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등권' 시대 열린다
  • 李興煥 기자 ()
  • 승인 1995.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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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집권 종말, 지방자치 시작… 단체장과 의회 대립·지역 이기주의 등은 숙제
지방자치 선거가 끝났다. 34년 만에 처음 치른 선거였다. 지방 선거라는 ‘멍석’이 깔리자 중앙 정치인들이 전국을 휘젓고 다녔다. 잔치 분위기여야 마땅했을 지방 선거는 정파 싸움으로 얼룩졌다. 그래도 지방자치 시대의 막은 열렸다. 정치는 물론 입법 행정 등 국가 운영의 기본 틀이 바뀔 판이다. 선거 뒤끝이라 아직 실감하지 못할 뿐이다. 가장 큰 변화가 예상되는 분야는 정치이다.

특히 정치 인력 공급선이 다변화한 것이야말로 기존 정치인들을 긴장시킨다. 지방의 ‘작은 영웅들’이 출현해 지역에서 나름의 정치 기반을 갖게 된 것이다. 중앙당의 권한도 예전 같지 않다. 지방 선거 후보 공천 과정에서 이미 중앙당이나 당 실력자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반쪽짜리 지자제가 실시되던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

야당에서 대표나 총재만이 대권을 꿈꾸던 시대도 이젠 끝났다. 야당 출신 시장이나 도지사가 지역의 정치 기반을 바탕으로 하여 중앙당에 발언권을 갖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행정 경험을 내세워 총재나 대표를 제치고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말라는 법도 없다.

지금까지 지방에는 정치가 없었다. 91년에 지방 의회가 구성되기는 했지만 행정이 정치 위에 군림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역전됐다. 중앙에서 활동하던 인사가 지방에 ‘부임’하던 일방적인 인사 충원 방식도 바뀌게 되었다. 지방에서 자란 인물이 중앙으로 진출할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93년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는 지방 정치인 출신이 의석을 30%나 차지했다.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일부 정치학자들은 한국에서도 지방 정치인들이 일본 못지 않게 국회 의석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한다. 일본의 기초 자치단체는 3천2백여 개인 데 견주어 우리는 2백30개로 일본에 비해 자치단체의 규모가 크다. 그만큼 자치단체 출신 정치인의 정치 기반이 넓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국회의원의 지역 대표성도 이제는 재평가되리라는 지적이 나온다. 시·군 통폐합 등 일부 행정구역 개편이 있기 전 金秉準 교수(국민대·행정학)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자치단체 구역과 국회의원 선거구가 같거나 선거구보다 자치단체 구역이 더 큰 지역은 모두 1백26개로 나타났다. 세분하면, 자치구 1개에 국회의원 선거구 3개가 있는 곳이 6개, 자치구 1개에 선거구가 2개 있는 곳은 35개, 자치구와 선거구가 일치하는 1자치구 1선거구 지역은 85개이다. 1개 자치구당 국회의원이 0.9명 나오는 셈이다.
지방의 ‘반란극’ 벌어질 수도

행정구역 개편이 더 진척되어 자치구 수가 줄어들 경우 1개 자치구당 국회의원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한마디로 시장이나 도지사가 국회의원 2~3명을 ‘거느리게’ 됨으로써 지역 대표성에서 국회의원보다 우위에 서는 셈이다. 물론 국회의원 선거구 조정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기는 하지만, 현행 선거법의 기본 골격이 크게 바뀌지 않는 한 이 현상은 피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

지방화 시대에 부과된 숙제는 만만치 않다. 우선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의 위상을 재조정하는 일이 급하다(14쪽 기사 참조). 중앙 정부의 위상은 아직도 건재하다. “지방자치는 부모 밑에서 같이 살던 자식들이 분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지난 6월21일 박관용 대통령 정치특보가 민자당 동래구 정당연설회에서 한 말)라고는 하지만, 속사정은 그렇지도 않다. 현행 지방자치제는 분가는커녕 중앙 정부의 지붕 밑에서 셋방살이하는 격이다.

중앙 정부가 불필요한 간섭이나 통제를 하려들 때 자치단체끼리 사안 별로 뭉쳐 중앙 정부에 맞서거나, 선진 외국의 경우처럼 연합회를 구성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다. 중앙 집권 시대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지방의 ‘반란극’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정작 문제는 집행 기관과 의회의 마찰, 지역 이기주의로 인한 지역간 갈등이다. 91년 지방 의회가 구성된 이후 이런 문제들은 끊임없이 드러났다. 의회가 집행 기관을 견제하면서 빚어진 갈등의 대표적인 것으로 서울·부산·광주시 의회가 의결한 사례를 들 수 있다.

92년 4월 서울시의회는 쓰레기 관련 예산 집행을 정지하라는 의결안을 발의했다. 서울시가 예산 집행을 하지 못해 업무가 지연되었음은 물론이다. 같은 시기에 부산시의회는 부산시가 제출한 92년 제1차 추경예산안의 심의를 보류하겠다고 의결했다. 예산안이 통과되지 않자 집행 기관인 부산시 역시 골탕을 먹었다. 광주시 서구의회의 사례는 의회와 집행 기관의 갈등이 일종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진행된다는 점을 입증했다. 91년 5월 광주시 서구의회는 본회의장 연단 에 있는 구청장 책상이 위화감을 준다는 이유로 연단 철거를 결의했다. 결국 구청장 연단은 철거되고 말았다.

집행 기관도 보고만 있지 않는다. ‘재의 요구’라는 무기로 의회에 맞선다. 92년 6월 전라북도의회는 의원 일비 및 여비 지급에 관한 조례 제정안을 의결했으나 도지사가 받아들이기 힘들다면서 재심의해 달라고 요구함으로써 의회와 도지사가 서로 얼굴을 붉혔다. 92년 4월 서울시의회가 유급 보좌관 설치 조례 개정안을 의결했으나, 서울시장이 재의를 요구했던 것도 마찬가지 사례이다. 92년 6월 광주시는 5월18일을 광주 시민의 날로 지정하자는 광주시의회의 요구를 반대했고, 91년 11월 시의회가 예산을 삭감하자 서울시는 의회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갖기도 했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 금창호 연구원은 “의회와 집행 기관이 서로 위상을 높이려는 할거주의 양상이 벌어지곤 한다. 일부 지방 의회의 경우 의회의 권한을 확대 해석해 의회 의결이 위법 부당한 것으로 드러난 경우도 있다”고 지적한다. 순천시의회가 의결한 시장 불신임안 및 시장 사퇴를 위한 시민 서명운동 전개안(92년 10월), 여천시의회의 시장 사퇴 권고 결의안 의결(91년 12월)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91년 12월에 시작된 충북 제천시와 강원도 영월군 사이의 평창강 물싸움은 3년6개월이 지난 지금도 뒤끝이 개운치 못하다. 지역간 갈등의 한 예이다. 평창강은 제천시와 영월군 사이에 자연 경계를 이루는 강이다. 장곡 취수장 물을 끌어다 쓰던 제천시는 취수장의 용수가 부족하게 되자 취수장을 확장해 평창강 물을 제천시로 끌어갈 계획을 세웠다. 영월군이 반발하고 나섰으나 제천시는 건설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뒤 공사에 착공했다. 92년 봄이었다.
지금도 제천시의 취수장 확장 공사는 진행되고 있다. 올해 말이면 마무리된다. 영월군청 건설과 지역계획계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라고만 말할 뿐 뾰족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항의해도 공사를 밀어붙이고 있다. 건설교통부의 유권 해석도 모호해 결국 제천시의 의견만 반영된 꼴이다. 우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지금 강물을 막아 다른 데로 돌릴 수도 없는 것 아니냐.”

물론 지역 간에 이해가 엇갈렸을 때 해당 자치단체끼리 머리를 맞대고 협의를 통해 원만하게 처리한 사례도 있다. 팔당호 용수 관리를 둘러싼 서울·인천시·경기도와 경기도내 7개 군 사이의 다자간 비용 분담 협약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13쪽 기사 참조).

서울에는 외국 지방 정부 사무소가 개설되어 있다. 미국만 하더라도 미주리·플로리다 주 정부가 사무소 문을 열어놓고 주로 통상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한국 기업을 유치하거나 주정부와 한국간 직교역의 가교 노릇을 하는 것이다. 플로리다 주사무소는 한국과 거래하기를 원하는 플로리다 주의 기업체 명단을 만들어 한국의 관련 기업에 배포하고 있다. 일본의 지방자치단체 중에서는 니이가타·미야기·오키나와·나가사키 4개 현의 사무소가 서울에 진출해 있다. 미국 주정부와 달리 주로 관광 홍보 업무에 치중하는 편이다.

(주)경남산업은 지방 통상 행정의 ‘모범’

일본 자치단체국제화협회(CLAIR)도 서울 광화문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있다. 93년 10월에 문을 연 이 협회는 일본 지방 공공 단체의 국제화 추진 사업을 지원하고 외국 지방자치단체와의 교류 사업을 추진한다. 서울 외에도 뉴욕·런던·파리·싱가포르·시드니에도 해외 사무소가 있다.

일본의 자치단체국제화협회와 유사한 단체로 한국에는 94년에 구성된 ‘지방자치단체국제화재단’이 있다. 올 9월 도쿄 사무소를 개설하고 뉴욕·파리 사무소 개설도 추진하는 등 의욕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재단의 존재를 자치단체에 알리는 홍보 업무에 치중하는 단계이다.

지방화 시대는 경쟁 시대이다. 생존 전략이 없는 자치단체는 ‘늘 그 타령’만 할 수밖에 없다. 경상남도는 지난해 6월 민·관 합동의 제3섹터 형식으로 (주)경남무역을 설립했다.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로서는 처음 설립한 상법상의 주식회사로, 재정 확충을 위한 통상 행정의 모범 사례로 꼽히고 있다.

지방화의 성패 여부는 불투명하다. 중앙 정부는 기득권을 쉽게 포기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행정구역 개편이라는 난제도 남아 있다. 지역간 격차가 더 심해지리라는 진단도 나온다. 자치단체에 양질의 정치 인력을 공급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숙제이다. 시민단체 등이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반대 의사를 표명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통합선거법은 저질 인력을 양산하는 온상이 될 수도 있다.

지방에 드리운 통제와 간섭의 그늘을 중앙 정부나 중앙 정치인들이 스스로 걷어내지 않는 한 지방화 시대의 꽃은 피어나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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