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YS 정권 몸통 물고 ‘악어의 눈물’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1997.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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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김대통령 만들기→비판 포기→김현철 물어뜯기→위선적 반성→차기 주자에 ‘기웃’
언론사 편집국장들의 표정은 환하기 그지없었다.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찰칵, 공동취재단 사진기자의 플래시가 터졌다. 그리고 끝이었다. 편집국장들에게는 미리 작성한 신년 기자 회견용 보도 자료가 배포되었다. 49개 항목에 걸친 이슈를 일문일답 식으로 정리해 놓은 자료였다. 92년 12월 말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의 일이다. 이 날 질의 응답은 따로 없었다. ‘기자 회견’이라는 이름이 무색한 이 자리에서 누구도 큰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4년 뒤. <조선일보>는 김현철씨 비리 의혹에 대한 엄정한 검찰 수사를 촉구하며 다음과 같은 내용의 사설(3월23일)을 실었다. ‘대통령의 아들을 비롯한 권력 핵심이 (예전과) 똑같은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했다면 그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요, 그런 정권은 이중성을 지닌 위선 정권일 뿐이다.’ <동아일보>는 자질론을 바탕으로 대통령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YS를 겪고 보니’라는 제목의 칼럼(3월11일)이 그것이다. ‘YS는 지금 많은 국민의 눈에 힘이 빠진 고개 숙인 대통령으로 비치고 있다. 어쨌든 YS의 인기 급락은 우리에게 역설적인 교훈을 주고 있다. 즉 대통령을 잘 뽑아야 한다는 교훈이다.’

YS가 ‘언론의 동네북’이 된 까닭

한때 ‘언론 플레이의 귀재’‘언론이 만들어 준 대통령’이라고까지 불렸던 김영삼 대통령이 오늘날 그 언론으로부터 동네북 취급을 당하게 된 데는 복잡한 역학 관계가 깔려 있다. 야당 정치인 때만 해도 YS는 기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으로 꼽혔다. 소탈한 인간미가 그의 강점이었다. “빈틈 없는 DJ나 JP에 비해 YS는 항상 마음 편하게 만날 수 있었다”라고 통일민주당 시절 상도동을 출입했던 ㅊ기자는 회고한다.

또 하나의 강점은 정성과 돈이었다. ‘YS 멸치’와 ‘YS 촌지 봉투’가 이를 상징한다. 명절이나 경조사 때면 정치부 데스크와 기자들 집에 어김없이 YS 멸치가 한 부대씩 배달되곤 했다. YS 멸치를 안 받아 본 사람은 정치부 기자 자격이 없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다. 김영삼 대통령의 아버지 김홍조옹이 경영하는 거제도 앞바다 어장에서 직송한 이 멸치는 맛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고 한다.

통일민주당 시절 처음 등장한 YS 촌지 봉투도 기자들을 ‘감동’시켰다. 다른 정치인에 비해 김영삼 대통령의 촌지 단위가 컸다는 것은 기자들 사이에 공공연한 비밀이다. 여기에 정성을 더한 창작품이 YS 촌지 봉투였다. 지하철 패스만한 크기로 특수 제작한 이 봉투는 손 안에 쏙 들어갔다. 이 봉투에 수표를 꼭꼭 접어 넣은 뒤 악수하는 척하면서 슬쩍 쥐어주면 기자도 ‘남사스럽지 않게’ 촌지를 건네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봉투는 그뒤 다른 정치인 사이에서도 널리 유행했다. 이처럼 공을 들인 대가로 기자들은‘30분을 독대해도 건질 만한 멘트가 거의 없는’악조건을 무릅쓰고 알아서 성의껏 꾸며댄 ‘YS 어록’을 본사에 송고하곤 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한 뒤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우선 ‘멸치’와 ‘봉투’가 자취를 감추었다. 역대 정권에서 일이 있을 때마다 기자실에 내려보내곤 하던 ‘격려금’도 사라졌다. 사정과 개혁을 앞세운 정권인 만큼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문제는 대통령을 만날 기회가 지나치게 적어졌다는 것이었다. 93년 3월4일 취임 뒤 첫 기자 간담회에서 앞으로 기자들과 자주 만나겠다고 공언한 것과는 달랐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YS를 만나기보다는 쉬웠다”라고 말하는 한 청와대 출입 기자는, 한 달에 두세 번 먼발치에서 대통령 얼굴을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고 전했다. 5공 때만 해도 대통령은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기자들을 만났다. 이른바 ‘소원 들어주기’라고 불린 이 자리에서 접수한 기자들의 ‘민원’은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신속하게 처리되었다.

기자들 사이에 청와대가 ‘특종 없는 출입처’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김대통령과의 만남이 줄어들기 시작한 이즈음부터였다. ‘청와대 출입 기자의 三樂’이라는 유행어도 생겼다. 인왕산 자락이어서 공기 좋고, 1천5백원이면 구내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할 수 있으니 밥값 싸 좋고, 춘추관(청와대 기자실이 있는 건물) 안에 작은 탕이 있어 내킬 때 목욕할 수 있다는 세 가지 즐거움을 빼면 청와대 출입 기자들에게는 아무런 낙도 없다는 역설의 표현이었다.

비단 청와대 기자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대통령은 언론과 접촉하는 것 자체를 기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문민 정부 출범 2년째인 94년 청와대는 각 언론사의 창간·창사 기념 대통령 인터뷰를 3분의 1로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연두 기자 회견도 대국민 담화문 발표로 대체했다. 이는 ‘문민 독재’라는 비판이 막 등장하던 시기와 일치했다.

물론 대통령 관련 기사가 언론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95년 각 방송사 노조 소식지에는 일제히 ‘땡김(金) 뉴스 부활’이라는 비판이 실렸다. 그 해 국정 감사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방송은 일본·미국·유럽 방송에 비해 4∼7배 이상 대통령 관련 기사가 많았다. 결국 ‘홍보’는 넘치는데 ‘보도’는 실종되었던 셈이다.

기자협회가 95년 8월 전국의 신문·방송·통신사 차장 이하 평기자 6백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91.4%가 ‘YS의 언론관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기자들은 김대통령이 언론을 △직·간접적인 통치·규제·관리의 대상으로 여기고(26.0%) △권력 수단으로 이용하려 든다(16.3%)는 점을 가장 큰 문제로 지적했다. △언론에 대해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부정적인 언론관을 갖고 있고 △언론을 지나치게 의식한다는 불평도 쏟아졌다.

기자들에게 이는 피부로 와 닿는 문제였다. 청와대의 비위에 맞지 않는 기사가 나가면 해당 언론사는 “당신네가 그럴 수 있어?”로 시작하는 이원종 전 정무수석의 ‘핏대’(이씨의 별명) 오른 항의를 각오해야 했다. 상도동 시절부터 ‘YS 측근에 따르면’으로 시작되는 기사의 90% 이상은 그에게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오랜 동안 YS 입노릇을 해 온 이씨와 기자들의 관계는 돈독한 편이었다. 적어도 청와대에 입성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청와대에만 출입하면 반YS로 돌아선다

그러나 한 기자의 표현대로 ‘언론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으면서도, 정·재계를 막론하고 대한민국내 어느 집단이 그처럼 언론 보도에 민감할까 싶게’ 사사건건 기사를 트집잡는 양상이 반복되면서 양쪽의 반목은 깊어갔다. 청와대에만 출입하면 반YS로 돌아선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문제는 기사에 대한 판단이 지극히 자의적이라는 사실이었다. 특히 이른바 가신(家臣) 출신 몇몇 비서관의 경우 개혁하겠다는데 언론이 왜 뒷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느냐는 식의 개혁지상주의 논리로 일관한 탓에 기자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문민 정부와 언론 간의 반목은 김현철씨 사건을 계기로 폭발했다. 기자들이 끈질기게 추적해 정·관·재계에 거미줄처럼 얽힌 ‘김현철 커넥션’이 드러났고, 신문들은 사설과 칼럼을 통해 연일 성역 없는 수사를 촉구했다. 이 과정에서 언론은 ‘혐의 없다’고 검찰이 풀어 준 김현철씨를 재조사받게 만든 일등 공신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럼에도 한 가지 의문은 남는다. 최고의 정보와 자료를 가졌다는 언론사들이 사전에 김현철씨 비리 의혹을 과연 몰랐을까 하는 의문이다. 물론 모르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한겨레>를 비롯해 몇몇 매체가 청와대와 겪은 마찰 때문에라도 이같은 사실은 그간 부분적으로 불거져 나왔다(39쪽 상자 기사 참조).

이같은 의문에 공식으로 답하듯이 최근 주요 일간지들은 같은 주제를 놓고 잇달아 칼럼을 써 눈길을 끌었다. 쟁쟁한 논객을 동원한 이들 칼럼의 주제란 다름 아닌 ‘언론의 자기 반성’이었다. <중앙일보> ‘권영빈 칼럼’(3월21일 ‘냄비·하이에나·언론’)을 시작으로,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3월22일 ‘안썼나 못썼나’), <한국일보> ‘김성우 에세이’(3월24일 ‘난파선상의 언론’)는 한결같이 김현철씨 문제를 미리 파헤치고도 보도하지 못한 언론의 잘못을 고백했다(42쪽 딸린 기사 참조).

이들의 고백이 신선하지만은 않았다. 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당시 같은 논객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비슷한 내용의 ‘고해성사’를 한 탓이다.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의 ‘이해할 수 없는 나라’(11월19일), <중앙일보> 권영빈 논설위원의 ‘언론이 분발할 때다’(11월22일)가 그것이다. 당시 김주필은 정치 자금 제공 관행을 처음 알게 된 양 대서 특필하는 언론의 위선을, 권위원은 ‘설(說)’만 남발하고 권력 감시 기능을 제대로 못한 언론의 책임을 질타했다.

지난 3월22일자 <조선일보>는 김현철씨 문제를 ‘안썼나, 못썼나’에 대한 구체적인 자기 고백을 담고 있었다. 칼럼을 쓴 김대중 주필은 김대통령이 취임하기 나흘 전 초판 신문에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썼다가 김대통령의 강력한 ‘반발’로 김현철씨 관련 대목이 모두 빠지고, 제목도 ‘대통령의 친인척’으로 바뀌어 나간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 사건이 있은 뒤 스스로 설정해 놓은 ‘자기 자신의 벽’과 ‘권력과의 불편한 관계’를 꺼리는 언론계 풍토가 합쳐져 침묵하는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김현철 죽이기’는 4년 벼른 복수극?

그렇지만 여전히 쉽게 가시지 않는 의문이 또 하나 있다. 언론이 그렇게 허약한 집단인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농담은 상징적이다. ‘아들을 낳으면 어디로 보낼 것인가. 60년대는 육사, 70년대는 재벌 기업, 80년대는 언론사.’ <시사저널>이 지난해 각계 전문가 1천7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언론은 여야 정치 집단에 이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대통령 제외)으로 꼽혔다.

이같은 집단에 대해 김대통령이 취임 초기 칼을 빼들려 했다는 사실은 의미 심장하다. 김대통령은 취임 직후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93년 4월2일)에서 “문민 정부 시대의 정부와 언론의 관계는 달라져야 하며,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써먹던 당근과 채찍의 언론 정책은 이제 끝났다”라며 양자 간의 조화로운 협력을 역설했다. 그러나 발언과 달리 그는 등 뒤에서 채찍을 준비하고 있었다. 언론사 세무 조사·언론사주 재산 공개·ABC(신문 발행부수 公査) 제도 전면 실시를 주요 뼈대로 삼는 이른바 언론 개혁 프로젝트를 추진한 것이다.

이를 추진한 배경에 대해서는 두 가지 분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고위 공직자 사정·재산 공개 등 3당 합당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추진했던 강성(强性) 개혁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언론 개혁도 추진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언론을 정부의 통제·규제 아래 두기 위해 언론사의 아킬레스건을 미리 틀어쥐려는 전략이었다는 분석이다.

배경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언론사의 저항은 격렬했다. 결국 언론사에 대한 세무 사찰은 6개월 만에 중단되었다. 사주의 재산 공개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93년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박관용 민자당 사무총장은 지난해 8월 <미디어 오늘>과 가진 인터뷰에서 “언론사가 차일피일 시간을 끌고 자료도 협조하지 않아 세무 조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라며, 이 때문에 세무 조사 결과를 공표하지 못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사주에 대한 재산 공개는 김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사항이었다고 덧붙였다.

채찍만 휘둘렀을 뿐 당근이 변변치 않았던 것도 언론사들의 반발을 불렀다. 95년부터 신문사마다 사활을 걸고 준비해 온 위성 방송 사업에 대해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부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문민 정부와 언론 간의 이같은 관계는 소수 재벌·족벌 중심의 소유 구조로 유지되는 언론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다. 최장집 교수(고려대·정치학)는 <한국 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이라는 책에서 ‘낮은 수준의 사정과 절차적 개혁에 관한 한 언론은 개혁의 지지 세력이었으나, 개혁이 절차적·실질적 수준에서 심화되기 시작하는 순간 언론은 완강한 저항 세력으로서의 본모습을 드러냈다’라고 지적했다. 김서중 교수(광주대·출판광고학)는 80년대 후반 이래 재벌의 언론산업 진출과, 매출액 급증에 따른 비재벌 언론들의 ‘언론 재벌화’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언론은 기업화했고, 언론 종사자 역시 보수화했다. 그렇다면 언론이 겉으로는 금융실명제 실시를 환영하면서 그토록 많은 ‘사족’을 붙였던 속사정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노태우 비자금 공판정에 선 사주를 보며 ‘두고 보자’고 이를 간 언론사가 없으란 법은 없는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김대통령을 겨냥한 최근 언론의 김현철 물어뜯기에 대해 ‘4년을 벼른 복수극’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것은 이처럼 복합적인 요인 때문이다. 특히 언론 개혁 프로젝트를 추진한 집단이 성균관대 ㄱ교수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김현철 사조직’이라는 심증은 복수극의 강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투명하게 진행하지 못한 방식이 잘못되었을 뿐 언론 개혁이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었던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 언론학자들의 대체적인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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