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골·골…열광에 가린 ‘거대한 그늘’
  • 이문재 편집위원 · 주진우 기자 (moon@sisapress.com)
  • 승인 2002.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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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하루 12시간 이상 월드컵 공식구로 지정된 ‘피버노바’를 바느질했던 파키스탄의 어린아이들은 정작 월드컵이 열려도 텔레비전이 없어 경기를 보지 못한다. 개최 국가의 이미지를 높이는 거대한 홍보물이자 초국적 자본의 광고판으로 변질된 월드컵은 과연 누구를 위한 축제의 마당인가.





소니아는 울었다. 축구에 관한 한 세계 표준시가 서울의 저녁 시각에 맞추어지던 지난 5월31일 오전, 인도에서 온 맹인 소녀 소니아(15)는 서울 강서구 실로암 안과 병원에서 검진을 받고 있었다. 인도 북부 잘란다루에서 태어난 소니아는 1991년 다섯 살 때부터 2년 동안, 어두운 방안에서 고사리 손으로 축구공을 꿰맸다.


다섯 살 때 이미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소니아는 일곱 살 때 시력을 잃고 말았다. 두 눈이 유난히 크고 눈동자가 까만 소니아는 월드컵 개막일 오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월드컵에 참가한 축구 선수 아저씨들은 알아야 한다. 아저씨들이 차고 있는 공이, 피와 눈물로 얼룩진 아이들의 작은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시사저널 인터뷰 참조).



이번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처음 선보인 공식구 피버노바는 ‘열정(피버)의 별(노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축구를 사랑하는 관중의 열정과 축구의 별(스타)들이 만나 월드컵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일 테지만, 홍콩의 비정부기구인 아시아모니터자원센터(AMRC) 활동가에 따르면, 정작 피버노바 축구공을 만든 파키스탄 지역 열 살 안팎의 어린이들은 월드컵을 보지 못한다. 텔레비전이 없는 집이 많은 데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하루 12시간 이상, 양 무릎 사이에 축구공을 올려놓고 바느질을 해야 한다.



노동 착취 초국적 기업이 대회 후원



전세계 언론들은 ‘피버노바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며 월드컵 개막을 알렸다. 60억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위한 대제전이라는 월드컵은 6월 둘째 주로 접어들며 16강 티켓을 거머쥐기 위해 가속도를 내고 있다. 경기장 안에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격렬한 드라마가 펼쳐진다. 경기장 밖에서도 또 다른 월드컵이 한창이다. 이른바 경제 월드컵. 한국은 이번 월드컵으로 39억 달러 수입을 올리고, 일자리도 35만 개 늘어났다고 한다. 경기도 활성화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빛이 강할수록 그 광원(光源)은 바로 보기가 힘들다(오래 쳐다보면 눈이 먼다). 빛이 강할수록 그 빛이 드리우는 그늘도 깊다. 월드컵의 그늘 가운데 하나가 어린이 및 노동자를 착취하는 초국적 기업이다. 월드컵을 후원하는 초국적 기업들의 횡포는 지난 5월28일, 서울에서 열린 ‘노동자·아동 노동 착취 월드컵 후원 초국적 기업 반대 공동행동’(공동행동) 공개 토론회에서 드러났다. 홍콩·일본 ·한국의 비정부기구(NGO) 13개가 공동행동에 참여했다.



이번 공동행동을 기획한 홍콩의 아시아모니터자원센터 사무총장 아포 레온 씨에 따르면, 초국적 기업들의 생산 기지가 아시아 저개발국가로 이동하면서, 이 지역에서는 ‘아래로의 경주’가 벌어지고 있다. 초국적 기업들이 해당 국가 정부와 공급 업체(현지에 한국 기업도 많다)를 통해 노동자들을 억압해, 노동 조건이 매우 열악해졌다는 것이다. 아포 총장은 “슈퍼 정부라고 불러야 할 초국적 기업들의 반인간적 행태가 큰 문제다”라고 말했다. 초국적 기업들은 저마다 기업윤리 강령을 채택하고 있지만, 거의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월드컵이 문제인가?-초국적 기업 착취에 기댄 월드컵’을 주제로 한 공개 토론회에서 ‘세계 어린이 노동 반대 연합’(글로벌 마치)은 “정작 페어플레이를 강조해야 할 부문이 있다면 그것은 스포츠 산업일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글로벌 마치에 의하면, 특히 축구용품 산업에서 어린이 노동 착취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



국제축구연맹(FIFA)이나 국제축구연맹의 라이선스 용품을 생산하는 스포츠 용품 제조 기업들이, 어린이 노동을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1998년, 국제축구연맹과 스포츠용품 기업들은 제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어린이 노동을 사용하지 말고, 성인 노동자들에게는 적절한 노동 환경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글로벌 마치는 “1999년과 2000년, 파키스탄과 인도에서 아직도 많은 어린이들이 축구공을 생산하고 있다는 상세한 보고서가 발표되었다”고 말했다.



글로벌 마치의 보고서에 따르면, 파키스탄과 인도에서 최소 수만 , 많게는 수십만 어린이들이 축구공 생산에 고용되고 있다. 어린이들이 하루 종일 만드는 축구공은 3~4개. 숙련되면 10개까지 만든다. 이들이 받는 급여는 공 한 개당 100∼1백50원. 하루 12시간을 일해도 2천원이 넘지 않는다.





또 다른 그림자, 이주 노동자



공동행동은 국제축구연맹, 스포츠용품 생산 기업, 월드컵 후원 초국적 기업, 그리고 해외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우선, 국제축구연맹은 축구용품 생산에 어린이 노동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관련 기업에 강력히 요구하고 제제할 것. 둘째 나이키와 아이다스 등 스포츠 용품을 생산하는 초국적 기업은 물론 코카콜라·맥도널드 등 월드컵을 후원하는 초국적 기업들도 성인 노동자들의 조직과 결사의 자유를 인정할 것. 그리고 해외 주재 한국 기업은 군사 문화적인 노무 관리에서 벗어나 해당 국가의 노동법을 준수할 것.



이번 공동행동은 반세계화 시위의 연장선에 있다. 나이키·아디다스·코카콜라·맥도널드 등 브랜드 파워를 앞세우고 있는 초국적 기업의 ‘진실’을 파헤친 <노 로고>의 저자 나오미 클라인에 따르면, 전세계 소비자들이 ‘시민권’을 주장하는 정치적 단계로 진입해 있다. 1995년, 뉴욕 대학 아메리카 연구소 소장 앤드루 로스가에 의해 명명된 ‘노동착취 공장의 해’는 ‘브랜드 공격의 해’로 이어졌고, 반세계화 시위로 확산되고 있다.



<침묵의 쿠데타>를 쓴 토니 클락에 의하면, 세계 시민들은 단순한 불매 운동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시민들은 초국적 기업들이 글로벌 의제를 결정하는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했기 때문에 대항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난 6월2일에는 한국과 일본에서 또 다른 공동행동이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이날 오후,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에서는 국내외 인권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반전 평화 이주노동자 인권 보장 촉구 국제 공동행동의 날’을 선포하고 시위를 벌였다.



한국 정부는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 국가 총동원 체제에 돌입해 있다(88쪽 문화비평 참조). 정부는 승용차 2부제를 실시하고, 오염 물질 배출을 최대한 억제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집회와 시위를 자제하라고 당부했다. 일부 학교는 학교장 재량으로 휴교하게 했으며, 노점상을 철시하게 했고,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을 자진 등록하게 했다.



국제 공동행동의 날을 준비한 ‘외국인 노동자 대책협의회’ 이란주 정책국장은 “지난 3~5월 실시한 외국인 노동자 자진 등록이 새로운 불법 노동자를 막기 위한 방법이라고 하지만, 새로운 차별 정책이다”라고 말했다. 자진 등록 하러 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내년 3월까지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표를 지참하라고 한 조처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란주씨는 “정부는 실제로는 외국인 노동력을 활용하고 있으므로 외국인 노동자를 합법화하고 암암리에 펼쳐지고 있는 인종 차별 정책을 바로잡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작년 이맘 때는 가뭄에 웬 파업이냐고 파업을 사회악처럼 비판하더니 이번에는 월드컵을 빌미로 파업을 막으려 한다”라면서, 4년 전 프랑스 월드컵을 상기시켰다. 당시 프랑스 월드컵 공식후원사인 에어 프랑스의 조종사들과 프랑스 철도기관사 노조가 파업을 선언했지만, 월드컵 행사는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다산인권센터 홈페이지에서 한 노동자는 “누가 우리의 생존권을 대신할 수 있는가. 누구를 위한 월드컵이냐. 월드컵이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와 생존권을 제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밝혔다.



제3 세계 어린이와 국내 외국인 노동자, 노점상이 월드컵의 그늘이라면, 월드컵의 이면은 월드컵의 강력한 광원 그 자체, 즉 국제축구연맹(FIFA)의 상업성이다. 1974년 후안 아벨란제가 국제축구연맹 회장 자리에 앉을 때, 취임 일성이 ‘나는 축구라는 상품을 팔려고 왔다’였다. 이후 국제축구연맹은 초국적 기업·방송 매체·국가 권력과 더불어 ‘황금의 사각형 체제’를 구축해 왔다.






FIFA, 상업주의 ‘게임의 법칙’에 철저



국제축구연맹 재정 담당 우루스 린시 씨는 지난 5월28일 열린 임시 총회에서 ‘국제축구연맹 재산은 현재 6억1천만 달러’라고 보고했다. 1998년 아벨란제 전 회장이 퇴임할 때 밝혔던 1억 달러보다 6배 이상 늘어난 액수이다. 국제축구연맹의 재정은 중계권료, 입장권 판매 수입, 후원사의 후원금 순으로 충당된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 때 본선 진출국을 24개로 늘렸고, 이후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본선 진출국을 32개로 확대하면서 국제축구연맹은 입장권 수입과 함께 막대한 텔레비전 중계권료를 챙겼다. 국제축구연맹이 이번 대회에서 챙긴 중계권료는 약 2조1백80억원(여기에는 2006년 독일 월드컵 중계권료가 포함되어 있다). 프랑스 월드컵 중계권료보다 5.7배나 증가한 거액이다. 한국의 방송 3사는 2006년 독일 대회 중계권료를 포함해 6백여억원을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15억원을 지불한 프랑스 월드컵과 비교하면 40배가 올랐다.



아디다스·코카콜라·마스터카드·필립스 등 공식 후원업체 16개 사가 국제축구연맹에 내놓은 후원금은 3억5천4백만 달러(약 4천6백억원). 국제축구연맹 예산의 20%를 차지하는 엄청난 돈줄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공식 스폰서로 참여한 기업들은 적게는 2천만 달러(약 2백60억원), 많게는 5천만 달러를 지원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는 12개 공식 후원업체가 1억1천만 달러를 내놓았다.



월드컵이 상업주의로 치닫는 동안, 월드컵 경기장 안에서는 승리 제일주의가 판을 쳤다. 참가한 이상, 이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올림픽처럼 ‘참가에 의의가 있다’는 의례적 수사조차 없다. 연예산업을 능가하고 있는 스포츠산업에서 프로 선수는 스타 시스템의 산물이다. 프로 스포츠 스타는 더 이상 스포츠를 즐기지 않는다. 유명 선수에게 경기력은 곧 몸값(이적료와 광고료)이다. 그들에게 경기는 비즈니스이다.



1974년 이후 24년간 지속된 아벨란제 체제는, ‘지고의 경기를 위하여’라는, 국제축구연맹 전 회장 줄 리메의 정신을 표백시키는 기간이었다. 아벨란제와 더불어 축구는 세계화로 치달았다. 임현진 교수(서울대·사회학과)와 윤상철 교수(한신대·사회과학부)의 공동 연구 ‘월드컵의 국제정치경제’(<월드컵, 신화와 현실> 한울 펴냄)에 따르면, 월드컵은 자본의 전지구화(세계화)와 보조를 같이 하고 있는 ‘메가 이벤트’이다.



월드컵이 자본과 더불어 세계화를 성취하는 동안, 실제 경기에서 민족·인종·국가·종교 간 갈등은 감소하지 않았다. 월드컵 경기에 대한 열광은 ‘상상의 공동체’를 재현했다. 국가 대표 선수들은 대리 전사였고, 관중은 선수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상대방 국가에 대한 우월감을 만끽했다. 국민들이 월드컵을 지켜 보며 열광하는 동안, 정치인들은 애국주의와 국가주의의 증폭을 만족스러워했다.



정치의 도구로 전락하기도



무솔리니나 히틀러까지 가지 않더라도 월드컵은 벌써부터 정치의 수단이 되어 왔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은 시민 학살을 무마하는 데 이용되었고,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은 양민 학살을 호도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박스컵’이라는 국제 축구대회를 통해 ‘국민 국가’를 완성하고자 했다. 자발적 복종과 집단에 대한 순응을 가르치는 스포츠를 통해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던 것이다. 황병주씨(한양대 강사)는 <당대비평> 여름호에서 박스컵과 이번 월드컵을 나란히 놓고 ‘월드컵은 국민 국가의 내적 통합과 외적 경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탁월한 무기’라고 지적했다.



월드컵은 개최 국가의 국가 이미지를 제고하는 거대한 홍보물인 동시에 초국적 혹은 거대 기업의 광고판이다. 이번 대회만 해도 연인원 3백50만명이 경기장을 찾고, 연인원 6백억명이 텔레비전으로 경기를 시청할 것으로 보인다. 월드컵 개최국이 되기 위한 국가간 경쟁이 뜨겁고, 공식 후원업체가 되기 위한 거대 기업간의 경쟁이 치열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하여 국제축구연맹은 초국적 기업과 정부를 지휘하는, 세계무역기구(WTO)나 국제통화기금(IMF)과 같은 슈퍼 정부의 반열에 올라 있다(29쪽 딸린 기사 참조).





월드컵을 세계 초일류 브랜드로 만들어낸 숨은 실력자 가운데 하나는 방송 매체였다. 스포츠 스타·구단·대중 매체·광고주로 이루어지는 스포츠 시스템은 방송 매체에 종속되어 있다. 원용진 교수(서강대·신문방송학)는 <문학과사회> 여름호에서 월드컵과 같은 현대 스포츠를 ‘대중 매체의 스포츠’라고 규정했다.



월드컵은 텔레비전의 월드컵이다. 축구는 텔레비전 중계 방송의 연출력에 의해 하나의 쇼(스펙터클)로 변모했다. 축구는 클로즈업과 슬로 모션, 분석적인 해설과 다양한 정보로 엮이는 방송 소프트웨어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다. 국가간 대항이 아닌 월드컵을 상상할 수 없듯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되지 않는 월드컵 또한 상상할 수 없다. 60억 인류는 축구를 보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의 축구’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방송 매체를 지휘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자본이다. 원용진 교수는 ‘광고(자본)를 위해 스포츠가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이같은 관점에서는 월드컵의 주인공인 축구 선수들도 피해자이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결승전 때, ‘강제로’ 출전해야 했던 브라질의 호나우두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시 브라질 팀은 나이키의 후원을 받고 있었는데, 계약 조건에 호나우두의 선발 출전이 명시되어 있었다. 결승전 직전, 호나우두는 발작을 일으켜 경기가 어려웠지만, 나이키와의 약속 때문에 할 수 없이 경기장에 들어섰다. 호나우두는 결승전에서 거의 서 있다시피 했다. 영국의 축구 선수 폴 개스코인은 “우리 선수들은 사육되는 닭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텔레비전 축구’ 조종하는 자본의 힘



전쟁을 제외하면, 현대 사회에서 애국주의·정체성·우월성 등을 내장하고 있는 국가주의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는 스포츠가 유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포츠에서 일어나는 국가주의의 마찰은, 이른바 좋은 의미의 세계화와 무관하다. 아니, 상생의 시대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인지도 모른다.
세네갈에서 개막전 경기를 시청한 세네갈 국민들이 느낀 ‘승리감’은 어디에서 비롯했을가. 그들이 무릎 꿇린 프랑스는 1960년 이전까지 그들을 지배한 제국주의였다. 세네갈 국민들에게 개막전은 결코 단순한 스포츠 게임이 아니었다(일본과의 경기는 빼놓지 않고 응원하는 한국인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오는 6월10일, 대구에서 열리는 한국 대 미국과의 경기를 예상해 보자. 지난 솔트레이크 겨울 올림픽 쇼트트랙에서 김동성 선수가 당한 억울한 판정을 기억하고 있는 한국 관중에게 그 경기는 ‘보복전’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황병주씨는 ‘민족주의는 무의식 수준에서 작동할 때 진정한 힘을 얻는지도 모른다’라고 썼다. 황씨의 논문에 따르면, 월드컵과 같은 국가간 축구 경기는 무의식과 민족주의가 현재화할 수 있는 유력한 통로이다. 축구는 평화 시기의 전쟁 스펙터클이라는 것이다.



월드컵의 그늘과 이면을 조명한다고 해서 월드컵 열기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월드컵의 역기능을 비판한다고 해서 월드컵이 가져올 경제적 효과가 줄어들 리도 만무하다. 그러나 월드컵은 스포츠와 인간, 현대 사회와 스포츠, 스포츠와 국가(민족)주의, 슈퍼 정부(국제 체제)의 역할, 그리고 세계 시민운동의 미래를 살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아닐 수 없다. 임현진·윤상철 교수는 21세기 문화의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저항’을 제안한다.



임·윤 교수가 보기에 국가주의와 상업주의가 결탁해 가속화하는 스포츠의 세계화는 한국과 일본의 시민 사회가 직면한 위기이자 기회이다. 양국의 시민 사회는 월드컵을 상업적 타락으로부터 건져내 ‘밑으로부터의 대중 축제’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월드컵과 관련해 서울에서 열린 국제 NGO들의 두 차례 공동행동(앞에서 언급한 어린이 노동 착취 반대, 이주노동자 인권보장 촉구 연대)은 그런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회는 ‘일식’이다. 공식구 피버노바가 6월 한 달 간 ‘태양’을 가리는 ‘피버노바 일식’. 축구에 대한 열광이 국가(민족)주의·초국적 기업 그리고 국제축구연맹의 어두운 면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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