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 북한, 타이완 `빅딜` 노린다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4.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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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중국의 타이완 정책에 협조하는 대신 중국은 미국의 북한 봉쇄 정책을 묵인 내지 협조하는 이면 협상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강대국들이 자기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짓는 ‘제2의
타이완과 북한을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이 이면 거래에 돌입했다는 징후들이 새삼 포착되고 있다. 미국이 중국의 타이완 정책에 협조하는 대신 중국은 미국의 대북 봉쇄 정책을 묵인 내지 협조하는 이면 협상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벌써부터 ‘제2의 가쓰라 태프트 조약’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냐며 우려하고 있다.‘가쓰라 태프트 조약’은 1905년 일본의 가쓰라 총리와 미국의 태프트 국방장관이 맺은 비밀 협정이다.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승인한 것으로 한반도가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타이완·북한을 둘러싼 미·중의 이면 협상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는 까닭은, 한 세기 전 미·일이 그랬던 것처럼 강대국들이 자기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3월20일 타이완 총통 선거를 전후해 타이완 해협에 긴장이 감돌고 제2차 6자 회담이 답보하는 상황 등이 맞물릴 경우 미·중 이면 협상이 한국에게도 발등의 불로 다가올 수 있다. 최근 정부의 고위 당국자는 “정부도 타이완·북한에 대한 미·중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라고 말해, 정부측도 대책을 강구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지난해 12월9일 원자바오 총리의 워싱턴 방문을 계기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 뭔가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음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 정부뿐 아니라 국내외의 많은 전문가들은 원자바오 총리의 방미가 교착 상태에 빠진 제2차 6자 회담 개최를 위한 돌파구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정작 부시·원자바오 회담에서는 6자 회담은 간데없고 주로 타이완 문제가 집중 거론되었다.

당시 타이완 문제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언급은 거의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원자바오 총리가 ‘베이징올림픽을 못하는 한이 있어도 타이완 독립을 저지하겠다’고 강한 어조로 말하자, 그의 발언에 맞장구치며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타이완 지도자들의 행위에 반대한다’고 직설적으로 덧붙였다. 취임 초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타이완을 중국의 침략으로부터 지키겠다’고 했던 입장에서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이다.

부시의 변신은 워싱턴 정가에도 충격이었다. 그러나 왜 갑자기 변했는지, 그 이유는 안개에 가려 있었다. 최근 들어서야 그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워싱턴 정가에 정통한 일부 전문가를 중심으로 ‘부시의 변신 뒤에는 대북 봉쇄를 위해 중국의 협조를 얻어내려는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치밀한 연출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추적에 따르면 ‘타이완을 미끼로 중국을 끌어낸다’는 네오콘의 구상은 지난해 11월20일 미국 상원에 ‘북한 민주화 법안’이 상정되면서부터 본격화했다. △탈북 난민 및 망명자 지원을 위한 예산 확보 △대량살상 무기와 마약 밀매 등에 대한 대응 체제 강화 △대북 경제 지원에 대한 규제 강화 등을 내용으로 한 북한민주화법안은, 한마디로 1989년의 동독 모델을 적용해 북한 붕괴를 유도하겠다는 네오콘의 전략이다.

그 중 핵심은 미국 내외의 인권단체와 탈북자 단체에 예산을 지원해 이들이 중국의 동북 3성을 헤집고 다니며 탈북자·망명자 들을 접촉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중국의 협조 없이는 이같은 ‘사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중국에 선물을 주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타이완 카드가 또다시 등장했다는 것이다. 워싱턴 소식통들에 따르면, 원자바오 총리의 방미는 미국이 타이완 문제에서 양보할 경우 중국이 북한 문제에서 양보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타진하는 시험 무대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미·중 양국의 거래가 성사 단계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어떤 내용을 주고받았을까. 미국측은 중국이 미국에 협조한다면, 미국은 천수이볜 타이완 총통의 독립 퍼레이드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과거 사례로 보아 중국이 평화적 수단을 통해 타이완을 통일한다면 미국이 이를 묵인할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시켰을 수도 있다.

그 대신 미국은 중국측에 대해 우선 미국 정보기관이나 인권단체가 중국 동북 3성 등에서 탈북자 지원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묵인 내지 협조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또한 앞으로 있을 제2차 6자 회담에서도 북한 핵 문제 해결의 전기가 마련되지 않을 경우 북한 핵 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상정하거나 PSI(대량살상무기 확산 저지 구상)를 강행하는 것에 중국이 협조해 주기를 요구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1일자 일본 <산케이 신분>은 ‘미국 정부는 오는 3월까지 북한 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유엔안보리 상정 및 PSI 발동 등의 강경한 수단을 강구할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미국의 ‘강경 수단’은 모두 중국의 협조가 있어야만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 네오콘이 중국과 거래를 시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1년 1월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규정한 후, 3월에 중국을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다. 또 제2차 북한 핵 위기가 일어난 직후인 2002년 말에서 2003년 초 사이에는 중국측에 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즉 중국측의 희망대로 김정일 정권이 붕괴하면 친 중국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고, 중국이 평화적 수단으로 타이완을 통일한다면 이를 묵인할 수 있다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중국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타이완과의 사이에 별다른 현안이 없었기 때문에 급하게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지난 연말 ‘외부 세력이 타이완의 주권을 위협할 경우 총통이 타이완의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를 제안할 수 있도록’ 규정한 국민투표법이 타이완 입법원을 통과했다.

천수이볜 총통은 이에 따라 오는 3월20일 총통 선거와 병행해 ‘2천3백만 타이완인을 겨냥하고 있는 중국의 미사일 5백여 기가 바로 타이완의 주권을 위협하는 외부 세력의 위협’이라며 국민투표를 강행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천수이볜의 국민투표 강행은 한편으로는‘2003년 국민투표에 대한 입법 완료, 2004년 국민투표 실시, 2006년 새 헌법 완성, 2008년 새 헌법 발효’의 순으로 타이완 독립을 달성하겠다는 자신의 ‘타이완 독립시간표’에 따른 것이다. 단순한 1회성 이벤트가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물론 중국의 안보를 위해서는 북한 문제도 매우 중요하다. 덩샤오핑도 1992년 ‘신냉전 문서’에서 ‘북한은 중국 동북 3성을 지키는 전략적 방벽’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러나 타이완 문제와 북한 문제가 동시에 터진다면 중국 지도부의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다. 베이징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한 중국 전문가는 “타이완 문제는 중국 지도부의 사활이 걸린 최우선 과제이다”라고 잘라 말했다(82쪽 딸린 기사 참조). 타이완이 독립하면 그 뒤를 이어 신쟝 위구르, 티베트 등 소수민족들이 들고일어나 중국의 분열이 시작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는, 천수이볜의 뒤에는 미국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시각이 팽배해 있다. 그렇다고 중국이 지금 미국과 정면 대결을 하기는 힘에 벅차다. 바로 이런 시점에 미국 네오콘이 중국 지도부가 가진 고민의 핵심을 찌르고 들어갔다고 할 수도 있다.

그동안 타이완과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를 둘러싸고 이해가 상충했다. 미국이 중국과 가까워지면 타이완이 위축된다. 반면, 미·중이 갈등을 빚으면 타이완의 입지는 확대된다. 일본 릿교 대학 이종원 교수는 “장제스 총통 이래 타이완 외교의 핵심은 미·중 관계에 분란을 조성하는 것이었다”라고 지적했다. 1995년 리덩후이 총통이 탄성 외교라는 미명 아래 미국 방문을 결행해 미·중 관계에 쐐기를 박은 것이 좋은 예이다.
천수이볜 총통이 ‘타이완 독립’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뽑아든 시기는 2002년 8월. “타이완과 중국은 일변일국(一邊一國;서로 다른 나라라는 뜻)이다”라는 발언을 하면서부터다. 반중국·친타이완 정책을 표방해온 부시 행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을 계기로 중국과 밀월 관계에 빠져든 이후이다. 중국의 경제적 성장이나 미·중 협조 관계 등을 볼 때 천 총통으로서는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는 생각을 했을 법하다. 또 타이완 독립이라는 카드는 2004년 3월의 총통 선거를 겨냥한 최상의 선거 전략이기도 하다. 중국 국무원 타이완 사무 판공실 장밍칭 부주임은 “천수이볜이 총통 선거를 겨냥해 본토를 대상으로 지하드(성전)를 부추기고 있다”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2004년 동아시아 정세의 풍운아로 등장한 천수이볜 총통의 행보는 크게 두 가지로 예상해볼 수 있다. 우선, 미국이 앞으로도 계속 천수이볜에 대해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경우. 미국이 중국의 협조를 받아 동북 3성에서 교두보를 확보한다면, 미국은 타이완 카드를 거두어들일 수 있다. 즉 3월20일 총통 선거에서 천수이볜이 재선되는 선에서 사태를 무마할 것으로 보인다.타이완이 미국을 믿지 못하듯이 북한 역시 중국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해 4월 베이징 3자 회담 때 중국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다. 자기들 편에 설 줄 알았던 중국이 오히려 미국 편에 서서 한반도 비핵화를 화두로 압박해왔던 것이다. 중국은 또한 북·미 양자 협상을 주선하겠다던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중국에 대한 북한의 불만과 의심은 결국 차기 회담 형식을 정하는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중국과 사전 조율 없이 불쑥 러시아를 끌어들여 6자 회담으로 끌고 간 것이다.

중국의 ‘변심’ 가능성에 대한 북한의 비책이 러시아 카드이다. 지난해 말부터 북한이 나진·선봉 승리화학공장의 재가동과 나진항의 현대화 작업을 러시아에 일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그 일환이라 할 수 있다. 나진항은 중국이 동해로 출항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러시아가 나진에 진출하면 중국의 동쪽 출구가 차단된다. 또한 러시아 함대의 남하로 인해 일본도 심각한 위협을 느끼게 된다. 나진항 카드는 중국과 일본을 겨냥한 북한의 비책인 셈이다.

오는 3월 타이완 해협의 정세는 북한의 선택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우선 앞에서 예상한 것처럼 천수이볜의 독립투쟁이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고, 미국이 동북 3성에 대북 교두보를 마련해 압박을 가하려 할 경우이다. 릿교 대학 이종원 교수는 “북한이 조용히 붕괴된다면 모를까, 버틸 힘이 남아 있는 한 핵실험이나 핵보유 선언, 또는 미사일 발사 등 국지적 소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라고 지적했다. 결국 한반도의 긴장 격화로 인해 중국도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천수이볜이 독자 노선을 택함으로써 타이완 해협 사태가 미·중 분쟁으로 발전하면, 양쪽 모두 한반도 상황이 안정되는 것을 필요로 할 가능성이 높다. 북한도 나름으로 여유를 찾을 수 있다. 남북 관계를 통해 핵 문제의 돌파구를 열어나갈 계기가 조성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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