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대선 최대 변수, 박근혜의 행보
  • 김종민 기자 (jm@e-sisa.co.kr)
  • 승인 2000.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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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인기 막강, 차기 대선 최대 변수 ··· 남북 문제 '제목소리' 뚜렷해 당내 갈등
“우리가 박대통령 봐서 지금까지 밀어 준 거 아이가. 지가 우리를 이런 식으로 대하면 우리도 가만 있지 않을 끼다.”

지난 8월16일 오전, 박정희기념관을 구미에 유치해야 한다는 의견을 박정희기념사업회(기념사업회)에 전달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온 구미 주민들은 박근혜 한나라당 부총재에게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박부총재가 서울 상암동에 기념관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못내 섭섭했던 것이다.

박정희기념관 건립 문제는 요즘 박부총재의 정치적 좌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선 DJ는 권노갑 민주당 고문을 기념사업회 부회장으로 파견하면서까지 적극 지원하고 있다. 박부총재에 대한 여권의 각별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반면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대구·경북 출신 의원들과 박부총재가 구미와 서울로 의견이 갈려 있지만, 이회창 총재는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이총재와 가까운 한 의원은 “여권의 정략적 의도를 보나 대구·경북 지역의 여론을 보나 구미에 건립하는 것이 원칙이다”라고 말하면서도 당사자들이 알아서 결정하는 것이 좋다고 발을 뺀다. 박부총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전직 대통령의 딸이기는 하지만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지 만 3년도 안된 이 ‘미혼 여성’은 이처럼 여야 모두 무시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 있다. ‘박정희의 딸’로서 누리는 후광 때문일까, 아니면 ‘정치인 박근혜’의 잠재력이 대단한 것일까. 그녀는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독립 변수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큼 자생력을 갖추고 있는가.
우선 정치인 박근혜를 얘기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이 대중적 인기다. 그는 총선 직후 각종 단체 49개로부터 강연 및 행사 참석 요청을 받았다. 지금도 매주 서너 건씩은 요청이 끊이지 않는다. 또 한나라당 집회 때마다 이회창 총재를 포함해 어떤 연사보다 박수를 많이 받는 사람이 박부총재다. 지난 5월 말 한 여론조사 기관이 대구·경북 지역의 주민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누가 대구·경북 지역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에서 박부총재가 32% 지지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그 뒤를 이은 강재섭 의원이 18%에 머무른 것에 견주면 대단한 지지이다.

그녀의 인기는 지역에 따른 차이가 별로 없다. 지난 1월 한나라당이 경기도 수원에서 언론 문건을 규탄하는 장외 집회를 열었을 때 당에서는 내심 영남 지역이 아니어서 집회 분위기가 처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집회는 성공이었다. 집회 분위기를 띄우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은 역시 박부총재였다. 그녀가 연단으로 올라가려 하자 아줌마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집회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지난 5월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전국 대의원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박부총재는 30% 지지율로 1위를 차지했는데, 후보 14명 중 유일하게 전국적으로 고른 지지를 받았다. 여성 대의원들 사이에서는 57.8%로 압도적 우세를 보였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에서는 그녀의 상품성을 인정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지난 총선 때 그녀를 공천심사위원장·선거대책위원장 후보로 고려했다. 비록 비주류이기는 했지만 선거를 앞두고 그녀의 대중적 인기가 아쉬웠던 것이다. 민주당은 그녀의 대구·경북 지역 기반을 주목하고 있다. 차기 대선에서 영남표를 분산시켜야 승리할 수 있다고 믿는 여권은 영남표를 움직일 수 있는 인물로 YS와 박부총재 두 사람을 꼽고 있다.

이러한 박부총재의 인기와 상품성은 어디서 말미암은 것일까. 역시 그 바탕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과 육영수 여사에 대한 향수가 짙게 깔려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사그라들지 않는 그녀가 인기를 모으는 요인을 후광만으로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한나라당에서 오랫동안 당직을 맡았던 한 인사는 “현역 정치인 가운데 직접 대통령 수업을 받은 유일한 정치인 아니냐”라면서, 박부총재가 큰 정치를 주장하면서 야당의 반대 일변도 노선을 비판하는 등 소신 있고 무게 있게 행동한 것이 대중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20대 때 겪은 5년 간의 퍼스트레이디 경험은 그녀만의 특별한 정치적 자산이다. 또 부모를 모두 흉탄에 잃었고, 1980년 이후에는 ‘박정희 격하’ 움직임 속에서 10년 가까이 자기 자신과 또 비정한 세태와 싸움을 벌였다. 이때 쌓은 내공도 그녀를 대통령의 딸에서 강단 있는 정치인으로 바꾼 요인으로 지적된다. 박부총재 본인도 “처음에는 어머니를 닮았다고 하던 분들도 가까이서 보고는 아버지를 더 닮았다고 얘기한다”라며 자신의 강기를 은근히 과시했다.
“보완재 구실 인정하나, 정치력은 의문”

그러나 박부총재의 대중적 인기를 정치적 실력으로 인정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론도 적지 않게 제기된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박부총재와 가깝게 지내기는 하지만 정치적 진로를 놓고 얘기하는 것은 왠지 어색하다”라고 털어놓았다. 지난 16대 총선 직후 대구·경북 지역 당선자들을 대상으로 대구·경북의 차세대 주자로 누가 적당하냐고 물은 결과 강재섭 의원이 5명의 지지를 받았고 박근혜 의원은 2명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다. 지역 대중의 여론과 엇갈리는 결과다.

당내에서는 대중적 인기와 대중 동원력은 다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나라당에서 핵심 당직을 맡고 있는 한 의원은 “박부총재가 그동안 준비된 당 행사에서 인기 있는 연사로 인정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본인 이름으로 대중을 모아 본 경험은 없는 것 아니냐”라며 대중 동원력에 의문 부호를 찍었다. 한나라당의 한 소장파 의원 역시 “박부총재의 인기는 영화배우 출신인 강신성일 의원의 인기와 비슷해서, 당에 기여하는 보완재 구실은 톡톡히 하지만 독립적인 대체재로서 힘을 발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또한 박부총재의 대중적 인기는 인간적 호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신뢰는 크지 않다는 진단도 있다. 이총재측의 한 인사는 “박부총재가 특유의 강단은 있지만 대중에게 아직 독자적인 정치적 비전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라면서 인간적 호감만으로는 여론 주도 계층인 30∼50대 남성들의 지지를 받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녀에 대한 지지율이 주로 중·장년 여성과 20대에서 상대적으로 높게 나오는 것도 이러한 평가를 뒷받침하고 있다.

박부총재의 정치적 미래에 대해서도 이런 평가는 그대로 이어진다. 이회창 총재의 한 측근은 “박부총재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이총재의 대선 가도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부총재의 인기는 반DJ라는 틀 안에서 인정되는 것이지 이 틀을 깨거나 여기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면 그 순간 반DJ 유권자들로부터 외면당하리라는 것이다. 대구·경북 출신인 한 의원은 “지역에 가면 박부총재가 왜 그렇게 당을 비판하냐며 불만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다”라고 전했다. 이총재가 좋아서가 아니라 반DJ 연합 전선이 흐트러질까 봐 우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박부총재가 선택할 폭이 그리 넓지는 않은 셈이다.
그러나 정치가 ’생물’이라면 정치인 역시 생물이다. 박부총재는 아직 검증이 끝난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본인이 어떤 길을 가느냐가 중요하다. 박부총재는 최근 남북 문제에 특히 관심이 많다. 그녀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19쪽 기사 참조)에서 남북 분단으로 어머니를 잃은 자신이 이제 남북 화해를 위해 역할을 한다면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의욕을 보였다. 지난 남북 정상회담 때 당론에 막혀 방북이 무산된 것에 대해서 “당에서 불필요한 걱정을 해 좋은 기회를 무산시켰다”라며 아직도 아쉬워하고 있는 것도 그녀의 정서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권의 한 인사는 “지난 시대에 정적이었던 박정희와 김일성의 딸과 아들이 서로 만나는 것 자체가 상징적인 사건이다”라면서 그녀의 방북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녀는 상임위도 통일외교통상위원회를 선택했다. 남북 문제에 대한 이총재의 대응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앞으로 자기 소신을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겠다는 각오도 밝히고 있다.

또한 박부총재는 새로운 세대와의 교감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대하는 데도 관심이 크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한 그녀는 요즘 들어 부쩍 정보통신 분야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보좌관도 특별히 정보통신 전문가 한 사람을 더 채용했다. 최근 젊은 세대의 반미 정서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미국을 몰아내자는 반미가 아니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그동안의 부당한 관계가 더 고착화해 극단으로 가기 전에 문제를 풀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오는 2002년 대선 국면이 펼쳐지면 그녀는 자신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큰 선택을 할 가능성이 있다. 여권에서는 내색은 안하고 있지만 앞으로 대선 국면에서 박부총재의 효용성을 이리저리 따져보고 있다.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박부총재는 어떤 식으로든지 강력한 대선 변수가 될 것이다”라면서 정·부통령제 개헌이 되면 민주당의 누구와 연결해도 ‘좋은 그림’이 되리라고 전망했다. 한화갑 의원·고 건 시장 등 호남 주자와의 결합까지도 상정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YS는 이미 이러한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듯 박정희기념관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2002년 대선 전략의 일환이라고 공격한 바 있다.

이총재측도 박부총재의 미래에 대해 의구심 섞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지난 전당대회 때는 “박부총재는 차기 대선 때 탈당해 대선에 출마할 사람이다”라며 ‘박근혜=이인제’라는 마타도어가 적지 않게 돌았다. 이총재측은 박부총재의 ‘삐딱한 언행’ 때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박부총재는 이총재측의 견제 때문이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한나라당의 한 인사는 “당내에서는 이총재가 현재의 한나라당 체제를 끝까지 끌고 가지 못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라고 전하면서, 야권이 분열할 경우 자기 길을 갈 대표적인 인물로 박부총재를 거론했다.
“정치는 이념과 뜻이 맞는 사람끼리 해야”

박부총재 본인은 2002년 구상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 그녀는 총선 전에 홍사덕 신당·영남 신당·민국당 등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지만 야당 분열은 안 된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했다. 그러나 당시 한나라당을 떠날 생각이 없다고 밝히면서도 “정치는 이념과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같이 하는 것 아니냐”라며 여운을 남겼다.

이총재가 박부총재와 이념과 뜻에서 궁합이 맞을 것이냐가 문제다. 그동안 그녀는 이총재의 노선에 대해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우회적으로 ‘아니오’라고 말해 왔다. 대선 국면에 이르러서도 지금처럼 호흡이 맞지 않는다면 자신이 이총재와 경쟁하든지 새로운 길을 개척하든지 결단을 내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최근 “다음 선거에서는 DJ가 출마하지 않기 때문에 이른바 반DJ 정서에 의한 반사 이익은 줄어들 것이다”라면서, 유권자들이 인물 중심으로 적극적인 판단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총재가 반사 이익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지만, 문제는 ‘정치인 박근혜’의 실력은 어떤가 하는 점이다. 아버지의 후광과 인간적 호감으로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약하다. 정치인 박근혜의 독자적인 비전 없이 이총재에게 정면 도전하거나 야당을 떠나는 승부수를 던지기는 어렵다.

앞으로 남북 문제가 한국 정치의 판도와 정치인의 부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이 정치권의 대체적인 전망이다. 박부총재 역시 남북 문제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야권 분열로 비칠 가능성에 대해서는 매우 조심스러워하고 있다. 그녀는 과연 남북 문제에서 명분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독자적인 비전을 보여줄 수 있을까. 정치인 박근혜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느냐는 여기서 판가름 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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