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시티그룹 태풍’이 분다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4.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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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자본과 세계 최고 인재로 무장한 세계 최우량 금융기관 씨티그룹이 한미은행 인수에 나섰다. 멕시코의 한 은행을 사들여 2년 만에 멕시코 금융 시장을 평정한 이 글로벌 금융기관은 한국을 ‘전략적 우선
세계 최대·최우량 금융기관 씨티그룹이 국내 금융 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씨티그룹은 지난 2월23일 한미은행을 인수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국내 시장을 석권하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데릭 모건 씨티그룹 회장은 “우리는 멕시코 바나멕스 은행이나 폴란드 한드로이 은행를 인수해 해당 국가에서 거둔 실적을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이뤄낼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을 전략적으로 우선 순위에 올라 있는 지역이라고 덧붙였다.

씨티그룹은 2001년 8월 멕시코 바나멕스 은행을 1백25억 달러(약 15조원)에 인수했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서 있었던 최대 규모의 합병·매수 계약이었다. 씨티그룹은 인수한 지 6개월이 지나기 전에 씨티 은행 멕시코 지사와 바나멕스 은행을 통합했다. 새로 출범한 바나멕스 은행은 현재 대도시 위주로 1천4백27개 지점과 4천4백92개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운영하는 멕시코 최대 은행이 되었다.

바나멕스 은행, 최고 은행에 주는 상 휩쓸어

바나멕스 은행은 명실공히 씨티그룹이 개발도상국에 진출해 거둔 최대의 실적으로 거론된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가 발행하는 금융 전문지 더 뱅커는 바나멕스를 ‘2003년 올해의 멕시코 은행’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이 은행은 지난해 이 상 외에 금융 전문 기관이 최고 은행에 수여하는 상 5개를 휩쓸었다. 미국에 비해 뒤떨어진 금융 시장에서 바나멕스는 2년 만에 씨티그룹 글로벌 네트워크의 지원을 받아 세계 최고의 상품과 첨단 금융기법으로 멕시코 금융 시장을 평정한 것이다.

씨티그룹은 바나멕스 은행을 인수하기 6개월 전인 2001년 2월 폴란드 한드로이 은행을 인수했다. 2002년 11월 씨티 은행 한드로이로 이름을 바꾸면서 기업 금융에 몰두하고 있다. 씨티그룹은 대출의 90%를 기업에 집중하고 있지만, 현지 소매 금융 시장이 커질 것으로 보이자 한드로이를 동유럽 시장 공략의 전략 거점으로 키우고 있다. 한드로이 은행은 또 폴란드 카드 시장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폴란드 시장이 워낙 위축되어 있어 기대 밖으로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총자산액 기준으로 폴란드에서 네 번째 은행이고, 폴란드 전체 은행 수신고의 13.3%를 차지하고 있어 성장 잠재력이 큰 은행으로 평가받는다.

씨티그룹은 ‘제2의 바나멕스 신화’를 한국에서 이루어내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씨티그룹은 3조1천8백억원을 들여 한미은행을 인수하겠다는 것이다. 씨티그룹은 국내 6위의 시중 은행을 인수하면서 기존 씨티 은행이 보유한 12개 지점에다 2백22개 지점을 추가로 보유하게 되었다. 국내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영업망 부족을 일거에 해결하는 셈이다. 그런데 기존 한국 씨티 은행과 한미은행이 가진 경쟁력을 산술적으로 더한 것만으로 씨티그룹의 국내 경쟁력을 평가할 수는 없다.
전세계에서 영업하는 씨티그룹 인터내셔널은 지난해 매출 7백74억 달러(약 92조8천8백억원), 순수익 1백78억5천만 달러(약 21조4천2백억원)를 기록한 ‘금융 공룡’이다. 매출 규모는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14.6%에 이르고 순수익은 한국 국방비보다 많다. 전세계 1백2개 국가 3천4백개 지점에서 고객 5천6백만명과 신용카드 가입자 6천5백만명을 확보하고 있다. 씨티그룹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소개되는 모든 금융 상품은 한미은행 창구를 통해 국내에 소개될 것이다. 한미은행 고객은 한국에 앉아서 중남미·아프리카·중국 시장에서 벌어지는 사업에 투자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국내 금융기관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씨티그룹이 풍부하게 가진 상품 종류와 투자 기법이다. 국내 시중 은행과 씨티 은행의 상품 경쟁력을 비교해보자. 국내 시중 은행 한 곳을 찾아 금융 자산 2억원을 예치하고 투자할 만한 곳을 물어보았다. 영업점 차장은 부리나케 몇 가지 상품 소개 책자를 들고 와 고객에게 상품을 소개했다. 고객 상담 부스가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아 금고 옆 의자에 앉아 영업점 직원이 소개한 상품 수는 다섯 가지로, 국·공채, 회사채, 주가지수 연계펀드 정기예금, 보험이 전부였다.

같은 투자금액을 갖고 씨티 은행 여의도지점을 찾았다. 그랬더니 은행측은 바로 골드 회원으로 분류한 뒤 미국에서 자격증을 딴 투자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했다. 자기 사무실에서 기자를 맞은 이 투자상담사가 제시한 상품 수는 100여 개.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국 시장은 물론 중국·동남아시아·중남미·아프리카 등 전세계 1백2개 국가에서 운영되는 모든 상품을 나열했다. 또 금이나 광물 연계 상품이나 펀드에 투자하는 펀드까지 종류가 다양했고 투자 수익률도 연 10%에서부터 87%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상담이 끝날 무렵 고객의 투자 성향에 따라 적절한 투자 포트폴리오까지 만들어 제시했다.

씨티그룹은 끊임없이 첨단 금융 상품을 개발하면서 세계 금융산업을 이끌고 있다. 씨티그룹은 1928년 투자신탁(뮤추얼펀드) 개념을 처음 도입했다. 국내에서도 개인자산관리 프로그램인 PBG(Private Banking Group)를 처음 도입했고, 국내 최초로 1년 3백65일 24시간 ATM 서비스를 제공했다. 또 3백65일 24시간 폰뱅킹 서비스도 처음 실시했다.
씨티그룹이 가진 또 하나의 강점은 업계 최고의 인재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의 경쟁력은 궁극적으로 임직원의 능력 차이로 판가름 난다. 국내 은행들은 인재 발굴이나 양성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갖추고 있지 않다. 이와 달리 씨티그룹은 미국 ‘톱10’에 속하는 경영대학원(MBA) 출신자들을 차장(assistant manager) 급으로 입사시켜 최고의 금융 전문가로 양성한다.

씨티그룹이 운영하는 인재 양성 프로그램은 MAP(Management Associate Program). 우수 인재를 조기에 선발해 12개월 동안 금융·기술·사업 부문 첨단 지식과 실무를 함께 익히게 하고, 자국뿐만 아니라 외국 동료들과 공동 작업을 수행하면서 세계 금융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3개월 단위로 주요 부서를 세 군데 돌면서 팀 단위로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MAP를 성공적으로 마친 인재들은 씨티그룹이 보유한 독특한 조직 구조에 통합된다. 매트릭스 시스템이라고 불리는 이 조직 운영 체계는 한 가지 프로젝트나 업무를 지점 내 상급자와 지역 본부 담당 상급자에게 동시에 보고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한 가지 프로젝트를 두세 곳에서 동시에 체크하다 보니 업무 평가가 객관성을 확보하게 된다. 김찬석 씨티그룹 홍보이사는 “임직원들은 매트릭스 시스템을 통해 개인의 업무 처리 능력이 정실이나 인간 관계보다 업무 처리 실적에 따라 공정하게 평가될 것이라고 믿고 프로젝트에 열성적으로 매달리게 된다”라고 말했다.

매트릭스 시스템은 프로젝트의 위험도도 크게 줄이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프로젝트의 위험도를 몇 곳에서 나누어 평가하게 되므로 그만큼 리스크 관리가 쉬워진다. 업무 추진 과정에서 필요하면 프로젝트 담당자와 상급자, 지역본부 담당자와 상급자가 모두 참여하는 컨퍼런스 콜이나 화상 회의를 열어 현지 실정과 세계 금융 흐름과 관련한 정보와 의견을 교환한다. 예를 들어, 국내 주가지수 연계 선물 상품의 포지션을 놓고 의사 결정을 해야 할 때 해당 선물 상품 담당자와 관리자는 아시아태평양 선물 담당자와 관리자와 함께 화상 회의를 연다.

하지만 미국 뉴욕 본사나 지역본부가 지점 단위의 조직 운영에 과도하게 개입하지는 않는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현지화를 추진한다. 씨티그룹이 추진하는 현지화 전략은 ‘임베디드 시스템(embedded system)’. 홍콩과 싱가포르에 본점을 둔 씨티그룹 아시아태평양본부는 직원(1만5천명)의 98%가 현지인이다. 또 진출 국가가 경제 위기에 처하거나 대규모 자본이 소요되는 사회간접자본 프로젝트를 추진하면 과감하게 투자를 감행한다. 차드와 카메룬을 잇는 대규모 송유관 건설 사업이나 인류 역사상 최대 역사라고 일컫는 중국 싼샤 댐에 거액을 투자하고 있다.

또 한국이 1998년 외환 위기를 겪을 때 씨티그룹은 해외 채무 재조정 작업에 깊이 관여하면서 한국이 외환 위기에서 벗어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윌리엄 로즈 씨티그룹 부회장은 이 공로로 한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헌재 경제 부총리는 “개인적으로 영국 스탠더드차타드 은행과의 (한미은행) 인수 경쟁에서 씨티그룹이 이긴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1997년 말 외환 위기로 국내 은행들이 외국과 신용장(LC)을 개설하지 못할 때 씨티은행은 가장 먼저 국내 은행에 LC를 개설해줬다”라고 말했다. 또 2000년 부도 위기에 처한 하이닉스를 구하기 위해 씨티그룹 산하 샐러먼스미스바니는 차입 주간사로서 8천억원 규모의 국내 신디케이트론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씨티그룹을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64쪽 상자 기사 참조)’에 기초해 세계 지배 전략을 펼치는 미국의 대표 금융 자본으로 보고 있다. 심지어 씨티그룹은 개발도상국 경제가 위기에 빠지도록 뒤에서 조작한 후 해당 국가의 위기 극복 과정에 개입하면서 막대한 차익을 챙긴다는 견해마저 나온다. 주로 개발도상국들이 경제 위기와 회생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씨티그룹을 비롯한 미국 월 스트리트 자본이 큰 이익을 챙기는 사례가 많아지자 중남미나 동남아시아 금융 전문가 사이에서 불거지는 음모론이다.
어쨌든 씨티그룹의 선진 금융기법과 현지화 전략은 국내에서 실적 향상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3/4분기 총자산 11조2천억원, 순이익 4백20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는 총자산 11조8천억원에 순이익은 9백26억원. 씨티 은행은 국내 3개 도시에 12개 지점밖에 없지만 지난해 말 지점당 평균 수신고는 5천억원이 넘었다. 반면 국내 시중 은행의 지점당 수신고는 1천억원에 불과했다. 씨티 은행은 또 한국생산성본부 국가고객만족도 조사에서 1998∼2003년까지 6년 연속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국내 은행들은 씨티그룹의 한미은행 인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영업 규모와 서비스 수준이 워낙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내 소매 금융 시장이 빠르게 잠식당할 것은 눈에 보듯 훤하다. 국내 한 시중 은행의 전직 임원은 “씨티 은행은 그동안 영업점이 적어 한국 금융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제한적이었지만 한미은행을 인수하면서 달리는 말에 날개를 단 격이 되었다. 한국 금융기관들이 정신을 차려 경쟁력을 높이지 않으면 국내 금융 시장은 씨티은행의 빨간 우산 안에 파묻힐 것이다”라고 말했다.

위기가 기회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재경부는 국내 금융기관들이 선진 금융기법을 전수받아 한국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다. 심지어 씨티그룹이 국내 금융 시장의 안전판 역할을 하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다. 위기인가 기회인가를 가름하는 열쇠는 국내 금융기관이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처럼 안이한 서비스로 일관한다면 씨티그룹은 국내 금융산업에 위협 요소가 될 것이고, 적극적으로 선진 금융기법을 받아들여 경쟁력을 높인다면 한국 금융산업이 한 단계 도약하는 데 자극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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