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막힌 ‘축구 정치’, FIFA 회장 선거
  • 파리·李哲鉉 기자 ()
  • 승인 1998.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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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회장 선거 뒷얘기/아벨란제 후계자 블래터, 아프리카 표 업고 극적 역전승
98프랑스 월드컵 개막전이 열리는 생드니 스타드 드 프랑스 구장에서 개막 축포가 터지기 이틀 전인 6월8일 국제축구연맹(FIFA) 회원국들은 월드컵 결승전 못지않게 중요한 대결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2000년대 초 세계 축구계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이 대결에, 현란한 개인기로 상대팀 수비수의 정신을 빼놓는 호나우도의 드리블이나 베르캄프의 절묘한 오버헤드 킥은 없었다. 다만 차기 국제축구연맹 회장을 꿈꾸는 두 노인이 선거권을 가진 회원들과 물밑 협상을 벌이며 ‘표를 주면 특혜를 약속하는’ 2 대 1 패스에 여념이 없었다. 뒤에서 태클하는 선수는 경고 없이 퇴장시키는 규칙을 제정한 국제축구연맹이지만, 이 선거의 승패를 좌우한 뒷거래를 제지할 어떤 규칙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요한슨 지지한 정몽준 회장 낙담

파리 남부 아쿠아블로버드 위퀴녹스 건물에서 벌어진 이 정치성 짙은 대결의 승리자는 스위스의 제프 블래터 씨였다. 그는 1차 투표에서 31표 차이로 경쟁자 레나르트 요한슨 유럽축구연맹(UEFA) 회장을 물리치고 주앙 아벨란제에 이어 국제축구연맹 6대 회장에 올랐다. 감격을 주체하지 못한 승리자는 엄지를 세우며 지지자의 환호에 답했고, 패배자는 안경을 벗고 눈을 감은 채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메인 이벤트를 마친 제51회 국제축구연맹 회의는 신규 가입국 소개를 끝낸 후 산회했다. 회원들이 하나 둘씩 위키녹스 회의장을 빠져 나가자 또 다른 승자와 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거 초반부터 제프 블래터 씨의 오른팔이었던 미셸 플라티니 프랑스월드컵 조직위원장은 회의장 밖 라운지에서 몰려든 취재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블래터 신임 회장이 가진 축구 발전 프로그램을 지지했다. 우리(플라티니와 블래터)는 이제부터 할 일이 많다.” 프랑스 언론들은 플라티니가 국제축구연맹 부회장이나 사무총장에 오르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보도하고 있다.

플라티니가 승리의 기쁨을 마음껏 즐기는 동안 선거 초반부터 요한슨 지지를 선언한 정몽준 국제축구연맹 부회장은 한국축구협회 관계자에게도 알리지 않고 회의장을 빠져 나갔다. 국제축구연맹의 출입 거부로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위퀴녹스 건물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국내 방송 기자들과 마주친 정부회장은 질의 응답을 간단히 마친 후 서둘러 그 장소를 떠났다.

제프 블래터 씨가 차기 회장에 선출되면서 주앙 아벨란제 회장 때 국제축구연맹이 안고 있던 의혹들을 벗겨낼 기회는 당분간 사라졌다. 20년 전 거의 파산 상태였던 국제축구연맹은 월드컵 텔레비전 중계권과 월드컵 마케팅 권리를 팔아, 1년에 대략 10억달러씩 연맹 금고에 쌓고 있다. 아벨란제 회장은 제트 비행기를 타고 전세계를 돌아다니고, 축구 용품은 1년에 2천5백억달러어치씩 팔려 나간다. 하지만 국제축구연맹이 해마다 발표해 온 회계 자료가 엉성하기 짝이 없어 국제축구연맹의 투명성을 의심하는 축구 관계자들이 늘어났다.

74년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반발 표를 끌어들여 회장에 취임한 브라질 수영 선수 출신 아벨란제 회장은 전제 권력을 휘두르며 내부 반발을 잠재웠다. 94년 미국 월드컵이 끝난 직후 열렸던 국제축구연맹 집행위원회는 아벨란제의 독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회의였다. 이 회의는 선거를 통해 새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아벨란제는 선거를 실시하지 않고 자기가 고른 인물로 짠 위원회 명단을 제출했다.

이 사건은 아벨란제 반대파를 뭉치게 한 계기가 되었다. 브라질 출신 독재자에게 반대하는 이들은 유럽축구연맹 회장인 요한슨 진영에 몰려들었다. 세계 축구계의 살아 있는 전설인 펠레도 공개적으로 아벨란제에 반기를 들었다. 스웨덴 출신 요한슨 회장은 국제축구연맹의 투명성을 높이고 개방적으로 운영하겠다고 표방했다. 또 자신이 6대 국제축구연맹 회장에 취임한다면 지난 20년 동안 아벨란제가 벌인 각종 이권 사업을철저히 조사하겠다고 공언했다.
블래터, 투명성 확보 등 숙제 산적

그동안 월드컵 중계권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아벨란제는 많은 의혹을 낳았다. 86년 멕시코 월드컵 중계권을 국제축구연맹 수석 부회장 길레르모 카네도 씨가 운영하는 멕시코 텔레비전사에 넘기는가 하면, 올해 프랑스 월드컵 중계권자를 10년 전인 88년에 서둘러 선정하기도 했다. 올림픽을 주관하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중계료 수입의 절반을 주최 도시에 나누어 주는 데 반해, 국제축구연맹은 중계료 전부를 가진다.

또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직접 후원 업체를 선정하면서 일정 몫을 각 대회 조직위원회에 넘겨 준다. 하지만 국제축구연맹은 협상권을 특정 업체에 일임하는가 하면, 코카콜라·맥도널드 같은 전세계 후원업체로부터 들어오는 돈을 모두 챙긴다.

그러다 보니 국제축구연맹과 대회 조직위원회 간에 다툼이 생기게 되었다. 98 프랑스월드컵 조직위원회는 국제축구연맹이 선정한 후원업체와 별도로 프랑스월드컵 후원 업체를 선정했다. 국제축구연맹은 코카콜라·아디다스·오펠·마스터카드·맥도널드 등 후원 업체 13개로부터 3천만달러를 거두었고, 프랑스 월드컵 조직위원회는 다농·프랑스텔레콤·휴렛팩커드를 비롯해 여덟 업체로부터 1억달러를 벌어들였다.

잡음이 잇달아 발생하면서 아벨란제 반대파가 더욱 강하게 결속하자, 아벨란제 회장은 스포츠 관료 출신인 제프 블래터를 지지하고 나섰다. 유명 시계 업체인 스위스의 론진-위트나우어와치 사에서 홍보 이사를 지낸 블래터는, 75년 국제축구연맹에 들어간 이후 81년에 아벨란제 휘하에서 사무총장을 맡았다. 아벨란제의 지원을 받은 블래터는 투표가 있기 3개월 전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3년 전부터 준비한 요한슨에게 선거전 초기에는 다소 밀리는 듯했으나, 요한슨 진영에 있던 아프라카 대표들에게 2006년 월드컵 개최권을 주겠다고 약속해 표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면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다.

블래터 신임 회장에게는 산더미처럼 쌓인 숙제가 기다리고 있다. 국제축구연맹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요한슨 진영과 당선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아벨란제 회장 진영을 아우르며 세계 1백98개국이 회원인 국제축구연맹을 이끌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거 기간에 아프리카에 주기로 약속했던 월드컵 개최권을 빼앗으려고 벼르는 유럽·남미 국가들을 어떻게 다독일지도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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