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신군부 찬양한 쿠데타 나팔수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1995.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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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18 당시 언론들, 전두환 선전지 전략 · 권언유착 고착화
문명기ㆍ이취성ㆍ이성근ㆍ이종형ㆍ이광수ㆍ최 린ㆍ홍순복ㆍ정국은, 이 8명은 광복 직후 반민특위 심판대에 올랐던 언론인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일제 통치기구에서 요직은 지낸 언론인도 있고, 경찰 밀정 혐의를 받은 언론인도 있다. 그후 50년 가까운 세월이 훌렀다. 지난 11월24일 정부는 5ㆍ18 특위의 심판대에 언론인은 과연 몇 사람이 오를 것인가. 이 심판대에 오를 자들의 죄목은 무엇인가. ''쿠테타 정권''에 부역한 죄?광주 민중을 폭도로 규정한 죄?집권자가 흘리는 ''단맛''에 팔려 국민의 눈과 귀를 막아 버린 죄? 이들 죄목에서 상당수 언론인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데 우리 언론사의 비극이 있다.

12ㆍ12와 5ㆍ18을 거쳐 신군부가 정권을 확고히 장악하게 되기까지 언론과 신군부는 세 단계의 관계 변화를 겪는다.

첫 벗째 단계는 12ㆍ12에서 5ㆍ18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잔잔한''대치 국면이다. 10ㆍ26이후 언론계 내부의 최대 관심사는 75년 유신 정권 아래서 강제 해직된 조선ㆍ동아 투위 언론인들의 복직 문제였다. 계엄령이 내린 시절이라 언론 검열이 있었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당시만 해도 민주화가 곧 이루어지리라는 낙관적 전망이 사회 전반에 충만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80년 3월 들어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다. 언론인들은 기자협회를 중심으로 일관성 없는 검열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검열 철폐와 자유 언론 실천''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단계는 5ㆍ18에서 언론인 대량 숙정이 마무리된 8월까지 갈등이 최대로 증폭된 시기이다. 숙정은 5월17일 쿠데타 직후 기자협회와 조선ㆍ동아 투위 핵심 간부들이 체포된 후 6월9일 광주항쟁을 취재한 기자와 <경향신문>기자 8명이 유언비어 유포와 반공법 위반 혐의 등으로 계엄사에 연행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기는 이미 5공 청문회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80년 4월 전두환 중정부장서리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전직 언론인 허문도씨가 군부와 언론계를 누비며 언론인 숙정 계획을 거의 마무리한 시점이기도 했다.
언론인 7백17명이 ''학살''당하는 동안 한켠에서는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은 광주항쟁을 다루는 언론의 태도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도청 진압 이틀 전인 5월25일 <ㅈ일보>의 광주 스케치 기사 한 대목이다. ''고개의 내리막길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고 그 동쪽 너머에 ''무정부 상태의 광주''가 있다. 쓰러진 전주 각목벽돌 등으로 처진 바리케이드 뒤에는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엇이 멀리서 보였다.''

한켠에서 동료들이 구속되어 고문당하는 동안 다른 한켠에서는 계엄군이 쳐놓은 바리케이드를 넘지 않은채 계엄군이 설명하는 용어와 상황을 그대로 받아 적은 기사가 실리는 현실. 여기서 이미 언론의 ''포복''은 시작되고 있었다.

광주를 ''성공적으로''진압한 후 신군부가 국보위를 통해 실세를 확고하게 장악해 가면서 온론은 이들의 ''체제 구축 시나리오''에 발맞추기 시작했다. 광주항쟁 직후 온 사회가 공포 분위기에 얼어붙어 있을 때 각 신문 사회면은 ''무질서''와 ''무법천지''를 고발하는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국보위는 곧 ''삼청교육대''로 이에 화답했다. 입시 교육과 과외 열풍이 논란이 되면 곧 국보위의 교욱 정상화 조처가 뒤따랐다. 공직자의 부정부패와 기강 해이를 문제 삼으면 곧 국보위는 ''고급 공무원 숙정'' 조처를 발표했다. 우연의 일치라고만은 볼 수 없는 이같은 상황은 물론 언론이 신군부의 요구를 앞장서 수용함으로써 연출됐다. 어느 언론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언론들 앞다투어 ''용비어천가''

세 번째 단계인 ''밀월기''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기자에 대한 숙정을 끝내고 신군부와 결탁 관계에 들어선 언론은 ''전두환 이미지 메이킹''으로 확실한 밀원 관계를 구축했다. 시간상으로는 <경향신문>이 가장 먼저였다. 이 신문은 8월19일부터 4회에 걸쳐 ''새 역사 창조의 선도자 전두환 장군'' 이라는 시리즈를 연재했다. 전역도 하지 않은 현역 군인이 ''새 시대 새 영도자''로 둔갑한 셈이다. 이후 ''역사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의 30년''(<중앙일보>), ''우국충정 30년-군 생활을 통해 본 그의 인간관'' (<동아일보>), ''전두환 장군 의지의 30년''(<한국일보>) 등 거의 모든 언론이 뒤를 따랐다.

전두환씨가 제1사단장일 때 부하가 땅굴을 발견했다. 이를 한 신문은 이렇게 묘사했다. ''전대통령은 항상 무슨 결심을 내릴 때 혼자 생각해서 처리하는 하향식이 아니라 부하들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는 상향식을 택했다. 그래서 부대 전체는 언제나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곤 했다….이런 분위기 때문에 보초 근무하던 하사가 (땅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신군부의 선전지 수준으로 전락한 언론에 자기 색깔이 있을 리 만무했다. 같은 논조, 같은 시각만이 있을 뿐, 다른 점이 있다면 얼마나 정보를 빨리 입수하느냐는 차이였다. 8월 13일 봉 체조를 하고 있는 입소생들의 사진과 함께 각 언론에 실린 삼청교육대 탐방 기사는 그 좋은 예이다. 5공 청문회에서 불법적인 인권 유린이었다고 판명된 삼청교육대를 당시 언론들은 ''땀흘리는 순화 현장''으로 입을 모아 미화하였다. 국방부를 출입하던 당시 취재 기자들이 그 비인간적인 상황을 간파하지 못했을리 없다. 그러나 기사의 논조는 한결같다. ''입소할 때는 공포와 불안으로 떨었던 마음들이 이제는 빛과 안정을 찾는 가운데 훈련에 열중하고 있다''(<ㄷ일보>)라는 식이다.

언론인이라면 누구나 돌아보고 싶지조차 않을, 이처럼 부끄러운 과거를 새삼 들추는 이유는 무엇인가. 결과적으로 그 때나 지금이나 언론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노태우씨 비자금 사건이나 5ㆍ18 관련 보도에서 드러난 것처럼 언론은 여전히 정권의 비리 보도하기를 주저하고 주변에서 맴돌 뿐이다. 5공 정권 탄생에 직ㆍ간접적으로 동조한 언론인들이 언론계 증진에 올라 있거라 정계 핵심 요직에 진출해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폭압적인 사회 분위기나 언론인 숙정ㆍ언론 통폐합 등 신군부가 언론에 휘두른 ''채찍''을 충분히 고려한다해도, 5공 정권 창출에 ''부역''한 언론이 5ㆍ18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모색하는 것은 불가능할수밖에 없다.

88년 말 <기자협회보>에 5회에 걸쳐 ''전두환체제 구축에 협조한 언론인들''이라는 시리즈를 연재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김종찬씨(정치 평론가. 당시는 ''김시욱''이라는 가명 사용)는 그 해법으로 "우선 80년 신군부 체제 구축에 적극 가담한 언론인을 철저히 가려내야 한다"고 제안한다. 적극 가담자는 둘로 나뉜다. 하나는 박정희 정권과 유착했던 이른바 ''유신 언론인''이고, 다른 하나는 신군부 집권 과정에서 권력에 눈이 어두웠던 출세 지향형 언론인이다. 80년 당시 유신 언론인들은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신군부와 결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적극적으로 군부 권력을 향해 진출한 사람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진희씨다. 유신 시절 <동아일보>청와대 출입 기자 출신인 이씨는 80년초 <서울신문>주필로 있으면서 4월14일 ''역사의 무대가 바뀌고 있다''는 시론으로 누구보다 앞서 신군부의 등장을 부추겼다. 이 사설로 전씨와 독대하는 ''영광''을 누린 이씨는 이후 문화바송ㆍ<경향신문>사장을 역임하며 80년 언론 통폐합에도 깊숙히 관여했다.

이밖에 동료 기자들의 편집국내 언동을 수사 당국에 신고했던 것으로 알려진 ○○방송국 8기생, ''동아 7인방''(5공 시절<동아일보> 수습6기생 10명 가운데 7명이 집권 여당에 진출)등 출세 지향형 언론인의 ㅇ는 수업이 많다. 이와 관련해 80년에 숙정 언론인 명단이 언론계 내부에서 작성됐다는 의혹은 여전히 출리지 않을 채 남아 있다. 5ㆍ18특별법이 제정되면서 80년 언론 통폐합과 관련해 89년에 고소당했던 구너정달(80년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ㆍ허문도ㆍ이상재ㆍ이진희 씨를 다시 소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 이들은 공소 시효 만료, 또는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특별법을 제정하는 목적은 단죄가 아니라 구악(舊惡)을 차단하는 것'' 이라는 김종찬씨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특별법 제정은 새 시대의 기반을 닦는 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종전 직후 독일은 포고령을 통해 나치에 종사했던 언론인이 언론계 에 종사하는 것을 금했다.

46년에는 ''독일 정치인과 언론을 위한 법규''를 제정해 나치에 협조한 언론인을 숙정하는 작업이 미진한 언론사는 면허(언론업)을 취소할 뿐 아니라 신규 먼허도 취득할 수 없도록 했다. 우리의 언론 또한 과거의 ''부역''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고서는 거듭나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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