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바꾸고 인생도 바꾼다?
  • 김은남·차형석 기자 ()
  • 승인 2004.03.0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요즘 여의도에는 ‘17대 총선을 두번 치를지 모른다’ ‘믿을 것은 가족밖에 없다’는 말들이 심심치 않게 떠돈다. 3월 중 국회를 통과할 개정 선거법 때문이다. 이 선거법을 간단히 말하면 ‘돈 쓰면 죽는다’이
요즘 여의도에는 때아닌 괴담 하나가 돌고 있다. ‘17대 총선은 두 번 치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에 가면 이 괴담은 더욱 그럴싸한 형태로 가공·유포되고 있다.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번 총선에 2단계 전략으로 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은 청와대·내각 대거 징발에 금권·관권 선거까지 총동원한 올인 전략으로 4·15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는 것이 첫 번째요, 이것이 실패할 경우 4·15 직후 대대적으로 재·보선을 치러 다시 한번 과반수 확보를 노려보는 게 두 번째 전략이다.”

이같은 음모론의 근거로 그는 대통령의 잇단 공명 선거 강조 발언을 들었다. 공명 선거를 빙자해 노대통령이 무자비한 관건 선거를 획책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인태 전 정무수석 또한 2월 초 총선 출마를 위해 청와대를 떠나기 직전 다음과 같이 의미 심장한 말을 남겼다. “이번에는 전 선거구에서 선거를 다시 치를 수도 있다는 비장한 각오로 공명 선거를 실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앞뒤를 따져보면 이런 음모론을 가능케 한 진짜 원천은 개정 선거법일지도 모른다. 비록 한·민(한나라당·민주당) 공조에 따른 지역구 획정 번복 소동으로 2월 임시국회에서도 통과되지 못했지만, 3월 중 늑장 통과가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개정 선거법은 ‘무혈 쿠데타’라는 표현이 무색하리만큼 혁명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평소 ‘쿨’하기로 정평이 난 열린우리당 천정배 의원조차 <벤허>를 완성하고 “신이시여, 이 영화를 제가 만든 게 맞습니까!”라고 부르짖었다는 윌리엄 와일러 감독처럼 선거법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목소리를 높일 정도다. “(정개특위 간사로서) 제가 법 개정을 주도했다고는 하지만 저 자신 믿기지 않을 만큼 혁명적인 법이 만들어졌습니다. 비현실적인 정도로 혁명적인 법입니다!”

도대체 선거법 개정안이 어떻기에 이 호들갑이냐고? 답은 간단하다. 개정안 자체야 선거법·정당법·정치자금법을 망라하는 복잡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24~25쪽 상자 기사 참조), 이번 선거법의 핵심은 다음 여섯 글자로 요약된다고 할 수 있다. ‘돈/쓰/면/죽/는/다’. 역설적인 것은,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이 다름아닌 국회의원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선거법 위반 사범 적발시 1계급 특진 같은 ‘당근’으로 경찰 조직을 들썩이게 만든 것은, 야당 주장대로 대통령의 ‘술수’일 수 있다(28쪽 상자 기사 참조). 부정 선거 감시에 나선 선관위 공무원 또한 승진에 대한 기대가 높은 편이다. 한 선관위 지도계장은 “본래 선관위 공무원이 6급에서 5급으로 승진하려면 무조건 시험을 봐야 했는데, 이번부터는 심사 승진제를 병행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감시 실적이 좋으면 승진에 유리하지 않겠냐”라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과 선관위의 단속도 법이 받쳐주지 않으면 한계가 있는 법. 그런 의미에서 16대 국회는 한국 정치사에 기록될 ‘대형 사고’를 친 셈이다. 정치 개혁을 열망하는 국민 여론에 떠밀려서건, 선거법 개정안이 가져올 파장을 미처 가늠치 못해서건 선거법을 이렇게 혁신적으로 다듬은 것만큼은 16대 국회의 업적으로 남을 만하다.

유권자 처지에서 보자면 이번 개정안의 백미는, 누가 뭐래도 유권자 스스로를 ‘죄수의 딜레마’에 빠뜨린 정치자금법 조항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자기 동네에 출마한 한 후보로부터 5천원짜리 설렁탕 한 그릇을 얻어먹었을 때 유권자는 다음과 같은 갈등 상황에 빠지게 되어 있다. 선거법 개정안에 따르면 향응을 제공받은 사람은 수수액의 최고 50배에 달하는 과태료를 물어내야 한다. 다시 말해 선관위 직원이나 경찰한테 잘못 들켰다가는 5천원짜리 설렁탕 한 그릇 얻어먹고 25만원을 물어내야 한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해 자기가 먼저 향응받은 사실을 신고하면, 거꾸로 최고 50배에 달하는 포상금을 지급받을 수 있다. 최근 경기도 수원에서는 한 후보가 기자 10여 명과 회식한 뒤 10만 원이 든 돈 봉투를 뿌린 혐의로 검찰에 고발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처음 제보한 기자는 선관위로부터 포상금 천만 원을 받게 되었다. 문제는 회식에 참가한 나머지 기자들.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되기 전에 사건이 터졌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 기자들은 생돈 천만 원씩을 각각 물어내고 망신은 망신대로 당할 뻔했다.

물론 익명으로 제보한 사실이 자칫 드러날 경우 주변으로부터 배신자라는 손가락질을 당할 위험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그렇지만 내부 결탁자보다는 내부 고발자를 높이 치는 쪽으로 사회 풍토가 급변하고 있는 만큼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현재 경찰이 제시한 최고 포상금은 5천만원. 선관위는 여기서 한술 더 뜬다. 중앙선관위 김용희 지도과장은, 피고발자가 법정에서 당선 무효에 해당하는 형량을 선고받을 경우 고발자에게 포상금 1억∼2억 원을 추가 지급하는 규정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간첩 신고 최고 포상금이 1억원(간첩선 신고는 1억5천만원)임을 감안하면 이는 포상금 치고 천문학적인 액수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선거법 위반자라면 간첩만큼 보기 드문 것도 아니다. 곧 간첩 잡으러 다니느니, 로또복권 당첨되기 기다리느니 선거 현장 열심히 쫓아다니는 것이 ‘대박’ 확률이 훨씬 높아진 셈인데, 이 경우 당첨 1순위는 누가 뭐라고 해도 선거에 빠삭한 일명 선거 브로커일 수밖에 없다.

‘선거 브로커 잘못 썼다가는 이번에 패가망신할 수 있다’는 말이 요즘 정가에서는 불문율처럼 통용된다. 최근 지역 유권자들에게 무려 1백83회에 걸쳐 향응을 제공한 열린우리당 경선 후보 차 아무개씨를 대구 선관위에 고발해 포상금 1천만 원을 탄 아무개씨. 그 또한 후보 사무실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내부 사람이었다고 선관위 관계자는 전한다. 그가 주요 서류를 통째로 넘겨 주는 바람에 선관위가 위법 사실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브로커만 문제인가? 프락치도 문제다. 최근 지역 유권자에게 금품 및 관광 향응을 제공한 혐의로 검찰에 고발되는 바람에 중앙 당으로부터 경선 배제 결정을 받은 송철호씨(열린우리당 울산시지부장). 울산 지역 열린우리당 후보 중 본선 경쟁력이 가장 높을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결국 경선도 치르지 못하게 된 송씨는 뒤늦게 “정치 공작에 당했다”라며 땅을 치고 있다. 한 측근은, 송씨가 울산 민주당 조직책인 이 아무개씨로부터 돕고 싶다는 제안을 받고 활동비를 몇 차례 건넸다가 함정에 걸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이씨는 말도 안되는 무고라고 펄쩍 뛴다. 송씨가 먼저 “민주당을 탈당해 나를 도와주면 돈을 주겠다”라고 회유해놓고 뒤늦게 딴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쌍방의 주장 중 어느 쪽이 옳은지는 법정에서 가려질 일이다. 분명한 것은, 이씨가 송씨를 고발하는 과정에서 민주당 인사들로부터 법률 자문 등 측면 지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라는 점이다. 단 이를 두고 민주당 프락치 어쩌고 해야 헛수고라는 것이 송씨의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어찌 되었건 송씨가 이씨에게 돈을 건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기존 정당 구도가 깨어지면서 ‘어제의 아군이 오늘의 적군이 되어버린’ 현실은 프락치 소동을 더 증폭시키고 있다. 선관위 김용희 과장의 표현을 빌리면, 지금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파이를 침투시켰다고 보면 되는 상황이다.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이 갈라지고, 한나라당 출신이 열린우리당으로 이적하는 사태가 속출하면서 선거판은 말 그대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정글이 되어버렸다.

돕겠다고 오는 자원봉사자도 함부로 믿을 수가 없다. 경기도에서 출마를 준비 중인 한 후보의 선거 참모는 “얼마 전 안면부지인 인사가 사이버 선거를 도와주겠다고 찾아왔기에 돌려보냈다. 남궁석 의원이 날아가는 사태를 보고 후보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실제로 3월 초 벌어진 ‘남궁석 쇼크’는 출마자들을 급속도로 얼어붙게 만들었다. 열린우리당 경기 용인 지역 단수 후보로 확정되었던 남궁석 의원이 관내 단체에 ‘단돈 30만원’을 기부했다가 후보 직을 사퇴하는 지경에 처하자 야당 후보들은 특히나 더 사색이 되었다. ‘여당이 저럴진대 우리는 오죽할까’라고 지레 움츠러들 만큼 여권의 출혈 또한 만만치가 않았기 때문이다.

파문이 확산되자 열린우리당은 일단 공천이 확정되어 있던 정만호(강원 철원·화천·양구·인제) 우춘환(경기 파주) 후보의 공천을 취소한다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유력한 경선 후보였던 송철호(울산 중구) 박영수(경북 칠곡) 윤훈렬(서울 영등포갑) 씨 또한 경선 참여 자격 자체를 박탈당했다. 5명 다 유권자에게 금품을 뿌리거나 향응을 베푸는 등 선거법을 위반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밖에도 선거법 위반으로 구속되거나 기소된 인사에 대해서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즉각 조처를 취하겠다고 열린우리당 클린선거대책위원회 신기남 위원장은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대해 출마자들 사이에서는 ‘해도 너무한다’는 푸념이 쏟아졌다. 정월 대보름날 벌어진 동네 행사에 막걸리값 명목으로 3만∼5만 원씩을 돌린 것이 문제가 되어 후보 자격을 박탈당한 한 정치 신인은 분통을 터뜨렸다. “시골에서 그런 자리에 빈손으로 갔다가는 욕먹기 십상이다. 유권자들의 의식은 아직 저 밑바닥에 있는데 법만 선진국 수준이면 뭐하나.”
그럼에도 중앙 당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법적 잣대를 들이대자 지역에서는 돈 있는 후보가 오히려 전전긍긍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없는 후보는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열린우리당 김근태 원내대표(서울 도봉 갑)의 부인 인재근씨는 지역 모임을 할 때마다 당원들이 만원씩 돈을 걷어 더치페이를 하고 있다며 “요즘은 후보와 내가 아예 당원들한테 빌붙어 사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강제적이든 반강제적이든 돈 안 쓰는 선거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이번 선거의 특징이다. 여야 출마자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이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국회 정개특위가 정치자금법 개정안을 처음 상정할 때만 해도 현역 의원 사이에서 불만이 팽배했다. 특히 선거가 있는 해에 받을 수 있는 후원금 한도를 3억원에서 1억5천만원으로 축소한 것을 두고 말이 많았다. ‘현행 3억원도 현실과 맞지 않아 범법자가 속출하는데 이를 더 줄이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관위 활동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지금,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돈 쓸 출구가 아예 봉쇄된 판에 돈 들어올 입구가 좁아졌다고 불평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태를 낙관할 수만은 없다. 단속과 처벌이 강화될수록 불법 정치자금이 더 음성화할 개연성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개정 선거법은 신무기일 뿐, 결국 이를 활용해 불법·구태 선거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최종 책임은 각성된 유권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는 셈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