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본부’ 구조가 어떻기에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3.0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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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폐해 산실’로 도마 올라…삼성 막강, LG·SK는 느슨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 간사의 ‘구조조정본부 해체’ 발언은 패를 보여준 셈이었다. 말실수였다고 했지만, 재벌에 대한 인수위의 시각을 드러낸 것이다. 재벌 경영 시스템을 해체하겠다는 말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구조조정본부는 단지 계열사간 구조 조정 일만 하는 기구는 아니다. 강명헌 교수(단국대·경제학)는 “재벌의 폐해로 꼽히는 문어발·황제 경영·변칙 세습은 모두 구조본의 작품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구조조정본부가 총수의 명을 받아 계열사간 부당내부거래나 상호지급보증을 지시하거나 총수의 부당한 재산 상속을 기획하는 일을 해왔다는 것이다. 예컨대 2000년 현대그룹 ‘왕자의 난’ 때에는 현대 구조조정본부가 계열사 인사에 노골적으로 개입해 분란을 일으켰다. 인수위가 폐지를 거론한 것도 구조조정본부가 본래 기능보다는 황제 경영을 지원하는 부정적 기능에 치중하고 있다고 판단해서이다.


특히 구조조정본부는 권한만 있고 책임은 지지 않아서 더 비판을 받는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김상조 소장(한성대 무역학 교수)은 “구조조정본부가 나서서 총수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일들을 함으로써 기업과 소액 주주에게 피해를 주어도 소송 대상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1999년 참여연대가 제기했던 삼성전자 주주대표소송 1심 판결에서 계열사에 대한 부당 지원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의사결정자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구조조정본부가 지금과 같은 권한을 행사하려면 거기에 마땅한 책임까지 지는 지주 회사 체제로 옮겨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CEO 사관학교’ 구실도


하지만 재계에서는 전세계적인 경기 침체 속에서 우리나라 경제를 이만큼이나마 이끌어온 데에는 구조조정본부의 힘이 컸다고 주장한다. 삼성그룹 홍보팀 정원조 상무는 “삼성이 오늘처럼 세계적인 그룹으로 성장한 데에는 이건희 회장·구조조정본부·계열사 경영진이라는 우리 그룹의 삼각 편대가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구조조정본부는 실제 어떤 조직 규모를 갖고 있고, 주로 하는 일이 무엇일까. 구조조정본부의 역사는 대기업 그룹 기획조정실 또는 비서실 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외환 위기 후 정부는 재벌의 선단식 경영을 해체하기 위해 그룹 기획조정실 또는 비서실을 폐지하고 구조 조정을 독려할 새로운 기구를 만들게 했다. 하지만 과거 비서실이나 기획조정실의 역할을 그대로 가져오고 구조 조정 성격만 가미한 경우가 많았다.


대기업 구조조정본부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곳은 삼성이다. 삼성 구조조정본부는 재무·인사·경영진단·홍보·비서·법무·기획 등 7개 팀 100여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 계열사에서 파견 나온 직원들이어서 일은 구조조정본부에서 하지만 월급은 소속 계열사에서 받는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각 계열사 과·차장급 직원 가운데 가장 우수한 사람들을 뽑아 모은 곳이 구조조정본부이다”라고 말했다.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 그룹 사안을 처리하며 시각과 경험을 넓히다 보니 구조조정본부는 계열사 사장들을 배출해내는 CEO 사관학교가 되었다. 계열사 사장 절반 가까이가 비서실이나 구조조정본부를 거쳤다. 황영기 삼성증권 사장·제진훈 삼성캐피탈 사장·한용외 삼성전자 생활가전 총괄 사장이 대표적이다.


규모도 규모지만, ‘계열사 사장들조차 구조조정본부라면 설설 긴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삼성 구조조정본부는 그룹 내에서 영향력이 막강하다. 재무와 인사권 그리고 정보까지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다. 각 계열사 재무팀은 재무 보고를 할 때 소속 경영진보다 구조조정본부 재무팀에 먼저 보고하고, 임원 인사도 구조조정본부가 ‘조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계열사 사장단 인사와 업적 평가도 구조조정본부가 한다.


그런 막강한 조직을 이끄는 수장은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겸 사장이다. 이학수 사장은 제일모직에 입사한 뒤 삼성그룹 비서실에 발탁되어, 15년 넘게 비서실과 구조조정본부에서 일했다. 이건희 회장의 방침을 가장 잘 소화하는 것으로 알려진 그는 삼성그룹의 실질적인 2인자로 불리기도 한다.


구조조정본부 전체 인원 가운데 3분의 1을 거느리고 있는 재무팀은 한국과학기술원 공학도 출신 재무통인 김인주 부사장이 맡고 있다. 홍보팀은 언론인 출신인 이순동 부사장, 인사팀은 삼성전자의 ‘인사통’ 노인식 팀장, 감사 역할을 하는 경영진단팀은 박근희 팀장이 맡고 있다. 그룹의 중·장기 전략을 만들어 내는 기획팀은 학계와 경제계에 지인이 많은 장충기 팀장이, 이건희 회장의 일정을 챙기는 비서팀은 김 준 상무가 이끈다. 삼성의 송사와 같은 법적 문제를 처리하거나 법적 문제가 발생할 소지를 미리 예방하는 법무팀은 서울지검 특수부 검사 출신인 김용철 팀장이 맡고 있다. 재계에서는 이재용 상무보가 16억원만 내고 삼성그룹을 상속한 것이 법무팀 덕분이라고 본다.


삼성에 비하면 다른 기업의 구조조정본부는 규모나 계열사 영향력이 약한 편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그룹별 구조조정본부의 힘은 청탁을 넣어 보면 안다”라고 말했다. 예컨대 삼성 구조조정본부 이학수 사장이나 이순동 부사장에게 뭔가 부탁하면 ‘예스’든 ‘노’든 그 자리에서 바로 알 수 있지만, 다른 그룹 구조조정본부에서는 답을 듣는 데 며칠이 걸린다는 것이다.
LG나 SK 그룹 관계자들도 “삼성에 비하면 우리 구조조정본부는 느슨하다”라고 주장한다. 현대자동차그룹은 한술 더 떠 자기 그룹에는 아예 구조조정본부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현대차는 구조본 대신 기획총괄본부 설치


LG 구조조정본부는 5개 팀 50여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LG그룹 홍보팀 정상국 부사장은 “우리 그룹은 오래 전부터 계열사 자율 경영을 강조해 왔기 때문에 구조조정본부가 계열사 일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법이 거의 없다”라고 말했다. 계열사의 중복 업무를 조정하고, 계열사 차원에서 하기 어려운 구조 조정을 도울 뿐이라는 것이다. 재무와 인사를 틀어쥐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막강한 힘을 자랑할 처지도 못된다. LG 구조조정본부는 강유식 본부장이 이끌고 있다. 합리적 원칙주의자인 강본부장은 원칙에 맞지 않으면 그룹 총수 앞에서도 ‘노’라고 말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SK 구조조정본부는 4개팀 40여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조조정본부장은 따로 두지 않고 SK(주) 김창근 사장이 겸임하고 있다. 구조조정본부는 KT 지분 인수, SK텔레콤의 계열사 보유 지분 해외 매각 등 사업 구조 조정 등을 기획하고 지원한다. 본부가 모든 것을 기획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련 계열사와 팀을 만들어 함께 마무리하는 방식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구조조정본부가 따로 없다. 자동차 관련 업종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보니 계열사 구조를 조정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의 생산 라인 중복 투자를 예방하고 자동차산업 전략을 연구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일을 하는 현대·기아차 기획총괄본부가 있다. 이 팀은 정순원 사장이 이끌고 있다.


구조조정본부 해체설은 도마에 오르기도 전에 꼬리를 내렸다. 재계가 반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해체할 법적 근거가 마땅치 않고, 강제 해체는 이름만 바꾼 또 다른 구조조정본부를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해체를 논하기 전에 구조조정본부를 만들 수밖에 없는 재벌 시스템을 개혁하고, 권한과 책임을 함께 물을 수 있는 지주 회사 체제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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