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 간첩 그 ‘전설’과 ‘의혹’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3.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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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국민들은 새만금 공사가 사법부에 의해 중단된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시사저널>이 긴급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7월27일로 한반도에서 총성이 멈춘 지도 50년이 지났다. 하지만 정전(停戰)이라는 단어에서 보듯 남북의 대치는 끝나지 않고 있다.
정전 50주년을 맞아 <시사저널>은 남북의 첩보전 와중에서 희생한 ‘스파이’ 혹은 ‘공작원’들의 이야기를 모아 보기로 했다.
북에서 남으로 온 스파이 중 상당수는 체포되어 신분이 공개되었다. 하지만 북으로 간 남쪽 스파이들은, 무장 게릴라로 활동했던 북파 공작원들을 제외하면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분단 이후 남북한은 치열한 물밑 첩보전을 벌여왔다. 그 과정에서 유명해진 ‘전설적인’ 스파이가 여럿 있다. 스파이 이야기의 공통점 중 하나는 사건 이후에도 의혹이 항상 남는다는 점이다.
이 또한 명명백백할 수 없는 그들 세계만의 ‘법칙’이 빚어낸 것일까? 광복 이후 지금까지의 북한 스파이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들을 추려보았다.

1950년 6월25일, 전쟁이 터진 바로 그 날 서대문형무소에서는 한 여자 사형수가 총살되었다. 이름은 김수임(당시 39세). 해방 정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른바 ‘한국의 마타하리’였다. 죄명은 국방경비법 제32조 위반.

광복 전부터 유부남이던 공산주의자 이강국(북한 외무성 초대 부상)을 사랑했던 김수임은 미군의 군정이 시작되자 군정청 통역관으로 들어갔다. 이화여전을 나온 엘리트이자 미모도 뛰어난 터라 그녀는 곧장 사교계의 꽃으로 떠올랐다. 군정청 핵심 권력자였던 베어드 대령과 사귀게 된 그녀는 이내 그와 동거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애인을 위해 열아홉 차례나 정보를 빼낸 김수임은 1950년 초 친구 모윤숙의 집에서 검거되었다. 1950년 6월, 전쟁 직전에 벌어진 재판은 이강국-베어드와 얽힌 삼각 관계와, 당시 2인자 이기붕 서울시장의 수사 중단 압력 등 화제성 뉴스를 만들어내며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김수임은 과연 치밀한 간첩이었을까, 아니면 사랑에 빠진 여인이었을 뿐일까? 그녀가 죽은 뒤 미국 육군은 베어드 대령의 독직 여부를 조사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결론지었다. 최근 그녀의 대학 후배인 소설가 전숙희씨는 그녀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 (정우사)를 쓰기도 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지 얼마 뒤인 1961년 가을,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이자 상업성 부상(차관)이던 황태성이 서울에 나타났다. 1906년 경북 상주 태생인 그는 광복 직후 남로당 경북 지역 간부를 지냈고, 대구 10·1 폭동의 주역이었던 박정희의 형 박상희와 절친한 사이였다. 그는 박정희 당시 혁명정부 의장을 만나 비밀 정치 협상을 벌이라는 김일성의 명을 받고 내려온 참이었다.

그러나 그가 서울에 도착한 사실은 이내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첩보망에 걸려들었다. 만약 그가 밀사임이 드러나면 박정희 의장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결국 1961년 10월 그는 간첩으로 몰려 체포되었고, 이듬해 사형 선고와 함께 즉각 사형당하고 말았다. 김종필씨는 10여 년 전 “황태성은 협상을 위해 내려왔다. 내가 그를 만난 적이 있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스파이였을까, 밀사였을까?
1967년 3월22일 오후 5시23분, 제242차 군사정전위 본회의가 끝난 뒤 회의장을 떠나려던 유엔측 영국 대표 벤 코프트 준장의 세단으로 갈색 코트를 입고 검은 테 안경을 낀 중년 사내가 뛰어들었다. 북한의 중앙통신사 부사장이자 판문점 출입 기자인 이수근(당시 44세)이었다. 북측 경비병들이 승용차를 향해 총을 몇 발 발사했지만 그의 탈출을 막을 수는 없었다. ‘위장 간첩 이수근 사건’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그 후 2년 동안 이수근은 남한에서 잘 적응하는 듯했다. 그가 위장 전향을 했느니, 이중 간첩이니 하는 소문이 간간이 돌기는 했지만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다시 신문 1면을 장식한 것은 1969년 1월27일. 그는 가발·수염·안경으로 변장한 채 베트남 사이공 공항의 항공기 안에서 검거되었다. 2년에 걸친 ‘이수근 스토리’가 비극으로 막을 내린 순간이었다.

중앙정보부는 당시 이수근이 울산공단 등 산업시설 현황과 군부대 편제 등을 탐지하기 위해 위장 귀순했으며, 제3국을 거점으로 삼아 대남 파괴공작을 벌이기 위해 출국했다가 검거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진짜 귀순자였는데 남한 체제에 실망하고 제3국으로 도피하려다가 붙잡혔다는 주장도 있다.
13대 대통령 선거를 한 달도 남겨두지 않은 1987년 11월29일, 버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대한항공 858기가 공중 폭파되었다. 이 사건으로 민간인 1백15명이 사망했다. 하루 뒤 바레인 공항에서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라는 일본인 모녀가 범인으로 체포되었다. 둘은 모두 체포된 직후 음독 자살을 기도했으나, 딸은 살아 남았다. 이 여자는 한국으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던 도중 북한 특수공작원 김현희(당시 26세)로 드러났다.

김현희는 북한 외교관의 딸로서 평양외국어대학 일어과 2학년 때 공작원으로 선발되었으며, 7년 반 동안 해외 공작 전문 교육과 외국인화 훈련을 받았다고 국가안전기획부는 밝혔다. 붙잡힌 뒤 1주일 이상 일본인으로 행세하던 그녀가 서울 시민들이 사는 형편을 보고 마음을 돌려 여성 수사관을 향해 “언니 미안해”라고 말하며 눈물을 쏟아냈다는 당시 안기부 발표는 한동안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당시 안기부는 테러의 목적이 남한의 올림픽 단독 개최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천주교인권위원회와 희생자가족진상규명위원회 등이 7대 의혹을 제기하고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등 논란이 가시지 않고 있다.

1992년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에 터졌던 남한조선노동당 사건 역시 정치적 논란을 불러온 간첩 사건이었다. 특히 할머니 거물 간첩 이선실(당시 70세)의 존재는 진위 여부와 함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당국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선실은 북한 권력 서열 22위인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겸 대남 심리전 기구인 ‘한민전’ 부위원장 신분이었다. 그녀는 1980년 남파된 이래 신순녀라는 이름으로 주민등록까지 한 뒤 합법 신분으로 10여 년 거주하면서 국내의 간첩 조직을 지휘하다가 1990년 10월 남한조선노동당 총책인 황인오를 대동하고 북한으로 복귀했다고 당시 수사를 담당한 안기부는 밝혔다.

북한 스파이 가운데 가장 극적인 인물은 정수일(69)이다. 1996년 7월3일 안기부는 서울시내 플라자호텔 비즈니스센터에서 필리핀 국적인 단국대 교수 ‘무하마드 깐수’를 간첩 혐의로 검거했다. 그러나 조사 도중 그의 신분이 외국인 깐수가 아니라 남파 공작원 정수일인 것으로 확인되면서 충격을 주었다.

그는 중국 옌볜에서 출생해 베이징 대학 아랍어과를 졸업하고 1958년부터 5년 간 모로코 주재 중국대사관 2등서기관으로 근무하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는 1963년 북한으로 귀환하여 평양외국어대학 아랍어과 교수를 지내다가 1974년 9월부터 4년5개월 간 공작원 교육을 받았고, 레바논·튀니지·필리핀 등을 거쳐 1984년 4월 국내에 입국했다. 이어 단국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1990년부터 단국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교수 시절 각계 인사와 교류하고 일간지에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는데, 탁월한 아랍어 능력뿐 아니라 생김새와 몸집이 외국인과 유사해서 아무도 그가 북한 출신이라는 점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2000년 8·15 특사로 풀려난 뒤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학자로 돌아간 정수일씨는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번역하고 <이슬람 문명> <실크로드학> <문명교류사 연구>를 내는 등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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