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자금 수조원 주인은? 돈 쓴 재벌은?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6.1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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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기업체에 걸려온 괴전화들이 이 모든 파문의 발단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큰 금액을 낮은 이자로, 장기간 빌려주겠다는 제안이었다. 통화 내용을 믿기에는 제안이 너무 황당무계했고 엉뚱했다.

93년 8월 실명제 실시 직후부터 시작해 정확히 6개월마다 반복된 이 제안에 관한 소문을 믿는 사람은 당초에는 거의 없었다. 이 제안을 둘러싸고 일부 기업들이 협상에 임했다는 문건들이 나돌기도 했으나, 그것은 한낱 촌극으로 치부되었다. 정부의 당초 입장도 그랬다. 단순한 사기극이라는 것이었다.

전·노 씨 비자금과는 별개

괴전화와 관련한 소문이 설득력을 얻게 된 것은 지난해 10월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파문이 터지면서였다. 당시 한보그룹이 실명제 실시 직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6백여억 원을 끌어들였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이는 비록 일부이지만 괴자금의 존재가 밝혀졌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보그룹이 사용한 자금이 괴전화와 직접 관련이 있는지는 여전히 확실치 않다. 비자금 파문 당시 한보그룹은 사채업자로부터 돈을 쓰라는 제의가 와서 썼다고 했으나, 정작 검찰은 그 돈이 노씨 자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썼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은 1심에서 노씨에 대한 뇌물 공여 혐의 외에도 업무방해죄가 적용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현재 2심이 진행 중이다. 놀랄 만한 일은 괴전화 소동이 전직 대통령 비자금 파문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난 최근에도 재연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이 괴자금의 일부이거나 아예 무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이번에는 제안에 응한 몇몇 기업의 통장 사본까지 공개되었다. 지난 10월10일 국정감사 당시 김원길 의원(국민회의)은 거평그룹과 신호그룹의 자금 요청서와, 이 돈을 끌어들이기 위한 주거래 은행 통장 사본을 공개했다.

이번에는 검찰도 나섰다. 지난 9월부터 괴자금 파동을 조사하기 시작한 서울지검 특수 1부(朴柱宣 부장검사)는 몇몇 브로커와 브로커의 제의에 응한 일부 기업 관계자를 상대로 괴자금의 존재 여부를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검찰이 최근 몇년간 경제 분야 최대 미스터리라 할 만한 괴자금 파동의 전모를 파헤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현재까지 관련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기업이 자금주와 접촉하는 방식은 첩보전을 방불케 하리만큼 극비리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선 기업에 대한 거액 대출 제의는 점조직 브로커들과 알선책(이하 기업에 직접 전화를 거는 브로커)을 통해 이루어진다. 5∼6 단계까지 거치는 브로커들 간의 거래에서 전주는 거의 완벽하게 베일에 가려지게 된다. 실제로 괴자금을 썼다는 의혹을 받는 한 기업에 2백억원을 쓸 용의가 있는지 알아보아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는 한 사람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정상적인 직장인이다. “나한테 연락한 사람에게 전주(錢主)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자기도 모른다는 대답만 들었다.” 왠지 불안한 일에 말려들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어, 그는 곧 이 일에서 손을 뗐다.

직접 기업에 전화를 거는 알선책들은 돈을 쓸 뜻이 있다는 것을 입증할 각종 서류를 기업에 요청한다. 대출요청서(때로는 요청서 혹은 대출 확약서 등)와 이를 위한 이사회의 차입 결의서, 인감증명서 등이 그것들이다. 특히 대출요청서에는 그룹 회장이 서명 날인한 명함이 첨부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때 알선책들은 대출금의 2∼6%에 이르는 커미션을 미리 달라는 지불공제각서(혹은 선지불공제합의각서)를 요구한다. 자기 몫은 확실히 챙기겠다는 뜻이다. 각종 문건을 통해 공개된 이 단계 이후 거래가 어떻게 진전되는지에 대해서는 브로커들의 증언 외에는 달리 증명할 방법이 없다. 브로커들에 따르면, 그 다음 단계에서 브로커와 알선책 들은 완전히 배제된다. 정체 불명의 전주와 기업이 직접 돈을 건네고 받는 것이다. 따라서 알선책과 기업 사이에 오간 각종 문건은 해당 기업이 괴자금을 쓸 용의가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일 뿐 사실상은 아무 의미도 없다.이름을 감추고 <시사저널>에 괴자금 파동의 전모를 전한 한 브로커는 “괴자금을 썼다는 의혹을 받는 기업들이 브로커에게 제공한 통장으로는 실제 괴자금이 안들어 갔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괴자금과 관련한 각종 문건이 언론과 국회의원 들에 의해 잇달아 폭로되는 것도, 마지막 단계에서 배제된 브로커나 알선책들이 홧김에 이를 제보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형적인 거액 대출 과정만 들여다보아도 괴자금 파동이 그동안 정부가 설명했듯이 단순한 사기극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직 커미션을 떼였다는 기업이나, 대기업을 상대로 사취에 성공했다는 브로커가 없기 때문이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목적을 노린 치밀한 사기 행각일 가능성은 없을까.

이와 관련해 정부 당국자나 관변 경제학자 들이 흔히 이 파동을 사기 행각이라고 보는 이유는, 기업에 들어오는 대출금 제의의 규모가 터무니없이 크다는 점이다(이들은 이 문제에 대해 공식으로 말하기를 꺼린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기 전 2조8천억원에 달하던 비실명 계좌 중에서 아직도 실명 전환이 안된 계좌는 3백58억원에 불과해, 수천억원에서 심지어 1조원에 이르는 검은돈이 기동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계 실무자들은 이런 시각이 우리 경제의 사각 지대라고 할 사금융이나 음성 자금의 규모를 지나치게 과소 평가한 것이라고 본다. 중소기업의 사채와 가계의 빚을 합친 사금융 규모는 추정 기관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대체로 8조4천억∼27조원. 여기에다 남에게 빌려주지 않고 현금이나 채권을 비롯한 금융 상품 형태로 간직한 자금까지 합치면 전체 음성 자금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가 된다.
정부 묵인 아래 괴자금 대출?

괴자금의 존재를 믿는 이들이 지적하는 것은, 기업에 대한 거액 대출 제의가 전통적인 의미의 사금융과는 전혀 딴판이라는 점이다. 전통적인 사금융은 주로 기존 금융기관으로부터 돈을 빌리기 힘든 중소기업이나 여신 금지 업종 업체(전체 사업체의 25%) 등을 대상으로 높은 이자를 받는 돈놀이다. 반면 괴자금 파동에서는 주로 대기업을 상대로 실제 여신 금리보다 훨씬 싼 5∼6% 금리를 요구하고 있다. “결국 돈을 벌겠다는 게 아니라 돈을 은닉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는 얘기다.” 한 은행 개인고객(PB) 담당자의 말이다.

이 파동이 실명제 실시 무렵부터 터져나왔다는 것도 괴자금이 실명제를 피해 숨을 곳을 찾는 돈이라는 가설을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 특히 지난 8월에 나온 금융연구원의 방대한 연구 보고서 <우리나라 사금융 시장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실명제 실시 이후 사채 시장은 심각한 구조 변화를 겪고 있다. 사채업자들의 증언까지 망라한 이 보고서에 따르면, 전직 공직자나 정치권의 검은돈과 대기업, 각종 재단, 의료법인의 비자금은 급속히 전통적 사채 시장을 이탈했다고 한다.

금융 시장 실무자들이 괴자금 파동의 주역으로 지목하는 것은 정체가 결코 드러나서는 안될 이런 부류의 돈들에다 전통적으로 브로커 조직에 의해 운용되어 온 거액의 사채업자 돈이나 해외 자금 등이다. 이들은 또 실명제 실시를 전후해 상당수 금융 브로커 조직이 이런 괴자금 주인들과 접촉해 자금 은닉과 분산 처리에 관해 집중 논의한 점도 들고 있다.

기업에 돈을 빌려주어 묻어두는 방법 외에 이들이 강구하던 방법 가운데 하나는 각종 국·공채 형태로 괴자금주들이 가지고 있는 자금을 현금화하는 작업이다. 브로커들은 이들과 계약을 맺으면서 약정서(<유형 2> 참조)를 사용하기도 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런 유형의 작업이 실재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몇몇 브로커들이 증언하고 있으나, 그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브로커들이 괴자금 은닉과 분산 처리를 마치 정부의 묵인이나 지원을 받아 하고 있다는 인상을 퍼뜨리고 다니는 점 역시 여전히 풀리지 않는 부분이다. 거액 대출을 제의하는 알선책들은 자신들의 제안에 긴가민가 하는 기업 실무자들에게 ‘이 작업은 정부 정책의 일환’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이들은 커미션 부분을 일종의 기부금 형태로 해서 국세청이 인정하는 영수증으로 처리해줄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기도 한다. 이들의 이런 발언은 여당을 중심으로 해서 일부 정치인 사이에서 실명제에 대한 보완책이 거론되는 것과 맞물려 그럴듯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족하다. 실명제 보완책이 거론된다는 것 자체가 실명제에서도 꼼짝 않고 숨을 곳을 찾는 괴자금이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물론 실명제가 실시된 뒤에도 보완책의 하나로 장기 저리 채권을 발행해 이를 산업자금으로 흡수하려는 조처가 실시되었으나, 자금 출처 조사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자금주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물론 브로커들 가운데 일부는 괴자금주를 상대로 치밀한 사기극을 벌인 것으로 확인되기도 한다. 이들이 괴자금주들에게 매입하라고 권한 증서 가운데 하나는 58년 일본 대장성이 발행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는 액면 천억엔권 채권. 이들이 내민 문건들 가운데는 일본 내의 실질 소유주로부터 사실상의 모든 권리를 양도받는다는 서류들도 포함되어 있었다(<유형 3> 참조). 검찰은 올해 7월 이들 브로커 조직(한국인 1명과 일본인 2명)을 내사해 이들이 전문적인 일본 수표 위조 조직의 일원임을 밝혀냈다.

괴전화에서 시작된 괴자금 파동은, 실명제 실시로 때를 만난 브로커들과, 궁하면 돈의 출처를 묻지 않고 이를 끌어들이는 관행에 익숙한 기업이 전면에 나선 한 편의 장편 드라마를 연상시킨다. 전직 공무원이나 정치인, 사채업자 누구든 간에 실명제 실시로 간이 콩알만해진 괴자금주가 그 주인공이다. 거기에 현 정부나 정치권이 어떤 식으로 등장할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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