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울리는 티베트 의 비극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1996.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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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창간 7주년 기념 특별 취재 '세계의 지붕을 가다'/ 한족의 강압 지배에 신음‥ 독립 의지는 '강철'
 
21세기 아시아 평화는 세계 초강대국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중국의 움직임과 떼어놓을 수 없다. 중국과의 바람직한 미래 관계를 목표로 놓고 볼 때 우리는 현재 중국이 주변국(민족)에 취하는 모든 태도를 알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40여 년간 세계적으로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어온 티베트 문제는 중국이 주변 민족을 대하는 여러 자세 가운데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최소한 우리가 티베트 문제의 본질을 알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에 <시사저널>은 국내 언론사로서는 처음 티베트 독립의 상징 달라이 라마 14세를 직접 인터뷰하고, 동시에 티베트 지역으로 들어가 최근의 내부 동향과 민심을 취재했다. <시사저널> 창간 7주년 기념 기획으로 마련한 이 취재는 지난 6월24일부터 7월11일까지 진행되었다.

해발 2천7백m 높이에 자리한 인도 북부 히마찰 주 주도 심라는 달라이 라마 14세를 찾아 나선 <시사저널> 취재진의 베이스 캠프였다. 6월25일 이곳에서 자동차를 전세낸 취재진은 목적지 다보를 향해 히말라야 산자락을 타고 밤낮으로 달렸다. 달라이 라마 14세가 다보 지역에서 보름 동안 세계 불교도를 상대로 ‘칼라차크라 법회’를 열고 있기 때문이었다.

길은 빙하에 침식된 해발 4천~6천m의 첩첩 산중을 곡예하듯 뚫고 흘렀다. 꼬박 사흘을 달려 다보에 도착하니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1만5천여 불자가 좁은 계곡에 빽빽히 천막을 쳐놓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사방이 설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마을 다보에는 다보사라는 천 년 된 사찰이 있다. 10세기에 티베트인 린첸상포라는 고승이 지은 이 사찰은 인도가 자랑하는 문화재이다. 바로 그 유서 깊은 곳에서 ‘칼라차크라 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산 하나만 넘으면 바로 중국군이 총부리를 겨누는 티베트 땅이라는 점에서 달라이 라마의 이곳 행사는 다분히 상징적 의미를 띠고 있었다.

5천여 평의 행사장 주변은 무장한 인도군과 경찰이 쫙 깔려 외부에서 오는 사람은 모두 몸수색을 한 뒤 들여보냈다. 종교 행사인데 지나친 검문이 아니냐고 했더니 인도군 검문 책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행사가 시작될 무렵에 티베트인 2명과 중국인 4명이 한 조가 된 달라이 라마 테러 용의자들을 인도군이 적발해 델리로 압송한 뒤 현재 조사하고 있다.”

 
법회는 주로 달라이 라마의 법어와 불교 관련 세미나, 티베트 전통 문화 공연이 주류를 이루었다. 한국 프랑스 일본 호주 노르웨이 네팔 대만 미국 인도 등 외국에서 온 불자들이 천여 명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티베트인들이다. 한국에서 온 승려는 정우·원명·미진 스님 등이었다.

티베트인 중에는 망명 티베트인이 많았지만 개중에는 중국 당국의 감시를 피해 티베트에서 온 사람도 드물지 않았다. 그들은 돌아간 뒤 이곳 법회에 참석한 사실이 중국 당국에 알려지면 바로 구속된다며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했다. 망명 티베트인들은 다보 인근에 있는 달람살라(달라이 라마 망명 정부 거점)를 중심으로 전세계에 13만 명이 흩어져 산다. 그 중 인도에 8만, 네팔·부탄 등 티베트 접경 국가에 3만, 미국·일본·유럽 등에 2만 명 정도 분포해 있다.

조국 티베트를 등진 뒤 이렇게 흩어진 티베트인들은 달라이 라마를 먼 발치에서나마 보기 위해 천리 만리 길을 마다지 않고 열흘씩, 또는 스무날씩 길에서 보내며 성지 순례 하듯이 이곳에 모인 것이다. 그들은 오전과 오후에 각각 한번 있는 달라이 라마의 법어 시간이 오면 땅에 배를 깔고 엎드려 끊임없이 절하며 눈물을 흘린다.

“세계는 변한다. 중국의 지도력도 반드시 변할 것이다.” “우리 티베트 민족의 카르마(전생의 업보)이다. 우리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를 되찾게 되는 것도 역시 카르마이다.” “티베트와 한국은 같은 불교 문화 역사를 가진 국가다. 정부 차원은 어렵겠지만 민간에서라도 도덕적으로 연대해 달라.” 법회장 곳곳에서 한국 기자 신분을 밝히고 참석자들을 만나면 한결같이 쏟아놓는 의견과 주문이다. 티베트인들은 대부분 달라이 라마를 ‘신’으로 묘사했다.

“달라이 라마께서 친견하시겠답니다”

6월28일 오후 5시께 망명 정부 비서실로부터 ‘달라이 라마께서 친견하시겠다’는 전갈이 왔다. 망명 티베트 정부 관계자들은 모두 법회 진행을 위해 이곳에 옮겨와 있었는데, 다보사 바로 앞에 들어선 2층 건물이 달라이 라마의 집무실이었다. 접견실에 들어서자 통역 비서와 함께 기다리고 있던 달라이 라마 14세가 선 자세로 두 손을 모아 얼굴에 합장한 뒤 취재진의 손을 일일이 잡고 환영 인사를 건넸다.

 
약 1시간에 걸친 인터뷰에서 그는 세계 종교 지도자로서 한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와 21세기 인류 평화에 대한 견해, 한반도 평화를 바라보는 입장, 그리고 티베트 독립운동 지도자로서 현재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을 소상하게 밝혔다.

망명 정부측은 달라이 라마 인터뷰에 뒤이어 티베트 망명 국회(티베트 국민회의) 의장인 삼동린포체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그는 인도 바라나 시에 있는 티베트 대학 총장도 겸하고 있는데, 주로 티베트 망명 정부 현황과 최근 티베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각한 인권 유린에 대해 약 40분 동안 설명했다. 달라이 라마가 이끄는 티베트 망명 정부는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으며, 전세계 티베트인이 직접 선출한 43명과 달라이 라마가 지명한 전문가 3명을 합한 의원 46명이 의회를 구성한다고 한다. 의회는 최고 결정기관이다. 여기서 내각 각료 8명을 선출하는데 내각은 카샥이라고 부른다. 내무, 외무, 종교·문화, 교육, 보건, 재무, 주택, 안전(경호) 8개 부처가 있는데 6월6일 새로운 내각이 출범했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는 정부를 대표하며, 정부는 티베트 난민 보호와 교육, 문화 보존, 티베트 독립에 대한 중국과의 협상 및 국제 여론 조성이 주된 활동이라고 한다. 최근의 티베트 인권과 관련해 삼동린포체 국회의장은 “중국은 94·95년 두 차례에 걸쳐 이례적으로 티베트 문제에 대해 강택민 주석이 최고회의를 개최해 티베트에서 억압 정치를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달라이 라마에 대한 직접 비난은 없었는데 올해부터는 ‘최고 범죄자’라고 대내외에 직접 비난하고 나선 것도 상황 악화를 잘 보여줍니다”라고 말했다.

94년 이후 티베트내 인권 상황이 다시 악화하면서 망명자들이 급속히 늘어 지난 한 해 동안 1천6백명이 망명 정부로 넘어왔다고 한다.

6월29일 취재진은 가장 최근에 티베트에서 망명해 온 한 승려를 만났다. 로상 감쵸(36)라는 이 승려는 정치범으로 3년간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자 지난 5월 말 동료 승려 2명과 함께 해발 6천~7천m 높이의 히말라야 설산을 뚫고 사력을 다해 탈출했다고 한다. 그의 탈출담이다. “88년에 인도 불교 유적지 순례를 나왔다가 망명 티베트인들을 만나고 돌아갔는데 그게 죄가 되어 3년간 감옥에 갇혔다. 석방되니 사원에서는 승적을 박탈한 뒤였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경찰이 집에 상주하며 감시했다. 5월 초에 그 경찰이 옆집 티베트 청년?도둑으로 몰아 때려 죽였다. 동네 사람들이 흥분해 몰아세우자 겁에 질려 경찰이 도망갔다. 그날 밤을 틈타 다른 승려 2명과 함께 탈출했다. 잡히면 끝장이라 걸어서 눈이 허리까지 차는 카일라스산을 넘어 달람살라로 찾아왔다.”

그에 따르면 최근 수년간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수배된 승려나, 감옥에서 석방된 승려들은 감시를 피해 설산을 넘어 망명을 꾀하는 일이 많은데 대부분 국경에서 잡히거나 얼어 죽는다고 한다. 이 날 취재진은 불자들의 자세로 비폭력과 세계 평화를 유난히 강조하는 달라이 라마의 대중 법어를 귓전으로 들으며 법회장을 빠져나왔다. 달라이 라마의 활동과 관련해 끊임없이 세계적인 논란 대상이 되고 있는 티베트 현지에 직접 들어가 보기 위해서였다.

유치원생들 “우린 티베트 독립 원한다”

티베트 입국 거점은 네팔 수도 카트만두로 잡았다. 항공편으로 심라에서 델리를 거쳐 7월2일 카트만두에 도착한 취재진은 한국에서 마련해 둔 네팔측 취재선을 접촉했다. 그러나 그는 뜻밖에도 티베트 입국이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티베트는 공식적으로 중국이 외국인 출입 금지 지역으로 설정해 두고 당국이 허가하는 극소수 산악인·관광객·경제인만 받아들이기 때문에 서울의 중국대사관에서 받은 비자로는 입국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신분이 기자이면 무조건 중국 당국이 불허하기 때문에 도리가 없었다. 결국 기자가 아닌 일반 관광객(직업은 무직)으로 행세하기로 하고 네팔 주재 중국대사관의 문을 두드렸다. 그들은 약 이틀 뒤에 가능성 여부를 답해주겠다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 취재진은 카트만두에서 서북쪽으로 3백㎞ 떨어진 포카라 시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에는 티베트 망명자 약 5천명이 망명 캠프에서 살고 있었다. 히말라야 산맥의 대표적 영봉들인 안나푸르나 1·2·3봉, 마챠푸차레 등 해발 7천~8천m급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포카라였지만, 이곳 티베트 망명자들에게는 머무르고 싶지 않은 슬픔의 땅이었다. 국제 SOS기구에서 지어주었다는 난민촌내 유치원에서는 5~6세 가량의 티베트 어린이들이 마침 야외 학습을 하고 있었다. 취재진이 교사의 양해를 얻어 어린이들에게 무엇을 좋아하느냐고 묻자 “나는 티베트 독립을 원한다. 나는 티베트로 가서 살고 싶다”라고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이곳 티베트 난민들은 집집마다 불상(또는 탕카) 옆에 달라이 라마와 북경에 구금되어 있는 판첸 라마 11세(케툰 초이키니마)의 사진을 걸어두고 있다. 종교적 예법도 지극 정성이라 매일 아침 그 앞에 정화수 10여 잔씩을 따라 놓고 오후 5시께 물을 갈아준다.

네팔은 티베트와 히말라야 설산 봉우리들을 국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망명하는 티베트인들이 처음 거치는 곳이다. 그래서 티베트 망명 정부는 카트만두에 ‘티베트인 망명자 수용처’를 운영하고 있다. 이곳 책임자 타쉬남겔씨는 최근의 망명자 동향에 대해 “티베트에서 정치범·종교범 등 인권 사범이 주로 넘어오는데, 지난해에 1천6백명이 이곳을 거쳐 달람살라로 갔다. 망명자들은 우리가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에 의뢰해 내보낸다. 가장 최근 사례로는 5월 말 중국 정부의 달라이 라마 사진 제거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해서 쫓기게 된 승려 25명이 설산을 넘어와 우리가 망명 정부로 보냈다”라고 말했다.
7월4일 네팔 주재 중국대사관측이 티베트 입국을 허락한다고 통보해 왔다. 대신 그들은 서울주재 중국대사관이 발급한 비자에는 취소 도장을 찍고, 통행허가증을 2장 주는 식으로 전혀 입출국 기록이 드러나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

7월4일 취재진은 티베트인들과 대화가 가능한 네팔인 1명을 대동하고 카트만두를 떠나 티베트 국경으로 향했다. 자동차로 약 5시간 달린 끝에 해발 2천3백m에 자리한 국경에 도착했다. 이 통로는 중국 쪽에서 보면 옛날부터 대상들이 넘나들던 ‘천산남로’의 끝부분으로 중국과 네팔·인도를 잇는 유일한 육로이다. 국경이라야 다리 하나가 경계였는데, 거기서 트럭으로 갈아타고 1시간 가량 험준한 고갯길을 올랐다. 중국측 출입국사무소가 그곳에 있었는데 인구 3천명이 거주하는 장무라는 마을이었다. 장무에는 라사에서 취재진을 마중나온 중국인 안내자와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역할은 취재진(그들이 신분을 전혀 모르고 있는 관광객)을 안내하는 것이지만, 티베트인들과 접촉하거나 금지 구역에 접근하는 것을 감시하고 차단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달라이 라마 사진 소지하면 추방

 
예상 외로 입국 허가가 늦어졌다. 약 2시간을 서서 기다려도 허가가 나지 않자 그들은 우리 일행에게 미안했던지 구경 삼아 걸어 올라가고 있으면 나중에 차로 뒤쫓아오겠다고 했다. 가파른 비포장길을 따라 계단식으로 조성된 건물에는 국경 마을답게 식당과 기념품 및 수입 의류를 판매하는 상점이 들어서 있었다. 그런데 한눈에 알아차릴 정도로 상점들에는 전부 한족들뿐이었다. 티베트인들은 취재진을 따라다니는 거지들과 비닐 조각을 둘러친 허름한 돌더미 텐트 속의 가족이 대부분이었다. 말을 걸어도 모두 겁에 질려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취재진은 장무 마을을 벗어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을 끝에서 만난 한 티베트인은 “한족이 보는 앞에서 티베트인이 외국인과 말을 나누면 금세 경찰이 붙잡아 간다. 가끔 지나가는 서양 관광객들이 티베트인에게 달라이 라마 사진을 건네주는 일이 있다. 발각되면 바로 구속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티베트인들이 옛날에는 깨끗하고 잘 살았지만 중국인들이 들어온 뒤 다 밀려나 비참하게 산다고 덧붙였다.

장무를 벗어나 1시간 가량 산길을 걸어 올라가자 티베트인 마을이 나왔다. 마을에서 몰려나온 사람들은 취재진을 에워싸고 손을 내밀면서 ‘달라이 라마 포토’를 연거푸 외쳐댔다. 티베트에 입국하면서 지난 10여 일 동안 취재한 내용과 사진을 가지고 왔다면 그것은 이곳에서 ‘범죄 행위’가 된다. 취재진은 그에 대비해 이미 카트만두에 모든 것을 숨겨놓고 들어온 터였다. 이들 주민에게 사진이 없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권총을 차고 오토바이를 탄 사복 공안 경찰이 다가와 ‘안내자는 어디 가고 당신들만 돌아다니느냐’며 호통을 쳤다. 차가 고장나 수리 중이라 잠시 걸어 올라왔다고 하자 그는 취재진에게 오토바이 뒤에 타라고 요구했다. 차를 수리하는 곳으로 데려다 주겠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꼼짝 않고 길에 앉아 있겠노라고 통사정을 하고서야 그를 보낼 수 있었다.

도보로 2시간 이상을 걸어 올라간 뒤에야 입국 수속을 마친 우리 차가 올라왔다. 중국인 안내인은 만일 달라이 라마 사진이나 책을 가지고 있으면 내놓으라고 한다. 현재 티베트에서는 그런 것들을 엄금하고 있는데, 2주 전에는 달라이 라마 사진을 갖고 있던 한 서양인이 낀 단체 여행객이 중국군의 검문을 받다가 사진이 적발되어 그 관광 그룹 전체가 2시간 동안 중국 역사 교육을 받고 추방되었다고 한다.

우리 일행에게 그런 물건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차는 출발했다. 두 차례에 걸쳐 권총을 찬 공안원들이 차를 세우고 짐을 검사한 뒤 통과시켰다. 안내인에 따르면, 중국 정부 방침에 따라 올해 초부터 모든 가정과 사원에 있는 달라이 라마 사진을 제거했는데, 그에 반항하는 불순 세력이 있어 시끄러운 일이 생기고, 그에 따라 사원을 관광하러 오던 외국인 숫자가 줄어 관광업계만 해를 입는다고 했다.

중국 군인, 티베트 노인 무차별 구타

차는 해질녘에야 해발 4천m에 있는 니알람이라는 티베트인 마을에 도착했다. 해질녘이라고 하지만 중국은 그 광대한 영토를 북경 표준시 하나로 통일하고 있기 때문에 밤 10시께였다. 중국측 안내자의 감시가 심해 숙소를 잡은 뒤 몰래 빠져나와 밤에 취재할 수밖에 없었다.

니알람의 티베트인들 역시 선뜻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취재진이 티베트 독립 문제에 관심이 있다고 접근하면 그제서야 긴장을 풀고 자리에 앉았다. 니알람 토박이라는 한 티베트인 농부는 “우리는 중국 정부가 정한 판첸 라마 11세를 믿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중국인들의 정책은 따르지만 마음은 물과 기름처럼 분리돼 있다. 작년까지 달라이 라마 사진은 방에 걸어둘 수 있었지만 지금은 서랍 깊은 곳과 사람들 가슴 속으로 들어가 있다”라고 조심스레 말한다.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에 돌아오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의 친구인 다른 티베트인은 “티베트인은 달라이 라마가 지금 돌아오면 중국 정부 때문에 목숨이 위태롭게 될 것을 가장 걱정한다. 달라이 라마가 없으면 티베트의 희망도 없다. 그래서 티베트인 대부분은 그가 지금 오기를 원치 않고 ‘프리 티베트’가 된 뒤 귀국하기를 바란다”라고 대답했다.

 
이튿날 니알람을 출발한 취재진은 세계의 지붕을 16시간 동안 내리 달렸다. 해발 4천~5천2백m를 따라 끝없이 펼쳐진 고원 사막길이다. 도저히 인간이 살 수 없을 것만 같아 보이는 척박한 땅에 드문드문 야크·양 방목지가 있고, 유목민 텐트가 있다. 오른편 끝으로는 눈덮인 히말라야 영봉들이 병풍처럼 서 있지만 가도가도 닿지 않는 신기루처럼 보인다. 가끔 설산의 눈이 녹아 실줄기처럼 흐르는 물가에 10여 가구 안팎의 티베트 전통 마을이 있다. 그들은 물길 바로 곁 황무지에 보리와 유채를 심고 물을 떠다 경작하고 있었다. 그나마 그 물줄기는 얼마쯤 가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다.

‘다행히’ 취재진을 태운 차는 고물이라서 작은 고장으로도 자주 멈췄다. 중국측 안내자와 기사가 말썽 부위를 찾아 땀을 흘리며 정신이 팔린 동안 취재진은 길 밖으로 나가 유목민과 농부 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에베레스트 정상이 바로 올려다보이는 팅그리 지역에서 만난 유목민들은 이방인이 안내자 없이 접근하자 역시 ‘달라이 라마 포토’를 애원했다. 아이들조차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며 ‘달라이 라마 최고’라고 표현한다. 중국 정부의 가차없는 단속을 감안할 때 그들의 염원과 종교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놀라울 정도의 맹목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망명 정부가 발행한 티베트 관련 책자에는 티베트는 면적 2백20만㎢ 해발 평균 고도는 4천m, 인구 1천4백만명(티베트인 6백만, 중국인 8백만)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공식 통계는 면적이 1백10만㎢에 인구는 2백38만명이다(그중 티베트인이 2백10만명).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50년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한 뒤 과거 티베트 땅의 동·남쪽 일부를 사천·운남·청해성에 편입시킨 결과이다. 자연히 인구도 그들 성에 사는 티베트인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어쨌든 현재 서장 자치구로 되어 있는 티베트는 대부분 해발 4천m 이상 황량한 고원 사막지대로 2천 년 전부터 티베트 민족만이 악조건 속에서도 그들의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

티베트 제2의 도시 시가체를 앞두고 룰루 지역에서 마지막 군 검문소가 나타났다. 군인들이 모든 통과자들의 짐을 풀어 철저히 검색했다. 취재진 차례가 되자 중국 군인 2명이 배낭을 모두 열고 샅샅이 뒤졌다. 입국 후 가장 까다로운 검문이었다. 이때 이불을 자전거에 실은 티베트인 노인이 다가왔다. 순간 짐을 검사하던 군인은 2단 옆차기로 그 티베트 노인의 얼굴을 차버렸다. 노인은 자전거와 함께 길 옆 둑으로 굴러떨어졌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외국인들이 보는 앞에서 티베트인이 당한 이 폭력은 이곳에서 한족과 티베트인의 관계를 함축해주는 것이라 할 만했다.

 
승려 10명 중 1명은 공안 경찰


인구 만명인 시가체는 판첸 라마의 도시로 불린다. 티베트 불교 제도에서 달라이 라마와 쌍벽을 이루는 역대 판첸 라마가 이곳의 타시룸포 사원을 거처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동틀 무렵인 아침 9시께부터 수많은 티베트인들이 타시룸포 사원 앞에서 오투체(배를 땅에 대고 기어서 순례하는 모습)를 하고 있었다. 타시룸포 사원은 지난해 이래로 티베트 문제의 핵이 되었다. 중국 정부와 달라이 라마 사이에 이 사원의 주인인 판첸 라마 10세의 환생자 찾기를 둘러싸고 대립이 빚어졌기 때문이다.1418년에 달라이 라마 1세가 지었다는 타시룸포 사원은 5백여 년 된 불상·만다라·탕카 등 불교 문화가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한 바퀴 도는 데만 3시간이 걸렸다.

이 사원에 소속된 승려 6백50명이 매일 모이는 방 앞에는 95년 12월8일자로 강택민 주석이 직접 쓴 ‘護國利民’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겉으로는 지극히 평온해 보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긴장된 분위기가 드러났다. 네팔인 안내자와 취재진이 달라이 라마 사진이 없다는 얘기를 나누고 있던 중 한 승려가 다가와 나지막히 “쉿, 조심하시오. 이곳 승려들 중 10명에 1명은 위장 승려(승복 입은 공안경찰)요”라고 주의를 준 것이다. 그에 따르면 지난 5월 이곳에서 승려와 비구니 들이 일제히 체포되어 감옥으로 갔으며, 3개월 전에는 위장 승려에 의해 외국인 관광객이 체포되어 1주일간 조사를 받고, 강제로 역사 교육까지 받은 뒤 벌금 2천달러를 물고 추방 당했다는 것이다. 당시 외국인 관광객은 소지하고 있던 달라이 라마 법어 녹음 테이프를 한 승려에게 전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승려가 공안 경찰이었다고 한다. 공안 승려는 쉽게 구별해낼 수 있었다. 관광하는 사람들 주위를 계속 따라다니는 그들의 소매 속에서 워키토키 안테나가 밖으로 삐져나왔기 때문이다.

 
시가체에서 기앙체에 이르는 90㎞는 티베트의 곡창지대라 할 만했다. 큰 강이 흐르고 강 양안으로는 상당히 너른 들이 펼쳐져 있다. 이곳을 달릴 때 만난 티베트인 농부들은 앞서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달라이 라마 포토’와 ‘달라?라마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중간에 들른 몇몇 사원들에는 법당 안에 중국 정부가 인정한 판첸 라마 11세의 사진을 놓아두었으나 부엌, 불상 틈새 등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곳에는 달라이 라마의 소형 사진을 꽂아둔 곳이 많았다.

중국 치하의 포탈라궁은 ‘문명의 무덤’

끝없는 황야를 나흘째 달리자 오랜 비포장길이 끝나고 2차선 포장도로가 나타났다. 티베트의 수도이자 달라이 라마의 도시인 라사가 가까워진 것이다. 라사 외곽은 시가체 강·라사 강·츄슈 강 등 3대 강이 합쳐져 부라만부타 강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 물은 황하의 원류이기도 하다.

라사 시내로 들어가자 군부대가 즐비하다. 인구 25만인 라사 시내는 거리마다 군인투성이였다. 한 라사 시민은 취재진에게 군인이 약 3만명 주둔하고 있다고 귀띔했지만 망명 정부측은 10만명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시위 진압을 위한 ‘계엄군’이다.

달라이 라마가 거처했고, 티베트 역사의 모든 기록이 들어 있는 포탈라궁은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불린다. 7세기 송찬감포왕이 짓기 시작한 포탈라궁에는 역대 달라이 라마의 무덤과 불교 경전, 수십만 개의 금불상, 만다라, 천년 전 비단 두루마리 왕보, 몽골·네팔 등 주변국 왕의 진상품, 보물, 갑옷, 무기 등이 가득차 있는 티베트의 박물관이자 도서관이다. 바로 이 건물 최상층이 과거 달라이 라마 집무실이었고 티베트 국회의사당과 관청도 들어서 있다. 그러나 중국 치하의 포탈라궁은 한마디로 ‘문명의 무덤’이었다. 방 20여 개를 공개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그물 모양의 쇠창살로 견고하게 막아놓고 관광객에게 돈을 받은 후 공개하고 있다. 사진을 촬영할 경우 1컷당 백~2백위안(한국돈 만~2만원)씩이라는 중국 정부의 공문을 벽에 걸어둔 채.

 
먼지가 앉은 달라이 라마 14세의 집무실에는 수많은 티베트인이 엎드려 알아듣기 힘든 주문을 외고 있었다. 한 승려에 따르면, 지난 1월24일 티베트 자치구 종교·문화부가 포탈라궁 관리소에 모든 달라이 라마 사진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자 한시간 내에 사진들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뒤 이 명령은 라사와 근교에 있는 세라·간덴·드레퐁 등 대표적 사원들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간덴 사원 승려들이 이를 거부하자 중국 당국은 지난 5월 강제 철거에 나섰고, 이에 반항하는 승려 2명이 살해되고 70여 명은 감옥에 갇혔다는 것이다.

96년 7월의 라사는 침묵의 도시였다. 활기가 있다면 중국 정부의 라사 강변 개발로 대표되는 건설 현장들이 이곳저곳 눈에 띈 점이었다. 그러나 건설 현장에 들어가 보면 주로 중국인 노무자들이다. 백개쯤 되는 라사 시내 상점들에 일부러 들어가 일일이 확인하니 90% 이상이 중국인들이다. 티베트인들의 가게가 있다면 그것은 노점이었다.

약 1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티베트 약 천㎞를 횡단하면서 관찰한 이방인의 소감은 한마디로 ‘티베트민은 한족에게 지배 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라사의 한 교육기관에 파견되어 근무하고 있다는 한 미국인이 취재진에게 들려준 말은 중국 정부가 귀담아 들을 만하다. “만약 점령 초기부터 중국 정부가 티베트인들에게 친형제처럼 느끼도록 대했다면 망명한 달라이 라마는 지금처럼 인기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인들에게 얻고 있는 인기의 상당 부분은 중국에 돌아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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