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후 세계도 미국이 지배한다”
  • 박성준 기자 (snypesisapress.com.kr)
  • 승인 2004.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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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한 세대가 지난 30년 뒤의 세계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시사저널>은 아시아·유럽 지역의 국제 정치 및 안보 전문가 12명을 상대로 ‘가까운 미래’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죽음은 그의 대통령 재임 시기를 전후로 해체되기 시작한 냉전 체제가 이제 완전히 역사책의 한 장에 편입되었음을 알린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의 한 격언대로 ‘가장 확실한 것은 미래’일 뿐이다. 과거는 현재의 입장에서 해석되기 때문에 유동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미래에 살아 남는 과제가 움직일 수 없는 지상 과제라는 의미일 것이다.

<시사저널>이 ‘30년 후의 세계’를 미리 짚어보는 특집을 마련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왜 ‘30년 후’인가. ‘10년 후’는 의미 있는 변화를 짚어내기에는 현재와 너무 가까이 있다. ‘30년 후’는 세대와 세대가 공존하며 호흡을 느낄 수 있으면서도 변화의 결과를 비교적 뚜렷하게 실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래를 점쳐보기에 적당한 시간 단위일 것이다.

<시사저널>은 ‘30년 후의 세계’를 전망하면서, 아시아와 유럽 지역의 상호 이해를 돕는 지적 교류 작업을 해온 아시아유럽재단(ASEF)의 도움을 받았다. <시사저널>은 아시아유럽재단이 추천한 아시아·유럽 지역의 국제 정치 및 안보 전문가 12명에게 네 가지 문항을 e메일로 발송했다. 이것을 <시사저널>이 다시 취합해, 특집으로 엮었다.

<시사저널> 특집에 흔쾌히 응해준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다(일부는 신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요청에 따라 익명으로 처리했다).

<시사저널> 설문에 응답해준 전문가들

하인츠 가트너(오스트리아 국제문제연구소 교수·오스트리아 비엔나) | 티모 키비마키(노르딕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덴마크 코펜하겐) | 데위 포르투나 안와르(인도네시아 과학원 사회과학 분야 부원장·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페터 비고 야콥슨(덴마크 국제문제연구소 안보분쟁연구과장·덴마크 코펜하겐) | 이케가미 마사코(스톡홀름 대학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소장·스웨덴 스톡홀름) | 이서항(한국외교안보연구원 교수·대한민국 서울) | 스벤 비숍(왕립국제관계연구소 선임연구원·벨기에 브뤼셀) | 필립 에버츠(라이든 대학 교수·네덜란드 라이든) | 이노구치 다카시(도쿄 대학 동방문화연구소·일본 도쿄) | 우토 베사(탬페레평화연구소 사무총장·핀란드 헬싱키), 그 외 프랑스인 1명·오스트리아인 1명.

‘세계는 이미 1945년부터 시작한 콘트라티예프 주기의 마지막 하강 운동 국면으로 접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1450년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자본주의 세계 경제 체제로 볼 때도 마지막 단계인 위기의 시기에 진입했다.’ 세계적인 경제사가 임마누엘 월러스타인의 최근 주장을 예로 들지 않아도, 세계가 혼란스러운 이행기에 접어들었음은 분명하다.

그것을 실감할 수 있는 사례는 부지기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원할 것만 같았던 미국과 유럽의 이른바 ‘대서양 동맹’은 양쪽이 모두 치유책을 마련하기 위해 부심할 정도로 심각한 분열상을 드러내고 있다. 한때 미국과 자웅을 겨루었던 옛 소련이 체제 대결에서 패해 뒷전으로 물러앉은 것은 이미 10년도 더 된 이야기다.

그 사이 자신만의 안전을 추구했던 중국이 ‘죽의 장막’을 걷어치우고 세계 질서의 중심 무대에 등장한 것 또한 20년 가까이 되었다. 유럽은 ‘하나의 유럽’으로 통합되고 있다. 세계 안보상의 공통된 위협은 강대국간 핵 전쟁 가능성에서 ‘불량 국가’의 대량살상무기로 바뀌었고, 국가간 분쟁보다 테러 단체의 비대칭 공격이 훨씬 더 중대한 안보 위협으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의 지정학 또는 지경학(geoeconomy)만 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 대륙과 중국·인도에서는 총이나 탱크보다 에이즈를 비롯한 질병이 더 무서운 존재가 되고 있다. 레이철 카슨이 <침묵하는 봄>을 통해 환경 재앙을 경고한 지 30년도 되지 않아, 기후 변동과 이에 따른 각종 기상 이변 및 재난은 지구의 생명 그 자체를 단축시킬 정도로 가공할 위협이 되었다. 그뿐인가. 2002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세계환경정상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로 떠오른 것은 세계의 물 부족 사태였다.

지금부터 한 세대가 지난 뒤 세계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변모해 있을까. <시사저널>은 아시아유럽재단과 함께, 아시아·유럽의 국제 관계 및 안보 전문가 12명으로부터 그에 대한 답변을 들었다. <시사저널>이 이들에게 던진 질문은 크게 네 가지였다.

첫째, 역사의 긴 안목에서 세계사는 패권의 역사라는 전제 아래 ‘30년 뒤 세계를 지배할 초강대국은 어디인가’를 물었다. 둘째, 안전은 곧 위협에 대한 예방과 조기 대처를 위한 노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관점에서 ‘30년 뒤 인간을 위협할 최대의 위협’을 물었다. 셋째, 인간의 삶은 주로 물질적 조건이 결정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네 가지 자유’를 논하면서, 그 중 하나로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꼽았다. <시사저널>은 이같은 주장을 조금 비틀어 ‘30년 뒤 인간 생활에 가장 중요하며 필수적인 자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30년 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은 어디인가’를 물었다.

강대국 패권 경쟁으로 ‘제2의 냉전’ 올 수도

네 가지 질문은 모두 인류 전체의 가까운 미래와 관련 있으며, 한국의 미래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강대국 세력 판도의 교차 지점에 위치한 한국은 세계 패권의 추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국은 또 세계에서 군사적으로 긴장도가 가장 높은 지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세계의 위협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주시해야 한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에 속해 있으며, 지구 생태계의 한 구성원인 한국으로서는 30년 뒤 가장 필요한 재화가 무엇이 될지, 기후 변동으로 인한 재해 가능성이 얼마나 높아질지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다.

첫번째 질문, 즉 30년 뒤 세계를 지배할 초강국은 어디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많은 응답자들은 ‘미국’을 꼽았다. 이같은 결과는 임마누엘 월러스타인이 지난해 펴낸 책 <미국 패권의 몰락>(최근 창작과 비평에서 번역판이 나왔다)에서 ‘미국 군사력 한계’ ‘반미 감정’ 등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미국 패권의 몰락을 자신 있게 단언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오스트리아 국제문제연구소의 하인츠 가트너 교수는 ‘미국이 비록 과거 헤게모니 국가와 운명을 함께 하는 상황임을 가정해도, 역사는 (그런) 몰락의 과정이 최소 100년은 지속된다’면서 30년 뒤에도 미국이 초강국으로 남아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덴마크 국제연구소의 페터 비고 야콥슨 박사는 월러스타인 교수의 논의와는 정반대로 ‘미국은 현재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군사력, 바로 그것 때문에’ 30년 후에도 세계 최강으로 남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앞으로 30년 안에 미국의 군사력을 따라잡을 나라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 도쿄대학 동방문화연구소의 이노구치 다카시 교수 역시 오늘날 미국이 세계 전체 무기 연구개발비 지출의 85%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30년 뒤도 역시 미국의 세기’라고 내다보았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다른 답변도 있다. 지난 5월1일 확대된,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확대될 유럽연합이 30년 뒤 세계 패권 국가로 등장할 것이라고 답한 학자가 세 사람이었다. 최근 들어 한국에서도 외교 우선 순위를 어디에다 둘 것이냐를 놓고 부쩍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중국을 꼽은 학자(2표)도 있었으며, 인도를 꼽은 학자(1표)도 있다.

이도저도 아닌 답을 내놓은 전문가도 있다.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의 이케가미 마사코 박사는 앞으로 ‘패권국 하나가 전세계를 지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미국은 오늘날의 유럽연합처럼, 점점 더 내부 문제에 몰두하게 될 것이며, 대중화권은 중국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현재 미국이 누리는 식의 패권국 지위로 올라서지 못하거나, 미국과 헤게모니를 다투면서 ‘제2의 냉전’을 연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케가미 박사는 유력한 세계 최강 후보로 중국 외에도 러시아·인도·유럽연합을 꼽았지만 뜻밖에도 일본은 없다. 그녀는 또 ‘제2 냉전’ 발발의 가능성을 중국이 첨단 무기나 핵 기술 등 민감한 기술을 다른 나라에 제공해 블록을 만들 경우로 한정함으로써, 중국의 행동에 좀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아시아유럽재단과의 공동 설문 조사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사항은 ‘30년 후의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 어디인가’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시사저널>은 질문 요지를 부연하면서 ‘현재의 긴장 지역’으로 중동, 타이완 해협, 그리고 한반도를 보기로 들었다. 응답의 결과는 중복 응답을 포함해 중동이 가장 위험하다고 답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도표 참조).

하지만 ‘30년 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사하라 이남 지역(보통 ‘서브 사하라’로 부름)을 포함해 ‘아프리카’라고 답변한 학자도 적지 않았다(모두 5표). 덴마크 노르딕아시아문제연구소의 티모 키비마키 박사는, 아프리카에서 빈발하는 내전이 인구당 희생자 수가 가장 많다는 측면에서 아프리카가 가장 큰 분쟁 지역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인츠 가트너 교수 역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아프리카를 꼽은 응답자에 속했는데, 그는 내전 외에 문맹률·빈곤·광물 자원·재래식 무기 유통 등을 근거로 들었다. 이같은 근거의 대부분은 국제 정치학에서 규정하는 ‘실패한 국가’의 주요 기준이다. 다시 말해 아프리카에는 실패한 국가가 많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가트너 교수의 예측 근거 중에는 ‘광물 자원’이 눈에 띈다. 광물 자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최근 주목되고 있는 석유와 천연 가스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를 다른 답변과 대비해보면 사태는 더 분명해진다.

예컨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중동을 꼽은 응답자의 상당수는 그 이유를 ‘석유 전쟁의 변함없는 격전지’로 들었다. 인도네시아과학원의 데위 포르투나 안와르 박사는 한반도와 타이완 해협을 둘러싼 ‘양안 갈등’의 장래는 낙관적으로 보는 반면, 중동의 위험도를 크게 보고 있다. 즉 ‘한반도나 중국·타이완 문제는 30년 안에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반면, 중동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석유와 물 등 자원 문제, 정치 불안과 종교 분쟁이 얽혀 있어 해결이 난망하다’는 것이다.

30년 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한반도를 지목한 경우는, 스톡홀름 대학의 이케가미 마사코 박사가 유일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북한은 사실상의 핵 국가가 될 것이며(그녀는 이를 ‘이스라엘 시나리오’라고 지칭한다), 이로 인해 동북아는 물론 중동에까지 영향을 미쳐 핵 확산의 무정부 상태가 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석유를 비롯한 자원 문제는 다른 질문에서도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30년 후 가장 필요한 자원’을 묻는 질문에, 가장 많은 응답자가 석유를 비롯한 에너지원이라고 답했으며(도표 참조), ‘30년 후 인류의 최대 위협’을 묻는 질문에서도 에너지 위기를 꼽는 대답이 나왔다. 핀란드의 템페레평화연구소 우토 베사 박사는 ‘대체 에너지 개발에 돌파구가 열리지 않는 한, 에너지가 가장 필요한 자원이 될 것’이라고 답했으며, 동시에 석유 자원과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중동이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반해 한국 외교안보연구원 이서항 교수는 석유 등은 대체 에너지 개발이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보며 ‘물 위기’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더 나은 세계’로 가는 출구는 없는가

2001년 9·11 이후 미국은 앞으로 인류가 해결해야 할 최대의 위협으로 ‘테러’와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꼽고 있지만, 이번 조사 결과는 이같은 인식에 다소간 편차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30년 후 최대의 위협’을 묻는 질문에 ‘대량살상무기’라는 답이 가장 많이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테러리즘’ 항목과 똑같은 수로 ‘기후 변동에 따른 환경 위기’라는 답이 나왔기 때문이다(도표 참조). 총칼보다 기상 이변이, 또 이에 따른 재난이 더 무서울 수 있음은 이미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생태계 변화에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벨기에 왕립국제관계연구소의 스벤 비숍 박사는 30년 후 인류가 당면할 최대 위협이 ‘빈부 격차’라고 답했지만, 실제 이유는 환경 위기와 무관치 않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격차는, 경제적인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법 질서·민주주의 제도·깨끗한 환경·사회 복지에 얼마나 접근할 수 있느냐는 것도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이같은 측면에서 빈부 격차는 통제 불가능한 정치적 극단주의를 부추기고 세계 질서를 위협한다고 지적했다.

궁극적으로 이번 설문조사 결과는, 30년 뒤의 세계가 현재의 상황보다 더 악화하면 악화했지 개선될 여지가 매우 적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더 나은 세계’로 나가기 위한 출구는 없는가. 이케가미 마사코는 ‘하나의 초강대국이 아닌, 다수 강대국들의 집단적 리더십 아래 공동의 위협과 위기·필요에 대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공동의 이해를 위해 하나로 뭉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이번 설문조사가 조사 대상의 지역적 편중성, 응답 수의 분명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결과를 얻었다’고 여겨지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인류의 더 나은 삶을 위한 ‘최소 공배수’는 결국 협력이라는 사실을 이번 조사는 일깨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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