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 냉담…말조차 잊은 영남
  • 대구·안철흥 기자, 부산·박병출 부산 주재기자 ()
  • 승인 2000.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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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민심, DJ 노벨상 수상 이후 ‘심리적 공황’ 상태 … 경기 침체·권력 상실감 복합 작용
DJ의 노벨 평화상 수상이 발표된 10월13일 저녁 민주당사. 박수와 만세 삼창이 한 차례 있었을 뿐 당사 안은 이상하리만큼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다. 당직자들은 텔레비전을 켜놓고 주변의 반응을 살피기에 바빴다. 그때 화면에 남산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장면이 잡혔다. 한 당직자의 입에서 “어떤 놈들이…”라는 소리가 낮게 새어 나왔다. 불꽃놀이는 한 기업이 주관한 노벨상 축하 쇼로 밝혀졌지만, 당직자들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같은 날 저녁 청와대. 박준영 대변인은 김대통령이 노르웨이에 직접 갈 계획은 없다고 발표했다가 DJ가 노르웨이 방송과 회견하면서 수상식에 참가하겠다고 밝히자 바로 번복했다. 닷새 후에는 여권이 추진하던 노벨상 기념 평화공원 계획안이 DJ 지시로 백지화하기도 했다.


물론 영남에도 노벨 평화상 수상을 반기는 사람이 없지는 않다. IMF 구제금융 상황에서 국가 경영권을 물려받아 경제난 극복에 시간을 보낸 김대통령이 레임 덕 현상을 극복하고 정권 후반기에 ‘소신 정치’를 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다. 김대통령의 임기중 숙제인 지역 갈등 해결에 거는 기대도 크다. 지역 감정에 관한 한 ‘피해자’로 인식되어 온 김대통령이 이제는 세계적 인물이라는 크고 당당한 처지에서 해법을 찾아 달라는 주문인 셈이다.

그러나 바닥 민심은 아직 차갑다. 부산 지역 사람들의 반응은 ‘애써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닫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당초 수상 가능성이 높게 점쳐질 때부터 부산 시민들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내치를 팽개쳐 둔 채 ‘장외 활동’으로 후보 반열에 오른 것이 무어 그리 대단하냐는 정도로 평가 절하했던 것이다. 수상 소식이 전해지고 난 후에도 ‘상 값은 북한에 지불하고 상은 노벨상위원회에서 받는다’는 비난이 많은 실정이다.

부산의 한 유력 일간지는 김대통령이 노벨 평화상 수상 이후 국정 운영 구상을 밝힌 지난 10월18일 ‘화합, 말로만 되나’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경제난 극복과 소외 계층 지원, 화합의 정치를 역설한 DJ의 간담회 발언과 ‘수상을 계기로 화합과 인권 개선을 위해 관련법을 제·개정하는 등 필요한 조처를 취할 것’이라는 민주당 서영훈 대표의 언급에 대한 반박이었다. 냉담하다 못해 비아냥거림에 가깝다.
5대째 대구 토박이라는 개인 택시 기사 김 아무개씨는 “그렇게 퍼주었는데 노벨상 안 탈 수 있나”라고 빈정거렸다. 대구에서 가장 큰 재래 시장인 서문시장에서 만난 50대 상인 이 아무개씨(여)는 “나라 팔아먹고 노벨상 받았다”라며 흥분했다. 그러나 대다수는 말이 없다. DJ를 왜 그렇게 싫어하느냐고 물으면 ‘그냥 싫다. 싫은 데도 이유가 필요하나’라는 식이다.

대구시 범어동에서 만난 김준곤 변호사는 이런 대구 분위기를 ‘민란 직전’이라고 표현했다. 민주당 경북도지부 박정영 사무처장은 “미운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기니 더 밉다는 정서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지금이 집권 이후 최악이라는 것이 박처장의 분석이다. 대책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서두를 것 없다. 어차피 이 정부에서는 표 얻기 힘들다. 다음 대선 때나 되어야 방법을 모색해 볼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대구참여연대는 지난 9월28일 한나라당 대구집회에 반대 성명을 냈다가 곤욕을 치렀다. 이틀 동안 사무실 전화가 불통될 지경으로 항의가 폭주했다. 성명서에는 ‘선거비용 실사 개입 의혹 및 한빛은행 불법 대출 관련 의혹 사건에 대해 특검제 실시를 강력히 요구한다’는 등 현정부를 비판하는 내용도 있었으나 대구 시민들에게 이는 구색 맞추기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너희들 DJ 2중대 아니냐’는 식의 항의가 대부분이었다. 대구참여연대 김중철 사무국장은 “지역에서 무슨 문제만 터지면 DJ가 대구를 죽이려고 그랬다는 식의 반응이 나온다. 반DJ 정서가 비이성을 넘어 집단 무의식으로 확산되고 있다”라고 우려했다. 가장 가까운 예가 지난 8월 말 지역 건설업체인 우방이 부도 났을 때다.

당시 대구 지역의 한 유력 일간지가 개설한 인터넷 토론방에는 ‘DJ가 대구 지역 기업을 다 죽인다’는 여론이 연일 올라왔다. 정길수씨는 ‘이 정부는 대구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다. 아예 대구를 지도에서 지워라’고 했고, ‘피눈물’이라는 ID를 쓴 한 시민은 ‘통일기금은 뭐고, 남북 경협은 뭔가. 나라 안 살림도 못해서 국민들 피눈물 흘리게 하면서’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이런 반DJ 분위기에 여론 주도층도 가세하고 있다. 지역내 중견 법조인인 서석구 변호사가 지난 9월21일 DJ의 개혁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시국 선언’을 냈을 때 변호사 1백29명이 동조 서명했다. 이 숫자는 대구·경북 지역 전체 변호사 2백75명의 47%에 이른다. 서변호사의 성명서는 지역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 사람 난 사람이다’라는 여론이 일었다고 이 지역 방송의 한 기자는 전했다. 경북대의 한 교수는 “노벨상 탄 것을 비아냥대는 교수도 많다. 한번은 동료 교수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어떻게 칠성시장 아줌마들과 교수들의 말이 어휘 하나 안 틀리고 똑같느냐’라며 핀잔을 준 일까지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런 반DJ 정서는 올해 들어 부쩍 심해졌다. 경제 불안이 불씨를 퍼뜨린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이는 현상적인 경제 지표로만 보면 이해하기 힘들다. 2000년 7월 기준 대구 지역의 중소기업 평균 가동률은 73.9%, 경북 지역은 71%이다. 이는 전국 평균 76.5%에 비하면 낮은 수치다. 그러나 IMF 때인 1998년의 59.7%(대구), 55.4%(경북)보다는 훨씬 좋아진 것이며, IMF 이전인 1996년의 70.6%(대구), 61.86%(경북)보다도 오히려 좋아진 것이다. 실업률의 경우 2000년 7월 기준 대구 4.3%, 경북 2.8%이다. 전국 평균 3.6%. 대구상공회의소가 펴낸 <대구·경북 경제동향> 최근호는 대구의 7월 중 산업 생산이 전월비 1.0%, 전년 동월비 1.1% 포인트 증가했다고 평가했다.

다만 이 지역의 주력 산업인 섬유와 건설이 급속히 몰락했고, 이것이 이 지역의 심리적인 공황 상태를 부채질하고 있다는 분석은 가능하다. 대구상공회의소 김규재 부회장은 “이 지역 경제는 1995년부터 불황이었다. 산업 구조적인 문제가 원인이다”라고 진단했다. 섬유산업은 수출도 안되고 채산성도 떨어졌다. 주택건설 경기도 바닥세이다. 이런 것들이 대구 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진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현정부가 책임질 일이 있다면 지역민들의 기대만큼 부응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역대 최악이라는 부산의 경제 상황도 경제 지표만으로 보자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7월 중 중소기업 평균 가동률이 75.0%. 전국 평균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으나, IMF 때에 비하면 양호해진 편이다. 그러나 부산의 실업률은 6.5%로 전국 최고 수준이다. 부산상공회의소가 펴낸 <부산 경제 동향 분석>은 이 지역의 경제 상황이 앞으로 더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하고 있다.
부산 경제가 침체에 빠진 가장 큰 원인도, 대구와 마찬가지로 낙후한 산업 구조를 제때 개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산은 그동안 신발·섬유, 수산, 선박 수리 등 영세한 중소기업이 밀집해 있었고, 이런 산업 구조는 IMF 관리 체제 이후 이 지역 기업들의 연쇄 도산을 불렀다.

영남 지역이 상대적으로 침체되어 있기는 하지만, 경제 위기가 영남에만 오는 것은 아니다. 영남 지역민들이 경제 위기 공포에 빠져들고 있는 배경에는 다분히 심리적인 측면이 작용하고 있다. 2000년 7월 기준 기업 경기 실사 지수(BSI)가 대구는 90.7, 부산은 95.6이다. 전국 평균 158.1에 비해 엄청나게 낮다. 기업 경기 실사지수는, 경기에 대한 기업인의 판단과 전망을 설문 조사해서 경기 동향을 파악하는 지표이다. 전체 응답 업체 중 호전했다고 답한 업체의 비율에서 악화했다고 답한 업체의 비율을 뺀 값에 100을 더해 산출한다. 그런데 이 지표의 특징은 기업인들의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판단이 개입된다는 점이다. 즉 영남 지역이 낮은 지수를 보인 것은 이 지역 기업인들이 상대적 위기 의식에 휩싸여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물론 기업인들의 의식에는 경기 침체를 우려하는 지역민들의 위기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런 위기 의식은 정권을 빼앗겼다는 상실감과 만나면서 증폭되고 있다. “영남 지역의 민심 이반 현상은 실물 경제 위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더 큰 것은 정신적인 공황이다.” 이종오 교수(계명대·사회학)의 분석이다. 김형기 교수(경북대·경제학)도 “영남 패권주의 몰락과 호남 정권 등장이 영남 민심을 자극했다. 여기에 현정부의 인사 정책에 대한 불만과 지역 경제의 어려움이 더해지면서 복합적인 상실감으로 나타나고 있다”라고 진단했다.

정권 교체에 따른 정신적 공백을 메우지 못한 것이 민심 이반의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종오 교수는 나아가 “DJ는 현재 영남 민심의 정체성을 설정하기 위한 목표물로 이용되고 있다. 지금의 반DJ 정서는 서양의 반유태주의와 비슷하다.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파시즘적 정치 문화가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라고 우려했다.

상실감은 교육 문제에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진단도 있다. “지금 대구 시내 일선 고등학교에서는 ‘경북대 가면 어떻게 하지’라는 말이 유행이다. 예전에 지역 명문으로 통했던 경북대가 이젠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인물 대망론·인재 대망론이 번지고 있다. 이런 것은 일종의 사회적인 병리 현상이다.” 김민남 교수(경북대·교육학)의 말이다. 이런 현상은 TK 정권이 물러난 1990년대 초반부터 싹트기 시작하더니 최근 급격히 늘어났다는 것이다.
영남 지역의 ‘퇴행적인 우경화’가 한국 민주주의의 불안 요소라는 데 이들 교수들은 의견 일치를 보고 있다. 이들은 ‘현명한 영남 정책이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현정부의 동진 정책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데도 이견이 없다.

이종오 교수는 정치 논리로 만드는 프로젝트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단기간에 표로 환산되지 않더라도 원칙과 도덕성을 갖춘 경제·사회 정책을 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구 토박이인 김민남 교수도 “영남에 대해 정치적 고려를 하지 말아야 된다. 그래야 정책다운 정책을 펼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김형기 교수는 “DJ는 15%의 개혁 성향 표는 방치해둔 채 전혀 불가능한 85%를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영남에서 5%만 더 얻겠다는 자세로 개혁 정책을 펴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개혁적인 지식인과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표를 의식하지 않아야 표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 정치인인 DJ에게 이상주의적인 처방은 실효가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DJ는 여전히 과거의 여권 세력을 동진 정책의 파트너로 삼고 있다. 그 결과는 보수적인 다수 여론의 외면과 개혁적인 소수 여론의 실망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국 현재의 영남 민심은 DJ를 화두로 보수적인 다수와 개혁적인 소수 모두 침묵 중인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침묵에는 웅변보다 더 많은 뜻이 담겨 있다
‘역사적인’ 노벨 평화상을 받고도 드러내 놓고 좋아하지 못하는 것이 현재 여권의 상황이다. 민심의 흐름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특히 영남 민심의 이반 현상은 두드러진다. 여론조사기관인 현대리서치연구소에 따르면, 1998년 12월 대구·경북 19.1%, 부산·경남 14.2%이던 민주당 지지율은 2000년 10월 현재 대구·경북 6.9%, 부산·경남 8.4%로 급락했다. 정책 지지도 급락은 더 심각하다. 한 예로 현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지지도를 보면 1998년 8월 60.8%(대구·경북), 71.2%(부산·경남)였던 지지율이 2000년 10월에는 각각 45.6%와 52.0%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서울 지역의 지지율이 58.7%에서 59.6%로 근소하게 오른 것과 비교하면 심각성을 알 수 있다.

동일한 정책 사안에 대한 조사 결과가 2년 사이에 특정 지역에서만 15~20%나 떨어진 것은 예전에 볼 수 없던 현상이라는 것이 여론조사기관 관계자의 반응이다. 그는 “영남 지역에서는 이미 여론조사의 사회적 기대치가 무너졌다. DJ가 하는 일은 모든 것이 다 싫다는 정서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라고 덧붙였다.

DJ는 집권 초부터 영남 지역 민심 달래기에 노력해 왔다.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에 경북 출신인 김중권씨를 임명했고,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지원하는 등 화해의 손짓을 멈추지 않았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유교문화권 사업을 적극 후원했고, 대구 섬유산업 회생을 위한 밀라노 프로젝트에 6천8백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런데도 집권 2년 반 만에 영남 지역 민심은 바닥을 친 것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나 노벨상 수상 소식에 이어 외교 올림픽으로 불리는 아시아·유럽 정상회의까지 열리는 등 축제 분위기가 계속되자, 지역 정서는 일종의 혼란에 빠졌다. 속내를 그대로 내보였다가는 잔칫상에 재 뿌리는 편협한 행동으로 비칠 테고, 억지 춘향 격으로 웃어주기는 싫은 불편한 심사가 엇갈리고 있다.

부산경제가꾸기시민연대의 한 간부는 “정부가 현대건설 채무 5조4천억원을 출자전환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방관하는 데 가까웠던 삼성차 해법과 너무 다르다. 지역 차별에다가 대북 사업 업체에 대한 특혜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라고 언성을 높였다. 고교 교사인 허 아무개씨(48)는 “노벨상 수상 후속 조처로 논의되고 있는 사안들을 보면 ‘모범적인 인권·민주 국가’ ‘긴장 완화와 교류 협력을 통한 새로운 남북 화해 시대 구현’ ‘악법 개정’ 등 크고 피상적인 내용 일색이다. 민생과 동서 화해 등 먼저 챙겨야 할 문제들에 대해 구체적 방안이 나오지 않는 것이 답답하다”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불만이라도 나타내는 경우는 그나마 낫다. 대다수 시민은 아예 ‘불만은 많지만 할 말은 없다’는 반응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 추락과 증시 폭락, 의약 분업 갈등 과정에서 드러난 무력함, 옷 로비 사건과 사직동팀의 대출 외압 청부 수사 등으로 정부가 능력과 도덕성 모두 불신받고 있는 상태에서, 현정부에 더 기대할 것도 요구할 것도 없다는 허무주의가 팽배해 있다.

대구도 겉으로만 보면 침묵 중이다. DJ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군데군데 걸려 있는 점도 다른 지역과 다르지 않다. 택시를 타거나 시장에 들러 일부러 물어보지 않는 한 사람들의 입은 열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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