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무늬만 ‘회복’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1999.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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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 경제 지표, 회복 보이지만 내용 부실… 외부 충격 땐 ‘와르르’
시중에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IMF가 학교인지 몰랐다.’ 최근 경기가 좋아지자 성급하게 일부 언론에서 ‘IMF 졸업론’이 튀어나온 것을 풍자하는 유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IMF 졸업은 턱도 없는 얘기다.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빌린 돈을 완전히 갚기 전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불순한 동기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최근 방한한 국제통화기금 캉드쉬 총재도 “한국은 곧 IMF로부터 금융 지원을 필요로 하지 않은 상태가 되지만 이것이 졸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당초 예상대로 2000년 11월까지 IMF 프로그램은 살아 있다”라고 일축했다.

물론 IMF 사태를 맞은 지 1년 6개월 만에 한국이 몰라보게 좋아진 경제 성적표를 받아든 것은 사실이다. 우선 대표적인 거시 지표인 성장률이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올 1/4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예상보다 높은 4.6%. 최악의 침체기였던 작년(마이너스 5.8%)과 분명히 비교된다. 경기 지표도 작년 3/4분기가 바닥이었음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통계청이 5월31일 발표한 4월중 산업생산 동향도 한국 경제에 봄이 왔음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민간 경제연구소들은 1∼2개월 전에 전망했던 올해 성장률을 5%대로 1∼2% 포인트 상향 조정했다. 한국개발연구원도 공식으로는 올해 성장률을 4.3%로 전망했지만 내부에서는 5∼6%대에 이를 것으로 본다.

다른 지표들도 마찬가지. 환란 때 30%로 치솟았던 실세 금리는 8%대(3년 만기 회사채 유통수익률)로 뚝 떨어졌고, 환율도 달러당 2천원 선에서 1천2백원 선으로 내려갔다. 가용 외환보유고도 국가 부도가 예고되었던 97년 12월보다 7배나 늘어난 5백70억 달러(4월말 현재)를 기록했다.

이런 지표들을 보면 한국 경제가 순풍에 돛을 단 형국이어서 2∼3년 안에 위기가 재발할 가능성이 없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정녕 ‘위기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경기가 회복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불안한 구석이 적지 않다. 현대경제사회연구원 채장균 연구위원은 “지난해 경기가 워낙 나빴던 데 따른 기술적 반등 측면이 강해 실질적 회복으로 보기 어렵다. 특히 실업률이 여전히 높고 실질 소득이 늘어나지 않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LG경제연구소 이근태 연구원도 “1/4분기 성장은 소비가 큰 폭으로 늘어나고 기업이 끌어안고 있던 재고(4조3천억원)가 거의 소진되어 나타난 것이다. 내년 성장률은 올해보다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성장 내용도 신통치 않다. 설비 투자가 1년 만에 플러스 성장(12.9%)을 기록했지만, 컴퓨터·무선통신기기·운수장비 등 특정 분야에 편중되어 있다. 한국은행 정정호 경제통계국장은 “성장세가 계속 탄력을 받으려면 산업용 기계와 연구개발 투자가 플러스로 돌아서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한국 경제가 성장 잠재력을 배양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거시 지표들이 회복세를 보이게 된 근본 원인을 추적하면 더욱 걱정스럽다. 우리가 외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자체 동력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정부의 팽창 정책. 통화와 재정 자금을 풀어 시중에 돈이 넘쳐나게 한 결과 30%대의 살인적인 고금리가 1년이 못가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한국 경제는 모래 위에 지은 집?

또 다른 동력은 한국 특유의 무역 구조인데, 이것이 환율 안정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무역 의존도(70%)가 높은 나라다. 이런 구조에서 환란 초기에 국제통화기금이 고금리 처방을 내리자 당장 내수가 죽어버렸다. 투자(마이너스 40%)와 소비(마이너스 10%)가 격감한 것이다. 소비 격감은 당연히 수입(마이너스 35%)도 뚝 떨어뜨렸다. 수출(마이너스 3%) 역시 조금 줄었지만, 수입이 훨씬 더 줄어든 덕분에 4백억 달러라는 사상 최대 경상 수지 흑자를 내게 되었다.

한국 정부가 지난해 국제 금융 시장의 심장부인 미국 월가에서 외국환평형기금 채권을 팔아 외환 보유고를 채울 수 있었던 것도 투자자들이 남미 국가와 달리 한국은 외화를 벌어들일 능력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0개월 전에 IMF 처방을 받은 브라질이 최근까지도 환율과 금리를 안정시키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역 의존도(16%)가 매우 낮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여기에 지난해 4/4분기 이후 대외 여건이 좋아졌다. 엔저가 엔고로 변하고 미국 등 선진국이 금리를 낮추었다. 여기에는 아시아발(發) 세계 공황을 막으려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앨런 그린스펀 의장의 공이 컸다.

5월27일 미국 뉴욕의 코리아 소사이어티(회장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가 1년여 만에 개최한 한국경제 토론회에는 월가의 내로라 하는 한국통들이 모였다. 이들은 한국의 빠른 회복세에 관심을 보이면서도, 한국 경제는 외부 요인이 한 가지라도 불리해지면 급속도로 나빠질 수 있는 허약한 체질을 갖고 있다고 경고했다. 한마디로 모래 위에 지은 집 같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제 시스템이 외부 충격에 지극히 취약하다는 지적은 새로울 것이 없지만, 문제는 최근 들어 그런 외부 충격이 한국에 상륙할 공산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미국 경제. 미국은 각종 거시 지표가 좋아지고 기업들의 실적 개선이라는 2개의 프로펠러에 의해 9년째 고공 비행을 계속하지만, 과열 경기를 우려하는 그린스펀 의장이 경고음을 계속 울리고 있다. 물론 그런스펀 의장은 5월18일 열린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단기 금리를 인상하지는 않았다. 일단 미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소비를 줄이도록 경고음을 내는 선에서 머무른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연일 미국 주가가 떨어지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금리 인상이 임박했다는 관측은 수드러들지 않고 있다. 5월에 소비자 물가와 임금이 진정되지 않으면 금리 인상은 필연이라는 예측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 미국이 금리를 인상하면 전세계가 미국발 세계 공황에 빠질 것이라는 폴 크루그먼 MIT 대학 교수의 예언이 현실화할 수도 있다. 우선 미국 경제 자체가 침체에 빠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한국처럼 미국 시장에 상품을 내다 파는 개도국들이 타격을 입으며 외화 채무 부담이 늘어나는 등 나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위협은 태평양 건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 1∼2년 동안 중국 수뇌부는 그럴 가능성을 부인하기 바빴지만, 최근 위안화 평가 절하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 4월 재경부와 한국은행이 각각 50%씩 출자해 만든 기구인 국제금융센터가 최근 위안화 절하 가능성을 공식 제기했다. 위안화가 4월부터 역외 선물시장(NDF)에서 절하 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지난 2주일 사이에 절하 폭이 부쩍 커진 점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현재 암시장에서 위안화는 공정 환율(달러당 8.27 위안)보다 8%나 높은 9 위안에 거래되고 있다. 따라서 국제금융센터는 중국이 위안화를 평가 절하하느냐 하지 않느냐보다 절하 폭과 시기가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선물 시장에서 나타난 이런 조짐은 국제 투기 세력들이 중국 정부의 위안화 방어 능력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본다는 추론을 낳게 한다.

실제로 중국에는 디플레이션 비상이 걸려 있다. 내수 경기가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재고로 몸살을 앓는 기업들은 연일 원가를 무시한 가격 인하 전쟁에 뛰어들고 있다. 그 결과 중국의 소비자 물가가 19개월째 마이너스 행진을 하고 있다. 과잉 설비로 고민하는 국유기업들은 연일 잉여 인력을 줄여 실업 문제도 심각하다. 실업에 대한 불안은 다시 불투명한 장래에 대비해 소비를 줄이게 만드는 디플레의 악순환을 낳고 있는 것이다. 위안화가 평가 절하되면 그 파급 효과는 당장 동남아 국가 통화의 평가 절하로 이어질 것이고, 이에 따라 한국 수출은 엄청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밖에도 10원=1엔이라는 엔화 대 원화의 10 대 1 황금 비율이 깨진 것은 물론 약세 기조를 벗어날 줄 모르는 일본 엔화도 수출에 두통거리로 작용하고 있다. ‘엔화 약세, 달러 강세’ 현상은 현재로서는 일본과 미국 두 나라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진 부분이어서 조만간 방향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전문가가 많다. 물론 중국 정부의 위안화 평가 절하를 가장 겁내는 일본이 ‘엔화 가치를 더 떨어뜨릴 경우 위안화를 절하할 수도 있다’는 위협을 무시하기 어려우리라고 관측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미국과 중국과 일본에서 시도 때도 없이 발하는 위협에 한국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구조 조정으로 체질을 튼실하게 만들어 외풍에 견디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정부의 생각도 비슷하다. 정부가 지금까지 팽창 정책을 펴온 것도 경기 부양과, 이를 통해 구조 조정을 원활히 하려는 양수 겸장 목적이었다. 한국개발연구원 김준경 연구위원은 “지난해에는 공황이 일어날까 봐 구조 조정을 과감히 할 수 없었다. 팽창 정책은 한국 경제로 하여금 구조 조정이라는 충격을 흡수할 수 있게 하려는 완충 장치였다. 이제는 경제 여건이 좋아져 구조 조정을 안할 명분이 없으니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지적했다.
“경제 회복은 보았으나, 경제 개혁은 못 보았다”

한국에 돈을 대준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은 물론이거니와 세계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경제 학자들까지 입을 맞춘듯이 한국이 구조 조정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 협박에 가까운 주문을 하고 있다. 특히 5대 재벌 구조 개혁이 어떻게 되느냐에 구조 조정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을러대고 있다. 물론 이런 주장을 음모론이라고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자기들과 경쟁 관계인 한국의 경제 전사들(재벌)을 무력화하려는 음모인데, 이렇게 남 좋은 일에 한국 정부가 영합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 등 선진국이 설사 이런 속셈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구조 조정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일까? 그렇지는 않다. 한국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초대형 부실을 털어버리지 않는다면 한국은 다시 한번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경제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구조 조정의 핵심은 금융기관의 과다한 부실 채권을 처리하고 한계 기업을 빨리 정리하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지금까지 구조 조정을 밀어붙였지만 사실상 이루어낸 것이 별로 없다. 은행과 종합금융사 들을 정리하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펼쳐졌지만, 투자신탁사 같은 진짜 부실덩어리는 손도 못대고 있다.

기업 부문도 비슷한 형국이다. 작년에 부도율이 높았다고 하지만, 대부분 영세 중소업체가 넘어졌을 뿐 대부분의 대기업은 아무리 부실해도 만기 연장을 받아 살아 남았다. 그야말로 ‘문제 기업’들이 죽지 않고 암약하는 것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만약 정부나 정치권이 내년 4월 총선까지 금융기관들에 기업의 뒷돈을 계속 대주라고 종용하며 초대형 부실 기업을 정리하지 않는다면 모처럼 회복 조짐을 보이는 경제가 일시에 쓰러질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한국 경제의 복병은 이런 ‘정치 요소’만이 아니다. 심각한 문제는 기업 구조 조정을 독려해야 할 채권 은행들에게는 구조 조정을 해야 할 유인이 없다는 사실이다. 거래 기업의 부실을 들추어내면 즉각 자기 은행의 부실로 파급되기 때문에 은행장들은 자기 명을 보존하기 위해 부실을 들추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숨겨진 부실 규모가 천문학적 수준이 될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의 톰슨 뱅크워치라는 은행 분석 기관이 ‘한국의 일부 은행은 금융 위기를 맞기 수년 전부터 자본 잠식 상태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분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구조 조정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한국에서 구조 조정을 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한국 특유의 기업간 하도급 관계 때문이다. 웬만한 대기업들은 적게는 몇백 개, 많게는 수만 개씩 하청 중소 기업을 거느리고 있다. 중소기업의 70% 이상이 이렇게 대기업에 목을 매고 있다. 만약 부채 비율이 500%가 넘어 ‘기술적 파산 상태’에 이른 대기업이 부도를 내는 당연한 일이 빚어지면 줄줄이 부도가 날 수밖에 없다. 알짜 중소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정부는 이런 ‘오버 킬’(과다 죽음) 현상 때문에 구조 조정을 과감하게 밀어붙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경기 회복 조짐이 완연한 최근에도 구조 조정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한국의 미래가 없다는 경고는 계속되고 있다. 코리아 소사이어티에 참여한 월가 논객들의 주장을 더 들어보자. 메릴린치의 국가 위험 담당자인 칼 애덤스는 “경제가 회복되는 것은 보았지만, 개혁은 보지 못했다”라면서 개혁의 폭과 속도가 느리다고 지적했다. 마조리 시어링 상무부 차관보는 한술 더 떴다. “위기가 끝났으니 이제 쉬자고 방심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라며 한국 정부에 개혁의 심도를 높여 위기가 재발되지 않는 경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5월20일 캉드쉬 총재와 IMF 체제 1년6개월을 평가하는 자리를 가지면서 자신이 98년 1월 ‘IMF가 요구한 개혁을 120% 완수하겠다’고 한 약속을 이제 모두 지켰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소한 월가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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