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지금 ‘여성 시대’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3.07.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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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남자 팔자가 뒤웅박 팔자다. 여자를 잘 만나야 인생이 행복하다.” ‘남성 공화국’ 한국 사회가 ‘성 역전’ 현상을 빚고 있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얼마만큼 성 역전극이 연출되고 있는가?
여성 인력 활용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2003년 현재). 여성권한지수, 세계 61위(전체 66개국. 2002년). 여성 평균 임금, 남성의 63.7% (2003년). 국회 여성의원 점유율 5.9%(2003년). 지방의회 여성의원 점유율 3.4%(2002년). 여성 법관·검사 비율 6.6%(2001년). 5급 이상 고위 공무원 중 여성 비율 4.2%(2001년). ‘남성 공화국’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다.

이런 남성 공화국에 대이변이 일어나고 있다. 우선 수많은 남성 정치인을 제치고 여성 정치인이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집중 거론되고 있다.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 민주당 추미애 의원, 강금실 법무부장관이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떠올랐다. 새천년과 함께 등장한 ‘여성 우월론’도 기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런 현상은 과연 우리 사회에 깊숙이 박힌 남성우월주의의 먹구름이 걷히고 ‘여성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남성 공화국을 지탱해온 금녀의 장벽이 곳곳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관학교에 여생도가 들어간 것은 벌써 오래 전 일이다. 지난해에는 육군 최초로 보병대대에 여성 소총소대장이 부임했고, 공군에서는 최초로 여성 전투기 조종사가 등장했다. 최초의 여성 기관차 기관사와 여성 1등항해사가 나타난 것을 비롯해, 70년 경마 사상 처음으로 여성 기수가 등장했다. 대한성공회에서는 1백11년 만에 여성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기도 했다.

고위 관직으로 향하는 첫 관문인 고시에서도 여성은 각개 약진하고 있다. 1996년과 비교해 불과 7년 사이에 여성 합격자 비율은 사법고시(7.2%에서 23.9%로) 행정고시(9.9%에서 28.4%로) 외무고시(9.8%에서 45.7%로) 모두 3배 이상 늘었다. 사법고시의 경우 1998년부터 3년 동안 수석 합격자가 내리 여성이었다. 공인회계사 합격자의 여성 비율도 1996년 10.1%에서 지난해에는 17.2%로 늘었다.

학벌 사회인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는 이미 여학생의 실력이 남학생을 압도하고 있다. 200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결과를 보면 자연계열에서는 전 영역에 걸쳐 여학생의 성적이 남학생보다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문계열의 경우 수리와 과학탐구 영역을 제외한 전 영역에서 여학생의 성적이 우수했다(72쪽 상자 기사 참조).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얼마만큼 역전극이 연출되고 있는 것일까?

여성의 우월함을 보여주는 변화는 초등학교 교실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남자 반장과 여자 부반장 구도는 이미 깨진 지 오래다. 신체 성장과 정신적인 성숙에서 모두 앞서는 여학생들이 교실을 장악하고 있는데 이 기세는 중학교까지 이어진다. 서울의 한 남녀 공학 중학교에서 1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유재경 교사(31)는 “숫자로는 남학생이 여학생의 두 배나 되지만 학급의 중요한 의사 결정은 여학생들 뜻에 따라 결정된다”라고 말했다. 초·중학교에서 남학생과 여학생의 이런 차이는 고등학교 교실로 올라가면 성적 차이로 이어진다. 특히 수행 평가의 비중이 커지면서 남학생이 내신에서 불리해지는 양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인터넷 수험생 사이트인 ‘오르비7’ 운영자 이광복씨는 “남학생과 여학생의 실력 차이가 생기면서 남학생 부모들이 남녀 공학을 기피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수능에서는 비록 여학생에게 뒤지지만 아직도 ‘남존여비’의 사회 풍토 탓인지 상대적으로 남학생이 대학에 더 많이 진학하고 있다. 2001년 현재 4년제 대학의 여학생 비율은 36.7%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학교 생활을 들여다보면 여성의 기세는 대학에서도 꺾이지 않는다. 연세대와 고려대에서 최초의 여성 총학생회장이 선출된 데 이어 올해는 중앙대·명지대·단국대·국민대 등 10여개 대학에서 여성이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여성 총학생회장의 활약은 남성 총학생회장들이 성추문으로 낙마하고 있는 현상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대학연합 인터넷 신문인 <유뉴스>의 백영순 기자는 “대학 신문 편집장 중에도 여성이 많은데, 이는 여성이 대학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취업문에 이르면 남성은 조금 숨을 돌릴 수 있게 된다. 남녀차별적인 관행 탓에 아직까지 취업과 승진에서는 남성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전문직으로 가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남녀 차별이 없는 곳에서부터 여성들이 영역을 구축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외국어 능력이 뛰어난 여성들은 외국계 기업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월드컵 전후로 대규모 인력 충원에 나선 외국 통신사의 한국 지국도 대부분 여성을 뽑았다. 경제 뉴스 전문 통신사인 다우존스 와이어의 한국 지국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지국장을 포함한 기자 7명과 인턴 기자 전원이 여성이다. 다우존스 와이어의 이소의 기자는 “경쟁사인 로이터 통신사와 블룸버그 통신사의 신입 기자들도 대부분 여기자이다. 백과 줄이 통하지 않는 경쟁에서는 여성이 결코 뒤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관리직 여성의 활약도 눈부시다. 6월20일 한국노동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여성이 관리직원으로 있는 기업의 영업 이익은 평균 2백72억원으로 그렇지 않은 기업의 2백13억원보다 더 많았다. 또한 여성 관리직원이 근무하고 있는 업체는 그렇지 않은 업체보다 신제품을 먼저 내놓았고, 2배 이상 시장 조사에 공을 들였다.

여성들이 조금씩 남성 중심주의적 문화를 극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것은 바로 성담론이다. 얼마 전까지 성담론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여성이 성적인 얘기를 하는 것은 조신하지 못한 일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바뀌었다. 남성이 성적인 이야기를 잘못하면 바로 성희롱에 걸리지만,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이 성담론을 즐기고 있다.


‘대한여성 오르가즘 찾기 운동본부’를 표방하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 ‘팍시러브’의 이연희 대표는 이런 변화가 인터넷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씨는 “인터넷을 통해 성에 대해 얘기하면서 여성들이 성문제에 솔직해졌다. 개중에는 ‘나만을 바라보고 살지 않는 남자에게 매달려 살지 않겠다’면서 ‘여사노바’의 길을 택하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팍시러브>는 홍대앞의 직영 바에서 여성들이 가슴 콤플렉스를 벗어나야 한다며 가슴 사진 전시회를 갖는가 하면, 성에 대해서 적극적이 되어야 한다며 오르가슴 흉내내기 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혼과 재혼에서도 여성이라는 것이 더 이상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는다. 처녀 장가를 가는 이혼남보다 총각 시집을 가는 이혼녀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1년도의 경우 전체 결혼 커플 가운데서 초혼녀와 재혼남이 결혼하는 비율이 3.8%인 데 비해 재혼녀와 초혼남이 맺어지는 비율은 5.6%나 되었다.

사회 전반의 여성 중심적인 양상은 문화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패션과 헤어스타일에서 여성의 유행은 남성의 유행에 선행해서 나타난다. 남성이 여성의 유행을 따라 하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20대 여성이 출판 시장을 좌우하면서 여류 소설가들이 베스트 셀러 작가로 떠오르고 있다. 20대 여성이 영화 시장을 좌우하면서부터 영화 제작자들은 남성 관객들이 좋아하는 여배우가 아니라 여성 관객들이 싫어하지 않는 여배우를 캐스팅하고 있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여성 중심으로 확 바뀌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최근의 술 광고 모델들이다. 얼마 전까지 마초적인 분위기의 남성 모델이 주류 모델을 독식했지만 최근에는 이효리(하이트·산사춘)·장나라(잎새주)·고소영(하이트)·신은경(산사춘)·이나영(하이주) 등 여성 연예인들이 주류 모델을 독식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남성중심적인 술자리 문화가 서서히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가정에서 한국 남성은 더욱 작아진다. 이혼 등 남성 문제를 상담해주는 ‘남성의전화’ 이옥 소장은 “요새는 남자 팔자가 뒤웅박 팔자다. 여자를 잘 만나야 인생이 행복하다”라고 말한다. 아내의 외도·가출·가정 폭력에서 여성 못지 않게 남성들도 많은 문제를 안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소장은 남성 문제가 여성 문제보다 빈도 수는 적지만 문제의 심각성은 더하다고 말했다.

남성들의 노년은 더욱 비루하다. 특히 ‘황혼 이혼’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년 이상 함께 산 부부의 이혼이 전체 이혼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 3.9%에서 2000년에는 10.9%로 상승했다. 이혼남이 자살할 확률은 보통 남자의 5배에 달하고 평균 수명은 10년 가까이 짧다.

남성학 연구가들은 ‘21세기는 남성 문제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남성 문제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아직 뒤떨어진다. 1997년에 한국남성학연구회(회장 정채기)가, 1999년에 한국남성운동협의회(회장 이경수)가 발족했지만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인터넷을 통해 ‘남성학’을 검색해보면 ‘애국가 4절까지 부르고 싶은 남성’ ‘포경 수술이 에이즈 감염 줄인다’ ‘우리 나라의 성기 확대 수술은 세계수준’이라는 비뇨기과 의사들의 낯뜨거운 선전 문구밖에 찾을 수 없다. 남성은 아직 자신의 문제에 대한 이론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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