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 마음의 미로에 갇힌 아이들
  • 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승인 2005.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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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아톤>으로 새삼 관심을 모으고 있지만, 자폐는 더 이상 특별한 병증이 아니다. 국내 환자는 계속 늘어 현재 1천명당 1명꼴이다. 자폐는 어떻게 생기며,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무엇인가.
대학생 주은미씨는 그동안 장애인을 다룬 수많은 영화를 보았다. 그러나 조승우·김미숙이 주연한 <말아톤>(감독 정윤철)만큼 깊은 감명을 받은 작품은 없었다. 주씨는 그 작품 덕에 “자폐아에 대한 편견과 거리감을 훨씬 줄일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몸은 스무 살이지만 머리는 네댓 살 수준인 자폐아(초원이)의 삶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사는 일이 얼마나 버거운지 확인했다는 것이다.

<말아톤>이 감동만 준 것은 아니다. 걱정도 함께 주었다. 주씨는 “결혼을 하게 되면 아기 낳기가 무서울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자폐아를 낳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자폐를 가진 어린이와 그 부모들이 겪는 고통스런 삶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실제 자폐증은 무서운 병이다. 원인도 정확히 모르고 완치도 불가능하다. 환자와 그 가족을 일평생 어둠 속에 가두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절망이 있으면 희망이 있는 법. 의학자들의 고생 덕에 자폐증의 비밀이 하나둘 드러나고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자폐증은 ‘사회적 관계 결핍, 의사 소통 결함, 계속적인 강박 행동, 변화에 대한 저항’ 등을 나타내는 아동기 증후군이다. 이 병에 걸리면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사물이나 장난감 또는 자신의 몸을 갖고 놀기를 더 좋아한다. 또 언어 능력이 결여되어 대화를 하지 못한다. <말아톤>에서 초원이가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일부 자폐아들은 특정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초원이의 경우 암기력이 뛰어나 할인매장에서 상품 목록을 일별한 뒤 곧바로 수많은 물건을 찾아온다. 몇몇 연구에서는 자폐증 환자 10명 가운데 1명꼴로 예술·음악·계산·암기 분야에서 비범한 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들은 또 복잡한 디자인 속에 숨겨진 단순한 모양을 찾는 일에도 능하다.

<말아톤>에서 초원이는 어머니의 눈물 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능이 별로 향상되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좀더 빨리 자폐증을 발견해서 치료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정이기는 하지만, 아마 상태가 훨씬 더 호전했을지 모른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자폐증도 암이나 다른 질병처럼 조기 진단이 매우 중요하다. 실례가 있다. 미국 프린스턴 어린이개발센터에 등록한 자폐아를 조사한 결과, 다섯 살 이후에 자폐증이 발견된 경우 단 10%만 일반 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다섯 살 이전에 자폐증 진단을 받은 아이들은 50% 정도가 일반 학교에 입학했다.

자폐에 관한 오해와 진실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김우진군(12)도 한 예가 될 것 같다. 우진이는 태어날 때만 해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출산은 순조로웠으며 첫돌 때까지 탈 없이 자랐다. 그러나 13개월 무렵부터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다. “눈도 맞추지 않고, 옹알이도 하지 않았다”라고 엄마 신명동씨(소아과 의사)는 돌이켰다. 생후 14~15개월이 되면서 더 걱정스러운 정도가 되었다.
이후 신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만 4년 동안 우진이에게 매달렸다. 수많은 치료 기관을 찾아다니며 백방으로 노력한 덕분일까. 보일 듯 말 듯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진이가 조금씩 외부 자극에 반응을 보인 것이다. 조기 발견과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말미암아 우진이는 현재 일반 학교 4학년에 다닌다. 성적은 처지지만 우진이는 줄서기, 식사 같이 하기 따위를 무난히 해낸다.

그렇다면 자폐증은 어느 정도 조기 진단이 가능할까. 조수철 교수(서울대병원·정신과)는 생후 15~18개월이면 진단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물론 다양한 진단법을 이용해야 한다. 국내에서도 처음 선별법이 만들어졌다. 지난해 가을 임숙빈 교수(을지대·간호대)가 ‘자폐아 체크 리스트’를 만들어 공개한 것이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말아톤>에서 초원이 부모는 초원이 때문에 보이지 않는 갈등을 겪는다. 그러나 실제 자폐아를 키우는 가정의 부부 갈등은 그 이상이다. 처음 자녀가 자폐임을 알게 되면 대부분의 부모는 극심한 좌절감을 맛본다. 심하면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며 부부 싸움을 하고, 이혼까지 불사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녀가 자폐임을 알게 되었을 때 제일 중요한 일은 아이에게 말을 시키고, 같이 놀아주고, 신체 접촉을 늘리는 것이다.

조기 진단이 모두에게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섯 살 이전에 발견하더라도 언어 발달 차이에 따라 예후가 다르게 나타난다. 물론 언어 발달이 잘 되어 있으면 더 나아질 가능성이 높다. IQ도 주요 변수로 작용한다. IQ가 50 이하이면 더 나아지기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현재까지 진행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예닐곱 살에 이른 자폐아가 뚜렷이 나아진 현상을 보이지 않으면 더 나은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리고 자폐는 출생 순위와 하등 관계가 없고, 여자 아이보다 남자 아이에게서 3,4배 더 많이 발생한다.

1950~1960년대에는 자폐증이 이른바 상류층 집단의 자녀들에게서 더 흔히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자폐증 연구의 선구자인 캐너가 그 소문을 부채질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폐아 부모의 90%가 상류 계층에 속해 있음을 발견한 뒤, 지적이고 초연하고 유능하고 냉정한 유형의 부모가 낳은 자녀들이 자폐증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속 연구에서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자폐아 부모들에게서 어떤 공통점도 발견되지 않았고, 환경적 억압이나 특이한 가족 관계도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전문가들은 부모의 눈으로도 자폐 유무를 가려낼 수 있다고 말한다. 생후 12~18개월인 아이들의 표정과 몸짓을 보면 쉽게 이상 행동을 발견할 수 있다. 불러도 반응이 없고, 옹알이를 하지 않고, 안아주어도 반기는 기색이 없고, 엄마 아빠를 못 알아보고, 낯을 안 가리고, 모방놀이(도리도리 짝짜꿍 등)를 안 따라 하고, 자고 먹는 습관이 불규칙하고, 텔레비전이나 문 소리에 민감하고, 텔레비전 광고에 귀신같이 반응하고, 밖으로 나가면 어디론가 뛰어가고, 장난감을 갖고 놀지 못하는 것 등이 전문가들이 꼽는 이상 행동이다. 이 가운데 서너 가지에 해당하면 자폐를 의심할 수 있다.
뇌 기능 이상으로 발병…유전설은 확증 없어

현재 한국의 자폐증 환자는 4만~5만 명으로 추산된다. 1천명당 1명꼴로 발병하는 셈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5백명당 1명꼴로 걸린다. 캐나다는 더 심각해서 2백~3백명당 1명꼴로 발생한다(78쪽 기사 참조). 이는 자폐증 환자가 다운증후군이나 소아암 환자보다 더 흔해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환자 수가 늘고 병으로 공식 인정된 지 60년이 넘었지만, 아직 발병 원인과 예방법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때 일부 연구자들은 발달 초기 단계에서 아기가 커다란 결함을 경험하거나 양육이 잘못되면 자폐증에 걸린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한 발짝 더 나아가 ‘아기가 너무 일찍 엄마와 분리될 경우에도 자폐에 걸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들에 따르면, 분리 준비가 안된 아기가 분리되면 그 느낌만으로도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아기는 그같은 과(過)분리로 인한 놀라움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 ‘내가 아닌’ 세계로 내쫓기게 되는데, 그것이 아기와 외부 사이에 경계를 만든다(<자폐증> 이대출판부).

또 다른 연구자들은 임신 중인 산모의 불안이 아기의 감각 발달을 느리게 한다고 주장한다. 산모가 불안해 하면 내분비 변화가 일어나고, 그것이 태아의 신경계·내분비계를 자극해 아기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그들은 그 증거로 임신 기간에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은 산모의 아이들이 자폐에 걸린 사례를 소개했다. 그러나 이같은 심리적 이론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 더 많은 연구에서 확증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신체·신경생리학·생화학·내분비학을 이용해 원인을 찾고 있다. 그 결과 뇌의 기능에 문제가 있어 자폐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실제 자폐아 중에는 정상 어린이나 정신분열증을 앓는 어린이에 비해 산전·산후 합병증이나 뇌 손상을 경험한 사례가 많았다. 생화학자들은 일부 신경 전달 물질의 기능 저하가 자폐를 부르는 것으로 추측한다.

원인을 유전으로 보는 연구자들도 적지 않다. 예컨대 자폐아 형제들은 자폐 발생률이 20%나 된다. 평균치(1천명당 4명)보다 50배나 높은 수치이다. 일란성 쌍생아의 경우 한 사람이 자폐아이면 다른 사람이 자폐아일 확률이 75%나 된다. 연구자들은 자폐증을 일으키는 유전자가 숨어 있을 만한 염색체의 주요 지점을 찾고 있지만 아직 확실한 증거를 잡지 못했다. 이제까지 그들이 얻은 결론은 하나. 자폐 유전자는 1개가 아니라 10개 이상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자폐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자폐아의 심맹 증후군(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증상)에 주목하는 연구자도 늘고 있다. 정상인은 다른 사람의 표정이나 말투를 통해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 그러나 자폐아들은 그 일을 전혀 해내지 못한다. 그 결과는 자못 심각하다. 남이 싫은 내색이나 애정을 보여도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인간의 뇌에 특정 종류의 사회적 현상을 인식하기 위한 회로가 깔려 있는데, 그것이 제구실을 못하기 때문에 자폐증에 걸린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부위가 어디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자폐 치료법은 음악치료법·식이요법·미술치료법·포옹치료법·의사소통촉진법 등 수십 가지가 넘는다. 그러나 어떤 방법도 효과가 검증되지 못했다. 때로는 약물을 사용하지만 그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치료법 수십 가지…미국 등에서는 ABA 각광

미국이나 캐나다에서는 응용행동분석법(ABA)이 널리 이용된다. 이 방법은 보상을 통해 특정 행동을 반복시켜 인지 능력을 키운다. 1991년부터 한국행동수정연구소를 운영해온 홍준표 교수(중앙대·인간환경자원학)는 “필요한 행동은 하게 하고, 나쁜 행동은 못하게 하는 것이 ABA법의 특징이다”라고 말했다. 예컨대 밥을 못 먹는 자폐아에게 처음에는 밥을 떠먹여 주다가 아이가 수저를 들면 밥을 뜨게 하고, 밥을 뜨면 입으로 가져가게 하는 식으로 교육하는 것이다. 이때에는 칭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홍교수가 소개하는 ABA법 치료 사례 하나.

경아(가명·만2세)는 눈만 뜨면 우는 자폐아였다. 같이 있어 달라는 표현을 그렇게 나타냈다. 문제는 부모에게도 있었다. 울 때마다 안아주다 보니 아이의 상태가 점점 더 심각해진 것이다. 홍교수는 아이가 울더라도 부모가 고개를 한번에 돌리지 말고 조금씩 돌리도록 유도했다. 첫날 180° 돌아앉았으면, 그 다음날은 130°, 또 그 다음날은 90° 돌아앉는 식으로 교육했다. 그 결과 아이는 신기하게도 닷새 만에 울음을 그쳤다. 그러나 아직 ABA법은 널리 보급되지 않고 있다. 홍교수는 그 이유를 “비용이 비교적 많이 드는 데다, 부모의 역할이 어떤 치료법보다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자폐 진단과 치료법은 아직 미비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일부 병원에서는 언어 장애만 나타나도 자폐로 진단하는 등 오진 사례도 적지 않다. 그같은 문제점을 보완하려면 조기 진단과 치료를 위한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 <말아톤>에서 초원이 엄마는 자기 소원이 ‘초원이보다 하루 더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진이 엄마 신명동씨도 같은 소원을 갖고 있다. “따지고 보면 지금은 별 걱정이 안된다. 그 애가 나랑 떨어지는 상황을 생각하면 불안과 슬픔이 몰려온다.”

도움 말:조수철 교수(서울대병원·정신과)·임숙빈 교수(을지대·간호학)·홍준표 교수(중앙대·인간환경자원학)·신의진(신촌세브란스병원·정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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