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따라 상처도 깊어만 간다
  • 정희상·고제규 기자 ()
  • 승인 2005.01.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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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유족’들의 현재/자녀들 대부분 반듯하게 자랐지만 언론 노출 기피
‘그때 그 사람들’의 유족에게 10·26은 현재진행형이다. 희생된 가족들의 충격도 컸지만, 졸지에 국사범으로 몰린 가족들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때 우리는 고립되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의 주인공 격인 박선호씨의 큰아들 박 아무개씨(43)는 이렇게 말했다. 현재 유명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이름을 밝히지 않기로 하고야 취재에 응했다.

1979년 10월27일 고등학교 2학년이던 박씨는 등교 길 버스 안에서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접했다. 새벽에 아버지가 다녀간 줄도 몰랐다. 그저 아버지가 바쁘시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이름이 속보에 나오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가택 수사를 한다며 보안사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박씨 형제는 2남2녀. 당시 대학을 다니던 누나와 초등학생인 여동생, 유치원에 다니던 늦둥이 남동생은 그때부터 기도만 올렸다. 외가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그 해 12월4일부터 시작된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아들은 아버지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아들 박씨는 지금도 아버지가 품고 다녔던 사직서를 기억한다. 1979년 당시 아버지는 항상 사직서를 양복 안쪽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여차하면 그만두겠다고 해 어머니와 다툼도 잦았다고 한다. 그때 아버지가 사표를 던졌다면? 역사에 가정은 없겠지만, 그는 이듬해 5월24일의 충격은 벗을 수 있었을 것이다. 1980년 5월24일을 그는 평생 잊지 못한다. 학교에서 돌아가자 외숙모는 목적지도 말하지 않고 함께 가자고 했다. 외숙모 손에 이끌려 간 곳은 국군통합병원이었다. 그저 복역 중인 아버지가 아파서 병문안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 있었다. 아들 박씨는 까무러쳤다. 일반 대학을 졸업하고 박씨는 신학대학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건 당시 이화여대 재학생이던 누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을 택했다. “우리에게 대학을 졸업하고 돈을 번다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라고 그는 말했다.

김재규 부장과 박선호 과장을 비롯해 이기주·유성옥·김태원 씨는 1980년 5월24일 동시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현역 군인이던 박흥주 대령은 계엄 상황이어서 1심으로 끝났다. 박대령은 1980년 3월6일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형장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부인과 1남2녀를 남겼다. 박대령을 변론했던 태윤기 변호사(86)는 지금도 그를 청빈한 군인으로 기억한다. 7년 전 중풍으로 쓰러진 태변호사는 더듬거리며 힘겹게 말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정 비서관이 차도 들어가지 못하는 행당동 달동네에 살았다.”

그가 박대령의 소송을 맡은 사연도 이채롭다. 박대령의 가족은 원래 다른 변호사를 선임했다. 하지만 그 변호사가 보안사의 압력으로 사임했다. 그때 곽태영씨(현재 박정희기념관 반대 공동대표)가 다리를 놓았다. 광복군 출신인 태윤기 변호사를 찾아가 보라고 한 것이다. 장준하씨와 함께 이범석 장군 휘하에서 광복군으로 활동했던 태변호사는 흔쾌히 무료 변론을 자청했다. 변론을 맡은 태변호사가 박대령을 찾아가자, 박대령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보안사가 가족을 회유해서 선임한 변호사로 알았다. 박대령은 그런 사람이었다. 태변호사가 부인이 써준 편지를 꺼내자 그제야 속내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할말 없다”며 취재 거부

박대령은 부인에게 ‘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를 그대로 놔두지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의 마지막 편지를 썼다. 그의 바람이 통했는지, 서울고등학교 10기 동기생들이 유족에게 도움을 주었다. 현재 박대령 가족은 서울 압구정동에 살고 있다. 기자가 집을 찾았을 때 사건 당시 8개월이었던 막내 아들(25)은 대학을 졸업할 나이가 되었다. 그는 “어머니가 할말이 없다고 하신다”라며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김재규 부장은 남은 재산을 부하들의 유족에게 나눠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부장의 유족은 그의 뜻에 따라 처음에는 다른 유족들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재산 대부분이 국가에 헌납되었기 때문이다. 김부장 부인(74)은 현재 서울 논현동에 거주하고 있다. 미국에 머무르던 외동딸은 귀국해 시댁이 운영하는 한 사립 대학 일을 돕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때 그 사람들’의 가족들은 3~4년 전까지만 해도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이기주씨와 유성옥씨의 유가족들과는 연락이 끊겼다. 이기주씨 유족은 당시 변론을 맡았던 안동일 변호사에게만 간헐적으로 근황을 전하고 있다. 안변호사는 국선 변호사로서 이기주씨와 유성옥씨 변론을 맡았었다. 2심부터는 안동일 변호사가 두 사람의 무료 변론을 자청해 대법원까지 변론을 했다.

이기주씨는 당시 1백30만원짜리 전세방에 노모와 부인, 네 살 난 딸, 8개월 된 아들을 남겼다. 이후 이씨의 부인은 김재규 부장의 유가족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영양사로 일하며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큰딸(29)은 현재 유명 제약회사 연구원으로 있고, 아들(25)은 토목공학과를 졸업했다. 기자가 큰딸과 통화를 시도했지만, 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김태원씨 유족은 부인(55)과 두 아들이다. 김씨의 부인은 지난해부터 서울에서 프랜차이즈 반찬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기자가 가게를 찾아 3일 동안 취재를 요청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그때 그 사람들’의 유족들이 상처를 씻기에는 25년이라는 세월이 아직 짧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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