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사 공화국’의 끝나지 않는 절규
  • 정희상·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2.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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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원근은 M16 소총을 오른쪽 가슴에 밀착시킨 뒤 방아쇠를 당겨 자살을 시도했다. 치명상을 입지 않자, 이번에는 왼쪽 가슴에 총을 쏘았다. 총알이 관통되어, 다시 오른쪽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했다.’ (1984년 4월16일 헌병대 수사 결론).


“허원근 사건과 관련하여 1984년 4월16일 이래 다섯 차례에 걸쳐 유가족의 민원이 제기되어 상급 수사기관에서 재조사를 실시한 결과 현장 상황과 부검, 그리고 국가 감정기관의 결과를 재확인하여 자살로 판명되었다.”(2000년 3월11일 육군 칠성부대 정훈공보참모).






‘16년 전에 발생했던 이 사건의 사실은 허원근 일병의 죽음이고, 진실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살이라는 것이다.’(2000년 3월17일자 <국방일보>).
한 병사가 1초당 975m의 속도로 날아가는 직경 5.56mm 총알을 시차를 두고 세 번이나 스스로 쏘아 자살했다는,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이상한 죽음. 사건 발생 후 18년이 지나서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가 타살 혐의를 입증하기까지 이 죽음은 줄곧 ‘자살이어야만’ 했다. 그동안 진실을 덮는 데 군 당국은 물론 공인된 국가 감정기관들조차 사실상 한통속이었다.



18년 만에 드러난 주검의 진실



8월20일 위원회는 1980년대 대표적 군 의문사인 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에 대한 중간 발표를 통해 허일병이 타살되었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이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기 위해 헌병대가 개입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대한민국 군대에 자녀를 보낸 모든 부모를 충격과 경악의 도가니로 내몬 허일병 사망 사건 진상이 드러나는 데는 아버지 허영춘씨의 달걀로 바위 치기식 집념이 큰 역할을 했다. 전라남도 진도가 고향인 허일병은 1983년 9월28일 자원 입대했다. 1984년 4월2일 첫 휴가를 하루 앞두고 그는 부대 안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아버지 허영춘씨는 4월2일 밤 10시 '귀대 중 사망'이라는 전보를 받고, 택시를 대절해 진도에서 강원도 화천까지 밤을 새워 달려갔다. 4월3일 아침 8시 허씨가 현장에 도착해 보니, 시체는 간이 천막 아래 놓여 있었다. 시체 안치소에서 헌병대장은 2발의 총탄으로 자살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아들의 시신을 보니 총상이 세 군데였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허씨는 부검의에게 매달렸다. “도대체 서로 다른 부위에 세발이나 쏘아 자살할 수 있느냐”라고 묻자, 부검의 박 아무개 군의관은 “총알 일곱 발을 맞고도 산 사람이 있다. 데려와서 보여주랴?” 하며 귀찮아했다. 허씨의 뇌리에는 지금도 18년 전 군의관이 한 그 말이 생생하다.



허씨가 거듭 의혹을 제기했지만, 자살이라는 답변에는 변함이 없었다. 연대장과 대대장은 “북괴 침략을 막을 철책선을 지키는 군인들이 망자를 지키고 있어야 되느냐? 빨리 장례를 치르자”라고 허씨를 압박했다. 한국전쟁 세대인 허씨는 눈물을 머금고 화장에 동의했지만, 결코 아들을 가슴에 묻어 버리지 않았다. 허씨는 당시의 각오에 대해 “못난 나라에서 태어나 억울하게 저 세상으로 간 아들 앞에 절대로 못난 아비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라고 회고했다.



고향으로 돌아간 허씨는 기약 없는 싸움에 들어갔다.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그는 진도에서 글씨를 가장 잘 쓰는 사람을 고용해 탄원서를 작성해 청와대·국방부·검찰 등에 보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한결같았다. ‘조의를 표한다. 관계기관에 이첩하겠다.’ 관계기관은 해당 헌병대였다. 결국 처음에 자살로 처리한 헌병대로 다시 돌아가는 뺑뺑이 놀음만 계속된 것이다.



헌병대, 현장 목격자 고춧가루 고문






1984년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이 다시 한번 조사했지만 ‘역시나’였다. 민원이 계속되자 헌병대는 “돈 아끼고 몸조심하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 허씨는 굴하지 않았다. 총상의 의문을 풀기 위해 법의학을 독학하고, 전국에 흩어진 전역병들을 수소문해 찾아 나섰다. 보름, 한 달간 전국을 헤매고 집에 돌아오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부산에 살고 있는 전역병 이 아무개씨를 어렵게 찾았을 때는 ‘당신 아들 때문에 고춧가루 고문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문전박대를 당했다. 당시만 해도 허씨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번에 위원회가 조사를 통해서, 헌병대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현장 목격자를 고문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폭압적인 군사 정권의 기세가 꺾이자 1988년부터 의문사 가족들이 모여 항의 농성을 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 길로 서울로 달려간 허씨는 1백35일 동안 농성을 벌였다. 허씨와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천리 밖 진도군에서 농사를 지어온 그는 서울과 진도를 오가며 백방으로 뛰기를 10년이나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군에 갔다가 의문사한 다른 20여 명의 유족들을 만났다. 그에게는 군에서 죽은 젊은이들은 모두가 그의 아들이었다.



이 무렵 김 훈 중위 의문사 사건이 공론화하면서 급조된 국방부특별조사단은 허원근씨를 비롯한 1980년대의 강제 징집·녹화 사업·군 의문사 사건도 조사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유가협이 특조단 조사를 거부하자 허원근 사건은 때마침 발족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당시 특조단이 손댄 수사를 끝냈더라도 자살이라는 결론은 바뀌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허씨의 판단이다. 허일병 사건으로 특조단 조사를 받았던 한 전역병은 “다방으로 부르더니 요즘 근황을 10여분 물어보았다. 그리고 당시 수사기록을 보여주며 도장을 찍으라고 해서 찍었다”라고 말했다. 국방부 특조단 수사도 그 밥에 그 나물이었던 셈이다.



“4월1일 허일병은 중대 간부 술자리를 준비했다. 중대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술을 마시다 말다툼이 있었고, 하사관 아무개씨가 사병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이 하사관은 총을 들고 허원근 일병을 개머리판으로 가격하고, 오른쪽 가슴에 총을 대고 쏘았다. 하사관의 우발적인 총격으로 허일병은 숨졌다. 허일병이 숨지자, 중대 간부들은 은폐 회의를 갖고 내무반을 물청소했다. 허일병을 밖으로 데려가 두 발을 왼쪽 가슴과 머리에 더 쏘아 자살로 위장했다.”
실로 18년 만에 위원회가 밝혀낸 이같은 소중한 진실 앞에 허씨의 아내는 한없이 오열했다. 허씨는 “이제 원근이를 죽이고 은폐한 사람들도 진실을 말한다면 용서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나머지 의문사 사건들에 대한 진상도 하루속히 밝혀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나머지 군대 의문사에 대한 위원회의 진상규명 활동은 순탄하지 않다. 조사 권한에 한계가 있고 시한마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0년 12월 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허영춘씨를 비롯한 군 의문사 가족들은 집단으로 진정을 냈다. 현재 위원회에 접수된 군 의문사는 26건이다. 이 가운데는 1980년대 민주화 요구 시위를 벌인 학생들을 강제 징집하고, 이들을 상대로 프락치 활동을 강요한 이른바 녹화사업 희생자가 6명 포함되어 있다.



녹화 사업 관련자들 모두 소환에 불응






올해 2월28일 위원회는 녹화사업 전모를 담은 당시 국군보안사령부 공식 문서를 찾아내 녹화사업이 치안본부·검찰·내무부·문교부 등 1980년대 초반 국가기관이 총동원된 초법적 인권 유린 행위였음을 밝혀냈다. 이 문서에는 1981년부터 1983년까지 민주화 집회 및 시위에 참여한 대학생 1천1백명을 강제 징집해 이 중 2백65명을 특별정훈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녹화사업을 벌였다는 사실이 담겨 있었다.



이같은 기록을 토대로 군대 의문사 진상 조사를 위해 위원회는 올 1월부터 녹화사업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였던 정형근 의원과 최연희 의원, 당시 치안본부장이던 유흥수 의원에게 소환 통보를 보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소환에 불응했다. 지난 2월19일에는 “녹화사업이 사실상 전두환 전 대통령 지시로 시작됐으며 입안 후 결재도 했다”라는 당시 보안사령부 대공처장의 진술을 확보하고, 8월10일자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위원회에 출석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 역시 소환에 불응했다.



이처럼 국가기관이 총동원된 군대 의문사의 진상을 규명한다는 것은 위원회로서는 역부족이다. 현재까지 조사에서 유일하게 사인이 밝혀진 녹화사업 희생자는 한희철씨이다. 위원회에 따르면, 1983년 12월 한씨는 보안사에서 고문당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씨 이외에 녹화사업 희생자의 사인은 의혹투성이다.



한양대 3년 재학생이었던 한영현씨는 1983년 4월 강제 징집되었다가 그 해 7월2일 총상을 입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정성희씨는 1981년 11월25일 시위 도중 경찰에 연행되어 강제 징집되었다가 1982년 7월 초소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고려대생 김두황씨도 강제 징집되었다가 총탄 4발을 맞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3대 독자인 이윤성씨는 1982년 11월3일 시위에 나섰다가 체포되어 다음날 강제 징집되었다.


이씨는 전역을 열흘 앞둔 1983년 4월30일 205 보안부대 감찰실에 끌려갔는데, 5월4일 숨진 채 발견되었다. 당시 군 당국은 ‘월북을 기도한 이씨가 조사 도중 자책감과 불안감을 못 이겨 목을 매 숨졌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최근 위원회는 월북 기도가 조작된 것이었음을 밝혀냈다. 1남5녀 가운데 외아들인 이씨를 잃은 아버지 이명률씨는 화병을 앓다가 2000년 4월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박정선씨도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억울함 못 이겨 자살한 어머니도






이씨처럼 군대 희생자들의 가족은 사건 후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경우가 많다. 서울대생 최우혁씨는 1987년 4월 어머니의 권유로 입대했다가 부대 내 쓰레기장 옆에서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되었다. 부대측은 당시 최씨가 분신 자살을 했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유족은 수소문 끝에 아들이 이미 타살된 뒤 불에 태워졌음을 시사하는 정황들을 여러 군데서 포착하고,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했지만 군 당국은 그때마다 냉대와 협박을 되풀이했을 뿐이다.



결국 억울함을 이기지 못한 최씨의 어머니 강연임씨는 군대에 가기 싫은 자식을 억지로 보내 죽였다고 한탄하며 세월을 보내다 1991년 2월19일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한강에 투신했다. 자식과 아내를 한꺼번에 잃은 아버지 최봉규씨(72)는 “자식 살리려고 군대에 보냈다가 사지로 보내고 아내마저 빼앗겼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뒤 유가협 사무실에서 취재진과 만난 최씨는 “이제 우리들 차례이다”라며 위원회 활동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위원회는 법 개정이 되지 않으면 9월16일 활동을 끝낸다. 시간이 촉박해 군 의문사 20여건 가운데 상당수가 진상 규명 불능 판결이 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사인이 의심스러운 군 의문사는 수두룩하다(46~47쪽 표 참조). 위원회 활동을 여기서 멈춘다면 대한민국은 영원히 의문사 공화국으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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