 못했고, 여자와 사귀는 것도 1년을 넘기지 못했다. 몇 차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미국 예비역 관리국이 보내온 팜플렛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에 걸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후 ‘참전 군인 잡담 그룹’에 참가해 새로운 삶을 위한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망각이 아니라 기억함으로써, 부인이 아니라 받아들임으로써’ 베트남전에 대한 악몽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는 그레그의 고백은 충격인 동시에 감동이었다. 그 부활의 드라마를 읽고 나자, 즉각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한국군 예비역들은? 한국에는 PTSD 환자가 전혀 없다는 것인가? 고엽제가 사회에 널리 알려진 것에 견주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그 용어조차 낯설었다. 영화 <하얀 전쟁>의 몇몇 장면이 떠오를 뿐이었다.

베트남전 참전 관련 단체에 문의해 보았으나 그들은 “우리는 고엽제에 대해서만 알 뿐이다”라고 답했다. 평소 친분이 있는 신경정신과 전문의에게 전화를 걸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인 출신 중에 PTSD 환자가 보고된 적이 있는가?” 그 의사는 “나도 두 사람 치료한 적이 있다”라면서 한국보훈병원 신경정신과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

베트남전이 끝난 지 올해로 25년. 오는 4월30일을 맞이하는 감회는, 패전 혹은 패망일에서부터 종전일, 승전 혹은 통일 기념일에 이르기까지 베트남전을 이해하는 처지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전의 성격과 그 영향을 어떤 쪽이 어떻게 평가하든, 그 참혹했던 전쟁의 피해자들이 겪었던, 혹은 겪고 있는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베트남에는 한국군과 미군에 학살된 양민의 원혼과 살아 남은 자들의 ‘기억’이 있고, 한국에는 고엽제의 ‘그늘’에 가려 PTSD를 앓고 있는 참전 군인 출신들이 있다. 하지만 정확한 환자 수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가족과 사회와 정부로부터 버림받은 채 홀로 술과 수면제에 의지해 아직도 끔찍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 ‘현역’들은, 베트남 현지에서 한국군과 미군에 의해 죽었거나 다친 베트남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역사의 피해자들이다. 그들에게 베트남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도 베트남의 정글 속에 있다.
”우리는 고엽제에 대해서만 알 뿐이다”

취재팀이 서울 강동구에 있는 보훈병원 신경정신과를 찾았을 때, PTSD 환자와의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정문용 과장(27쪽 상자 기사 참조)은 줄곧 환자 곁을 떠나지 않았다. 환자가 언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전에 의료진을 통해 동의를 구한 환자였다. 그는 자신의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는 것을 꺼렸다.

“결코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상처다.” 어렵게 입을 연 김병남씨(56·가명)는 인터뷰가 시작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눈물을 흘렸다. “추한 꼴을 보여 송구스럽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1966년 6월7일 청룡부대에 입대한 그는 180cm의 키에 몸무게가 70kg. 주위로부터 ‘체격 좋다’는 소리 꽤나 듣던 장정이었다. 도무지 겁나는 것이 없던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다. 귀신 잡는 해병. 김병남 일병은 1967년 2월, 짜빈동 전투로 유명한 추라이 지역에 투입되었다.

추라이는 월맹군 지도자 호치민의 고향이어서 다른 어떤 지역보다 월맹군의 저항이 거셌다. 첫 전투부터 격렬했다. 9중대 소속이던 김씨는 자기 부대보다 먼저 투입된 11중대 병사들이 모두 전사한 줄로만 알았다. 그만큼 치열한 전투였다. 9중대와 11중대가 함께 작전을 벌인 지역은 추라이에서 30㎞ 떨어진 야트막한 야산이었지만, 적이 은신처로 이용할 수 있는 나무와 암석이 많아 특별한 경계가 필요한 요새였다. 첫 전투에서는 사상자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차츰 정찰 나갔던 전우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사태가 이어졌다. 어떤 전투에서는 부비트랩에 발목이 잘린 전우를 향해 붕대 대신 총부리를 겨누기도 해야 했다. 전우가 내지르는 신음에 아군의 위치가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김씨는 “1년 동안 송장 썩는 냄새를 엄청나게 맡았다. 송장벌레라는 것도 그때 처음 보았다”라고 말했다.

귀국을 3개월 앞둔 1967년 11월 말, 청룡부대는 호이안을 통해 새로운 거점을 확보하는 두 가지 작전을 수립했다. 해병대가 상륙에 성공하면 한국 육군이 뒤따를 예정이었다. “호이안 작전이 어떠리라는 것은 예상할 수 없었지만, 선발대로 가면 죽는다는 감은 갖고 있었다”라고 김씨는 말했다.

작전은 이듬해인 1968년 1월 말까지, 공중과 해상을 통해 여섯 차례 거듭되었다. 폭이 매우 좁은 강을 따라 상륙을 시도한 김씨는 비오듯이 쏟아지는 포탄과 고막을 찢을 듯한 폭음 속에서 죽음을 예감했다. 모두 다 죽는 줄 알았다. 김씨는 “나만 살아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살아 있었다”라며, 그 전투에서는 한국군보다 미군의 희생이 더 컸다고 기억한다.
대인 기피증과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려

귀국이 1주일 앞으로 다가온 1968년 2월, 김씨가 소속된 소대가 정찰을 나갔다. 50여 소대원들은 아직 식전이었지만 비교적 느긋한 상태였다. 누구도 죽음을 예감하지 못했다. 소대원들은 앞 사람과 15보 거리를 유지하며 넓은 개활지를 가로질렀다. 숲과 만나는 지점에 막 도착하려는데 전방에서 사격이 시작되었다. 베트콩들이 호를 파놓고 매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기습으로 김씨는 절친했던 전우들을 잃었다. “그때 나 혼자만 살아 남았다는 죄책감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라고 김씨는 말했다.

1968년 3월, 김씨는 귀국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다른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북한이 울진·삼척 지역에 무장 공비를 남파하자, 국방부가 실전 경험이 있는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로 토벌대를 구성했다. 토벌 작전에서 공비 수 명을 사살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그는 훈장을 받고 장교로 복무하지 않겠느냐는 제안까지 받았다. 하지만 다시 베트남으로 가 9개월간 간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만 전역하겠다”라고 잘라 말했다. 전쟁이 지긋지긋했던 것이다.

제대하고 나서 한 달 뒤부터 뭔가 이상했다. ‘월남에서 돌아온 김병장’은 사람들을 피하고 있었다. 친구들이 불러내도 내키지 않았다. 동네 뒷산에 올라가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곤 했다. 잃어버렸던 문학 소년 기질이 되살아났나 보다며 가볍게 지나쳤다. PTSD 초기 증상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앞날이 유망한 중소기업에 입사해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만의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대인 기피증은 불면증으로 이어졌다. 설핏 잠이 들었다가도 무슨 소리만 들리면 벌떡 일어났다. 집에서 키우던 개가 밤에 자꾸 짖어대자 개를 죽여버리겠다고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식구들이 뜯어말리기도 했다. “6·25 때 전투 경험이 있는 아버지 친구분들이 나를 보고 ‘눈빛이 달라졌다’고 말하곤 했다”라고 김씨는 그 시절을 돌이켰다.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 계속되었다. 눈은 늘 충혈되어 있었고, 몸무게는 급격하게 줄었다. 체력도 떨어졌다. 주위에서는 ‘베트남 귀신이 들린 것 같다’며 무당을 부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체중이 48kg으로 줄었다. 집안에서는 결혼하면 나을 병이라며 김씨를 일찍 장가들였다. 그러나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수면제를 먹어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꿈속에서 늘 베트남 전장이 생생하게 펼져졌다. 총소리, 대포소리, 피흘리며 쓰러지는 전우들… 나중에는 잠자기도 두려워졌다”라고 김씨는 말했다.

날이 갈수록 증상이 심해졌지만, 달리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직장을 옮기는 과정에서 참전 전우 모임에 나갈 기회가 생겼다. 김씨는 그 모임에서 만난 전우에게 “너 잠은 잘 자냐?”라고 물었다. 베트남전 당시 중사였던 친구는 자기 역시 잠을 잘 수가 없다며 모 대학 정신과에 가보라고 권유했다. 김씨는 “난 미친 놈이 아니란 말이야!”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동안 아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혼자만의 전쟁’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난 것은 반가웠지만, 정신과 병실 문을 두드리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다. “내가 정신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기가 힘들었다”라고 김씨는 말했다. 1년 동안 망설인 끝에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정신 장애 원인 고엽제 탓으로 알아

국내 유일의 PTSD 전문 클리닉이 있는 보훈병원으로 옮겨 정기적인 치료를 받으면서 하루 3~4시간 숙면을 취할 정도로 회복되었다. 몸무게도 다시 늘기 시작했고, 부인에게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김씨는 그동안 자신의 고통을 함께 나눈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움을 동시에 갖고 있다. 김씨는 “PTSD를 앓고 있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병명조차 모르고 있는 경우도 많다. 이제라도 국가가 나서서 치유하고 보상해 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보훈병원 신경정신과 정문용 과장에 따르면, PTSD 환자는 실제로 많을 수 있지만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우선 환자 자신이 질병을 인식하기가 어렵다. PTSD 증상이 나타나도 그 원인을 개인의 문제로 돌려버린다. 설령 자신이 PTSD 환자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스스로 밝히고 나서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정신 질환에 대한 뿌리 깊은 사회의 편견 때문이다. 환자들은 무엇보다도 가족과 주위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참전 군인 대부분은 고엽제 문제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고엽제 후유증 판정을 받으면 국가로부터 보상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PTSD의 원인을 고엽제 탓으로 돌리는 참전 군인도 없지 않다. 정문용 과장은 “고엽제가 PTSD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다만 고엽제 환자 가운데 PTSD를 함께 앓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1968년 7월부터 1970년 7월까지 백마부대 하사로 근무한 민병일씨(58)가 바로 그런 경우다. 민씨는 요즘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제대하고 나서 3년 되던 해부터 나타난 증상이다. 술을 마시면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아 술을 마셨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수면제를 복용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 병원을 찾기도 했지만, 베트남전 참전 사실을 숨기고 신경안정제를 받아다가 복용했다.

고엽제가 사회 문제로 떠올랐을 때, 민씨는 자신의 불면증과 정신 장애의 원인이 고엽제인 줄로 알았다. 옆에서 보다 못한 부인 박화자씨(50)가 보훈처를 찾아갔지만 허사였다. 보훈처는 신체적인 손상이 없기 때문에 보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30년 가까이 수면제와 신경안정제로 버티고 있는 민씨는 “아내가 나보다 더한 고생을 감내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신혼 시절 남편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부인 박씨는 남편이 늘 밤잠을 설치자 체력이 약해져 그렇겠거니 하고 보약을 지어 먹였다. 그러나 효과가 전혀 없었다. 부인 박씨는 “자식들도 아버지의 고통은 잘 모른다.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을 옆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나 역시 베트남전의 피해자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좌절하지 않고 독학으로 대학을 졸업한 민씨는, 26세 때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중학교에서 세계사를 가르치는 교사였다. 베트남 참전이 자신의 일생을 송두리째 앗아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전역한 이후 사회에 적응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그 역시 거개의 PTSD 환자들이 지나온 길을 걸어야 했다. 무당을 불러 굿을 해보았고, 종교에 의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대통령 박정희’라는 친필이 들어간 무공 포장뿐이다. 민씨는 “이 포장은 나에게 종이쪽지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취재팀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의 불면증이 고엽제 때문이라고 믿어왔던 민씨는 조만간 병원을 찾아 진단을 받아볼 생각이다.
‘그들만의 전쟁’은 언제 끝날 것인가

‘월남참전 고엽제후유의증 전우회’ 강창업 홍보국장은 회원 가운데 PTSD 증세와 비슷한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참전 전우들끼리 만났을 때에만 증세를 털어놓을 뿐 가족에게조차 말하지 않는다. “발작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어 가족이 더 고통스러워한다. 이런 전우를 만나러 가면 문전박대를 당할 때가 많다”라고 강홍보국장은 말했다. 같은 증상을 보여도,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하면 주위에서 참전 군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부정적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밤중에 비오는 소리를 들으면 그것이 꼭 총소리처럼 들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베트남전 당시와 비슷한 날씨에는 악몽에 시달리게 된다는 한 참전 군인 출신은 고엽제 후유증까지 함께 앓고 있는데, 그동안 네 차례나 이혼을 당했다. 그는 “목적도 이유도 없는 전쟁이었다. 우리는 미국에 의해 팔려갔던 것이다”라고 분노했다.

김병남씨는 “연평도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벌였던 해병들이 전투 후에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는 기사를 읽고 분통이 터졌다. 왜 나 같은 참전 용사의 말은 들어주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김씨는 국방부와 보훈처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진행 중이다. PTSD처럼 신체적인 부상을 확인할 수 없고 전역 이후에 증세가 나타나는 경우,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방부나 보훈처는 아직 PTSD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조차 없는 형편이다(위 상자 기사 참조).

PTSD 환자들은 이중삼중의 장애물에 둘러싸인 채 홀로 힘겹게 싸우고 있다. 먼저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하고, 가족과 싸워야 하며, PTSD에 대해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고 있는 당국과 사회와 싸워야 한다. 아직 병명조차 ‘공인’받지 못한 채, 적지 않은 베트남전 참전 군인 출신들이 30여 년 전에 입었던 전투복을 벗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전에서 자행된 양민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는 시민 운동(30쪽 관련 기사 참조)은, 3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PTSD 환자들의 ‘그들만의 전쟁’에도 눈길을 돌려야 한다. 참전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양민 학살과 더불어, PTSD에 대한 당국과 사회의 인식이 정확해질 때, 비로소 베트남전은 종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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