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성 파일' 외 짜깁기 문건 또 있다
  • 김 당 기자 ()
  • 승인 1998.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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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이대성 파일’ 공개 전 입수…DJ 연북 혐의 ‘날조’
지난 3월15일 기자는 한 지인(知人)으로부터 국가안전기획부가 작성한 총 2백 쪽에 이르는 문건을 세 가지 입수했다. 이스턴사업·고인돌사업·상황사업이라는 암호명이 붙은 안기부 비밀 공작과 오익제 월북 및 편지 관련 사건, 그리고 국민회의측의 대북 접촉 관련 정보 및 입수 경위 등에 관한 보고서였다. 사실과 첩보가 혼재된 이 보고서를 작성한 목적은 분명해 보였다. 보고서에 적시된 사실과 첩보는 모두 김대중 대통령의 연북(聯北) 혐의에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파문 우려해 기사화 유보

기자는 이 충격적인 문건을 기사화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다음날 회사에 중요한 안기부 문건을 입수했다는 정보 보고만을 했다. 우선 문건 내용 자체가 신빙성이 없는 상황에서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문건을 공개할 경우 그것이 불러올 정치적 파문이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이 문건에는 기자가 가장 신뢰하는 취재원 중의 한 사람인 흑금성 공작원(박채서 전무)이 국민회의 정동영·천용택 의원과 접촉해 그들의 동향을 보고한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는 박채서 전무의 공작원 암호명이 흑금성인 줄은 몰랐었지만, 이 문건을 읽고서 그의 암호명이 흑금성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기자는 그 날로 흑금성을 만나 문건에 적시된 관련 대목을 알려 주고, 신분이 노출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지뢰’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한겨레〉가 3월18일자에서 ‘해외 공작원 정보 보고’라는 제목을 붙인 안기부 문건과 함께 흑금성이라는 공작원의 실체를 공개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겨레〉 보도를 분석해 보면, 〈한겨레〉가 입수한 문건은 기자가 입수한 문건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우선 형식이 달랐다. 전자는 ‘비(秘)’라는 비밀 표식이 있는데 후자는 평문으로 풀어 쓴 보고서였다. 그러나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또 〈한겨레〉가 입수 경로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른바 이대성 파일을 처음 입수한 정대철 부총재가 그 문건이 〈한겨레〉 문건과 일치한다고 말한 것으로 볼 때, 둘 다 구 안기부 수뇌부가 의도적으로 작성해 자기의 지인한테 흘린 것으로 보였다. 즉 문건의 작성 의도와 배포 경위 그리고 내용이 서로 비슷한 것이다.

기자가 입수한 문건 중에서 올해 3월에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는 ‘국민회의측의 대북 접촉 관련 첩보 및 입수 경위’라는 제목을 단 안기부 문건에 따르면, 김대중 대통령은 치명적인 덫에 걸려 있다. 대선 전의 김대중 후보 비방 기자회견 사건으로 지난 2월 구속된 ‘재미 교포 협조자 윤홍준(31)이 96년 7월 이후 입수한 국민회의측의 대북 접촉 추진 관련 첩보 및 입수 경위 보고’라는 해설을 붙인 이 안기부 문건에 따르면, 김대통령은 선거 때마다 북한의 자금을 지원받았고 이번 대선 때도 선거 자금을 지원받았다는 것이다.
또 이 문건은 금품수수설과 함께 국민회의측의 연북 사업에 관련된 인물로 당시 조만진 조직국장과 박상규 의원 그리고 김홍일 의원을 거론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아태재단 임동원 사무총장(현 외교안보수석)까지도 연북 접촉 혐의가 있는 것처럼 거론해 결국 김대통령을 겨냥하고 있음을 분명히하고 있다.

그리고 이같은 황당한 첩보를 사실인 것처럼 뒷받침하기 위해 사실 관계를 밝힌 대목도 많았다. 우선 눈에 띄는 부분은 보고서에서 ‘협조자’라고 표기한 재미 교포 윤홍준씨(구속)와 이선생 또는 이우석이라는 가명을 쓴 안기부 공작원과의 관계였다. 이 문건에 따르면, 이우석씨는 96년 7월부터 협조자 윤씨를 관리하면서 수집한 DJ의 연북 혐의에 관한 정보를 이스턴사업이라는 공작명으로 보고해 왔다.

문건에 따르면, 이씨는 DJ의 결정적인 연북 증거를 포착하기 위한 공작을 추진했는데, ‘우국 청년’ 윤씨는 이미 자신이 제공한 것만으로도 증거가 충분한데도 안기부가 수사를 망설인다고 판단해, 이에 불만을 품고서 사전 협의 없이 베이징·도쿄·서울 등지에서 DJ의 연북 혐의를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해버렸다는 것이다.

안기부는 그 근거로 윤씨가 기자회견을 가진 후 출국하기 직전에 김포공항에서 이우석씨에게 부친 편지도 문건에 덧붙였다. 이씨는 바로 윤씨의 기자회견 배후로 지목되어 맨 처음 구속된 안기부 203실의 6급 직원 이재일씨이다. 보고서는 이씨를 노출한 것이다. 물론 이 보고서는 첨부된 추보 형태의 단계별 공작 사업 정보 보고를 토대로 윤씨가 구속된 이후인 3월에 작성한 것이다.
대부분이 여권 관련 내용

그러나 이 문건에 따르면, 구속된 윤씨를 안기부가 조종한 혐의는 있지만 기자회견을 사주한 혐의는 없다. 또 이 문건은 윤씨를 통한 안기부의 이스턴사업이 국민회의가 연루된 상황사업(국민회의와 연계된 북한의 대남 정치공작의 암호명)에 대한 대응 공작이라는 정황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결국 안기부는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했을 뿐이라는 논리이다.

올해 2월에 작성된 ‘오익제 월북 및 편지 등 관련 사건 진상’이라는 제목의 다른 문건에는, 공작원 흑금성이 국민회의 정동영·천용택 의원을 접촉한 동향 보고와 한나라당 정재문 의원의 대북 접촉설에 대한 조사 결과 그리고 최봉구 전 평민당 의원의 대북 연계 혐의에 대한 조사 결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 정·천 의원 관련 대목을 상부선에 보고한 당사자인 흑금성은 이 문건을 보고, 상당 부분이 당시 보고된 것이 아니라 나중에 작성되었고 조작된 부분도 많다고 증언했다. 한마디로 구 안기부 수뇌부가 자신을 이중 스파이로 몰아가기 위해 고도의 짜깁기를 통해 문건을 새로 작성했다는 것이다. 이종찬 안기부장도 문건의 상당 부분이 대선 뒤에 조작된 흔적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문건은 또 최봉구 전 의원을 은밀히 조사한 결과,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고 북한의 전금철 등을 접촉해 대선 정국을 논의하는 등 남북교류협력법을 위반한 사실과, 북한 김병식으로부터 김대중 총재에게 전달해 달라는 편지가 발송되어 왔다는 등 북한의 대남공작사업 관련 인물과 접촉한 사실 등을 확인했으나, 대선을 앞둔 상황이어서 관계 기관에 이첩하지 않고 불문 처리했다고 적시했다.

한편 문건의 대부분이 여권 관련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 데 반해 정재문 의원을 내사한 부분은 끼워넣기 식으로 슬쩍 들어 있어 이채롭다. 그러나 정재문 의원에 대한 조사 결과에서는 ‘재미 교포 김양일의 소개로 11월20일 15:00∼17:00에 정재문 의원이 투숙한 베이징 장성호텔 객실에서 북한 조평통 부위원장 안병수, 아태평화위원회 강덕순 등과 접촉하였는 바, 동 접촉은 정의원이 남북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한나라당이나 관계 기관과 사전 협의 없이 공명심에서 단독으로 추진한 것으로, 기회 있을 때 다시 만나 남북 문제를 토의하자고 약속한 외, 특별히 합의하거나 문건을 교부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밝혔다.

즉 국민회의측의 위법 사실이 있었음에도 안기부가 불문에 부쳤으며, 한나라당측은 위법 사실이 없었는데도 국민회의가 문제를 삼고 있다는 주장이다.

결국 작성 목적이 뚜렷한 이런 문건을 토대로 정치권은 마치 무슨 큰 일이나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떤 것이다. 물론 문건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엄청난 파문을 불러올 수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고의로 파문을 일으키기 위해 사실과 첩보를 적절히 섞어 조작한 협박용 문건 이상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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