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이회창 왕당파` 몰아낸다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4.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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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서청원·김기배 등 `눈물` 가능성 커…젊은층·법조계 인사 대거 공천
내분에 휘말려 있는 한나라당에 유일한 성역이 있다면 공천심사위원회다. 최병렬 대표 즉각 퇴진을 주장하는 ‘한나라당 구당모임’이나, 최대표가 명예롭게 퇴진하도록 해야 한다는 ‘영남권 의원 모임’이나, 이 점에서는 의견이 같다. 공천심사위가 공천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쥔 데다가, 이마저 흔들리면 당의 중심축이 무너져내릴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을 모두 공유하고 있다. 공천심사위는 지도부가 사실상 와해된 한나라당에서 유일하게 ‘힘’을 가진 조직이다.

공천심사위가 내분이 한창인 2월20일 31개 지역구의 단수 우세 후보를 발표한 것은 상징적이다. 공천 작업이 지도부의 진퇴 문제와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로 보인다. 구당모임을 이끌고 있는 원희룡 의원은 “어떤 경우든 공천심사위원회의 독립성은 존중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2월22일 현재 한나라당은 전체 2백27개 지역구 가운데 1백38개 지역의 단수 우세 후보를 확정했다. 62% 공천을 완료해 주요 정당 가운데 가장 발 빠르게 후보를 정하고 있다. 아직 최종 공천자가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이들을 공천자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공천심사위에 참여하고 있는 홍준표·이방호·이성헌 등 현역 의원 다섯 사람 가운데 지금까지 공천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배수진을 치고 공천 작업을 하는 것이다. 공천심사위원인 이성헌 의원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공천 작업을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소설가 이문열씨와 안강민 전 대검 중수부장, 강만수 전 재경원 차관 등 외부 인사 여섯 사람도 공천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공천이 가장 부진한 지역은 전남이다. 지역구 13곳 가운데 김상아 후보(여수) 등 불과 4곳의 후보만 확정되었다. 당 관계자들은 한나라당 지지 기반이 워낙 약하다 보니 공천하려고 해도 인물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반면 강원도는 9곳 가운데 7곳, 제주는 3곳 전부 공천을 완료해 가장 빠른 진도를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은 전지역을 △여론조사 제외 단수공천 △정밀 여론조사 실시 △경선 실시 △공개 면접·토론 등 네 갈래로 나누어 공천자를 정하고 있다. 고흥길 제1 사무부총장은 “공천 신청이 단수였거나, 교체지수가 1.0 이내여서 우수한 평가를 받은 경우, 다른 대안이 없는 경우는 여론조사를 하지 않고 단수 공천했다”라고 밝혔다. 단수 공천을 하지 않은 지역에 대해서는 주로 여론조사를 해 공천자를 정하고 있으나, 공개 면접·토론을 한 곳도 8곳이나 된다. 공개 면접·토론에서도 후보자를 정하지 못하거나 공천심사위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우 경선을 한다.

2월22일 현재 한나라당이 경선으로 후보를 정하기로 한 곳은 12곳이다. 2월26일 서울 강서 갑을 시작으로 당원과 비당원 비율을 1 대 9로 해 2천명 규모 안으로 선거인단을 구성해 경선을 치른다. 경선으로 후보를 정하는 방식이 여론의 호평을 받으면서 경선 지역이 늘어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지금 일정대로라면 한나라당 공천은 3월 초순쯤 완료될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 공천을 받은 사람들을 훑어보면 몇 가지 눈에 띄는 점이 있다. 우선 젊다. 공천심사위원인 이성헌 의원은 “공천자 평균 연령이 52세에 불과해 노인당 이미지는 사라졌다”라고 강조했다. 이의원은 대신 ‘장년당’이라고 표현했다.

법조계 인사들이 대거 공천된 것도 이색적이다. 공천된 사람의 20%인 27명이 법조계 출신이다. 최병렬 대표는 “변호사가 너무 많이 몰려와 걱정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강민구(서울 금천) 이영규(대전 서 갑) 유영하(경기 군포) 등 현직 검사 출신이 공천을 받은 것도 다른 당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현역 의원들이 잇달아 공천에서 탈락하는 것도 전에 없던 일이다. 이미 박승국·민봉기·이양희·권태망·박세환 등 현역 의원 5명이 공천에서 탈락한 데 이어, 앞으로는 수도권과 영남권에서 현역 의원 다수가 탈락할 것으로 보인다. 김문수 위원장은 “남은 지역의 현역 의원은 교체를 강하게 검토하고 있다”라며 강한 물갈이 의지를 내비친 바 있다.

특히 최근 대선자금에 대한 검찰의 출구 조사가 진행되면서 ‘이회창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가 갈수록 추락하고 있어 이들의 몰락은 시간 문제로 보인다. 지난 대선 때 대표를 지낸 서청원 의원은 물론 김기배·하순봉 의원 등 ‘이회창 왕당파’로 불렸던 의원들이 낙천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무능하고 부패한 사람, 대선 패배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공천에서 제외하는 개혁 공천 색채가 더 강해질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한나라당 공천을 받은 신진 인사 가운데 대중적인 인지도나 사회적인 비중을 따져볼 때 눈에 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비판도 불거지고 있다. ‘물갈이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영입에는 실패했다’는 말은 이래서 나온다. 인맥이 제한되어 있고, 경험이 많지 않은 김문수 의원이 영입위원장을 맡은 것부터 문제였다며 때늦게 후회하는 사람도 있다. 당 지도부는 이런 논란을 잠재울 생각으로 최병렬 대표가 불출마한 서울 강남 갑과 홍사덕 원내총무가 자리를 비운 서울 강남 을에 깜짝 놀랄 만한 참신한 인물을 영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최대표는 그동안 여러 인물을 접촉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올리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는 한나라당 공천 작업은 당 내분 사태가 전개되는 양상에 따라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박원홍·김무성 등 공천에 불만을 품은 의원들이 반 최병렬 전선에 대거 가담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공천심사위를 재구성하고 공천 작업을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천되지 못한 서울 지역 의원들은 지난 2월10일 대책 모임까지 가졌다. 반면 이재오·남경필·원희룡·정병국 의원 등 소장파는 잘하고 있다며 공천심사위를 옹호하고 있다. 지금은 ‘최병렬 퇴진’이라는 한 지붕 아래 있지만 공통 목표가 사라지면 이들 간에는 공천을 둘러싼 새로운 싸움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한나라당 공천 신청자 가운데 공천에 불만을 품고 당에 재심을 청구한 사람이 17명에 달하는 등 불만 수위는 이미 임계점에 육박하고 있다. 김홍만 대전 서 을 지구당위원장은 최병렬 대표를 상대로 ‘경선후보자 자격심사 처분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서울중앙지법에 내기도 했다. 공천 파열음이 가장 요란한 곳은 한나라당의 텃밭이라는 대구·경북 지역이다. 대구 동 갑 지역 유력 후보였던 임대윤 전 동구청장이 지난 2월16일 갑자기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고, 백승홍 의원, 이성수 전 대구시의회 의장도 탈당하는 등 친한나라당 성향의 무소속 출마자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한나라당은 가급적 빨리 선거대책위 체제를 출범시키고, 공천을 완료하는 동시에 공천자대회를 열어 본격적으로 총선 체제에 돌입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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