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막사발'의 신비, 4백년 만에 벗기다
  • 충북 단양·이문재 편집위원 (moon@e-sisa.co.kr)
  • 승인 2001.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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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가 길 성씨 부녀, 일본 국보 '이도차완' 재현…
'태토'와 '매화피' 비밀 밝혀내


맥이 탁 풀렸다. 사진으로만 보던 몸흙(태토)의 비파색을 보는 순간, 기가 질렸다. 옷흙(유약)도 예사롭지 않았다. 일본의 국보이자, 일본 다인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도차완(井戶茶碗)을 처음 만져본 도예가 길 성씨(57·길성도예)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4백년 전 조선에서 건너간 '막사발'.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재현하지 못한 신비의 찻사발이었다.




지난 6월 하순, 경남 사천에 사는 소설가이자 이도차완(이도) 전문가 정동주씨가 진품 세 점이 있으니 와서 보라고 했을 때만 해도 길 성씨는 자신과 딸(길기정·32)이 이도를 재현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정씨 자택에서 진품을 다섯 시간 넘게 살펴본 뒤, 딸과 단둘이서 그릇을 빚고 있는 단양 방곡마을로 돌아온 길씨는 이틀 밤을 뜬눈으로 지샜다. 도예가들은 어느 정도 알고 있거니와, 이도의 비밀은 흙에 있었다. 그 흙을 찾으면 이도가 4백년 동안의 긴 잠에서 깨어난다. 하지만 도무지 그 흙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난 4백년 동안,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 도공과 그 후예들이 그토록 재현하려고 애썼던 찻사발. 식민지 시절에는 더 했다. 일본인들이 조선 가마터에 있던 흙이란 흙은 모조리 퍼갔지만 허사였다. 8·15 이후에는 주로 경남 지역 도예가들이 재현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고, 일본에서 국보로 손꼽히는 도예가들도 매달렸지만, 진품에 가까운 이도, 즉 그 비파색(노란색 계열로 연한 붉은색·살색·황토색·회청색이 감돈다)과 매화피(梅花皮·그릇 굽 부분에 생기는 개구리알 모양의 결정)를 제대로 복원했다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사천에서 진품을 보고 온 지 사흘째 되던 날 아침, 방곡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월악산 줄기를 바라보던 길씨는 무릎을 탁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즉시 정동주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흙 찾으러 내려간다." 불현듯, 20년 전, 진주 근교에서 보았던 흙이 떠오른 것이다. 길씨는 딸 기정씨와 함께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대하 소설 〈백정〉을 쓰면서 서부 경남 일대의 역사와 인문 지리를 손금 보듯이 파악하게 된 정씨가 길 안내를 했다. 정씨가 진해 웅천 쪽으로 길을 잡았는데, 길씨는 왠지 내키지 않았다. 반대쪽으로 가자고 했다. 밤 11시쯤, 20년 전에 찾아갔던 면 소재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마을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길성씨는 이렇게 말했다. "꿈 얘기라면 믿을 것 같지 않아서 얘기하고 싶지 않은데, 사실인 걸 어쩌겠는가. 그날 밤 꿈에 그 흙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 나타났다. 새벽같이 일어나 삽 한 자루를 들고 나섰다."


오솔길은 온데간데 없었다. 지난 20년이 어떤 세월이었는가. 개발지상주의의 열풍이 전국을 휩쓴 시절이었다. 오솔길은 사라지고 자동차 도로가 나 있었다. 그 숲이 사라지지나 않았을까. 꿈속에서 보았던 길을 따라 새벽 공기를 가르는 길씨는 입안이 타들어갔다. "아, 그 숲이 있었다!" 소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진 숲은 그대로였다. 숨을 멈추고 삽을 찔러 보았더니, 잔돌멩이 하나 없는 완벽한 사토(沙土)였다. 마치 누군가 잘 보관해 놓은 것 같았다. 태토가 있으면 유약도 있는 법. 그 길로 단양 방곡으로 차를 몰았다.


꿈에 본 '태토'로 빚어낸 신묘한 비파색과 매화피




길 성씨 부녀가 재현한 이도차완 : 지난 8월10일, 4백년 만에 다시 태어난 '조선의 그릇'. 크기는 작은 편이지만(지름 13.5cm, 높이 7.6cm, 굽지름 5.2cn, 무게 220g) 굽이 높아 당당해 보이고, 은은한 비파색이 어린아이 살색처럼 투명하다. 매화피(아래 왼쪽)가 잔잔한 호수에 부서지는 달빛을 연상시켜, 정동주씨가 '월파(月波)차완'이라고 이름지었다. 아래 오른쪽은 위에서 내려다본 것이다.


정동주씨가 최근에 펴낸, 이도에 관한 국내 최초의 본격 연구서 〈조선 막사발 천년의 비밀〉 (한길아트)이 내린 결론 가운데 하나가 이도의 비밀은 무엇보다도 흙에 있다는 것이었다(98쪽 딸린 기사 참조). 하지만 4백년 만에 찾아낸 그 흙은 다루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완(찻사발)에 목숨을 걸었다는 길기정씨의 고백이다.


"흙이 따라오지 않았다. 점토는 잘 따라오는데 이 흙은 그렇지 않았다. 십년 넘게 흙을 만져 성형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이 흙은 정말 다루기 힘들었다. 처음에는 도저히 안될 것 같아 몇 번이나 울었다."


길 성씨에 따르면, 완은 그릇의 마지막이다. 청자·백자 다 거친 뒤에 도예인들이 마지막으로 손대는 그릇이다. 색깔이며 형태가 단순·소박하지만, 그래서 더욱 어렵다. 기자가 사진을 촬영하며 목격했는데, 기정씨는 절반 정도만 성형에 성공했다. 10점을 성형할 때, 5점 가량이 물레 위에서 우그러지고 말았다.


이도 태토가 가진 가장 큰 특징은 태토의 색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여느 흙은 소성되면서 색깔이 크게 달라지는데, 이 흙은 구워진 다음에도 원래 색을 그대로 유지한다. 이도의 비파색이 바로 이 태토에서 나온다. 길 성씨는 아기 살색 같은 투명한 비파색이 주는 신비감은 그 어떤 그릇도 따라올 수 없다고 말했다. 이도의 또 다른 특징은 단미(單味), 즉 한 가지 흙만을 쓴다는 것이다. 보통 그릇은 두세 가지 흙을 섞는다.


4백년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흙 중의 흙이기 때문일까. 청자나 백자는 불에 넣기 전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예측할 수 있는데, 이도는 장작 가마를 열어보기 전에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길 성씨는 "불의 작용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4차원이다. 이도는 그래서 더욱 묘미가 있다"라고 말했다.




일본의 국보 : 교토 다이도쿠샤에 소장되어 있는 일본의 국보 '기자에몬이도'(위 왼쪽). 두드리면 툭툭하는 둔탁한 소리가 나고, 그릇 안쪽이 깊다. 비파색이 은은하고, 굽이 당당하다. 위 오른쪽은 기자에몬이도의 밑부분이다. 지름 15.5cm, 높이 9.1cm, 무게 370g.


그리하여 이도는 '살아 있는 그릇'이라고 불린다. 장마철에는 물을 빨아들여 촉촉하고, 가을철이면 아주 잘 말라 있다. 숨을 쉬기 때문이다. 백자 찻잔에다 차를 담아 놓고 사흘 정도 지나면 쇳내가 나는데, 이도는 전혀 변함이 없다. 이도의 안팎에서 우러나는 비파색은 찻물과 사람의 체온, 그리고 시간의 더께와 더불어 그 오묘한 깊이를 더해 간다. 단 한가지 흙으로 이루어진, 어떤 장식이나 기교를 허락하지 않는 단순한 형태는 자기 내면과 마주하게 하는 한편, 나와 너(우리), 인간과 우주로 하여금 대화를 나누게 한다.


아버지와 딸은 태토를 품에 안고 와서도, 한 달 넘게 흙을 달래야 했다. 겨우 흙과 '악수'를 나누게 된 부녀는 지난 8월10일 오전 장작 가마를 열 수 있었다. 전기 가마로 몇 차례 실험한 뒤여서(길 성씨는 장작불을 지피기 전에 전기 가마로 성형과 유약 상태 따위를 실험한다) 웬만큼 자신은 있었다. 비파색이 살아 있었고 매화피가 엉겨 있었다. 실로 4백년 만의 만남이었다. 전체적으로 색깔은 제대로 나왔는데, 매화피가 문제였다. 조선의 막사발은 아직 자신의 전부를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매화피가 왜, 어떻게 생성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난 9월2일 아침, 길씨는 마침내 그 비밀을 풀었다. 매화피는 유약이 엉기는 것이 아니고 가마 속에서 태토가 갈라 터지면서 생겨나는 것이었다. 길씨는 "매화피가 가장 어려웠다. 두 번째 가마는 기대해도 좋다"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두 번째 장작 가마는 9월6일 연다.


길 성씨 부녀가 이도를 재현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지난 8월30일 경남 사천으로 정동주씨를 인터뷰하러 갔는데, 정씨의 서재 한켠에 작은 찻사발들이 놓여 있었다. 정씨는 이도를 재현한다는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번에 펴낸 저서 〈조선 막사발…〉에서도 태토가 관건이라며 그 가능성만 열어놓았을 뿐이다. 기자가 "이 사발이 혹시 이도 아닌가?"라고 물었더니 정씨는 씨익 웃었다. 그 찻잔이 바로 길씨 부녀가 첫 가마에서 꺼낸 이도 가운데 하나인 '월파(月波)차완'이었다. 그 길로 단양 방곡 도예촌으로 향했다.


일본 전문가에게 평가 맡겨야 하는 '답답한 현실'




"정동주씨가 큰 일을 해냈다. 앞으로 조금 시끄러워질 것 같다." 이도에 관해 새로운 견해를 내놓은 정동주씨와, 자신에게 이도를 보게 해준 소장가가 아니었다면 이도 재현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길씨는, 정씨가 책을 펴낸 시기와 맞물려 이도를 재현한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도 전문 연구자가 거의 없는 국내 도자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자기들 입맛에 따라' 한국 도예계를 좌지우지해온 일본 상인과 수집가들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 도예의 맥과 자긍심을 복원한 것이다.


일찍이 만화에 뜻을 두었던 길 성씨는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고 잠시 '외도'를 했다. 언론인·그래픽 디자이너 생활을 하다가, 1970년대 후반 도예가의 길로 선회했다. 해마다 한두 차례 전시회를 열 정도로 열성적이고 실험적이었던 그는 1993년 이후 전시회를 열지 않았다. 그 기간에 고려 청자와 조선 백자를 재현한 뒤, 완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그는 "이제부터 시작이다"라고 말했다. 딸 기정씨와 함께 다시 삼엄한 작가 정신, 즉 흙과 물, 불과 공기, 그리고 사람 앞에서 마음을 비우는 초발심으로 무장하겠다는 것이다. 길씨는 "4백년 만에 하늘이 내린 조선의 그릇을 함부로 남용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의 원혼과 함께 지난해 세상을 떠난 아내(조영자씨)의 얼굴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내는 딸 기정씨에게 "결혼 같은 것은 생각하지 말고 아버지의 뒤를 따르라"는 유언을 남겼다. 기정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머리를 짧게 깎고 오직 흙에만 전념하고 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이도 연구서가 나오고, 때맞추어 이도가 재현되었지만,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도에 관한 '합의'가 없기 때문이다. 길 성씨는 "어렵게 복원한 우리 그릇을 다시 일본 사람들에게 맡겨야 하는가"라며 안타까워한다. 이도에 관한 새로운 학설을 검증할 국내 학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재현도 그렇다. 국내에는 진품을 가려낼 감식안이 그리 많지 않다. 4백년 만에 한국인이 제기한 이도론이나, 한국인이 재현한 조선의 찻사발을 일본 전문가들에게 평가받아야 할 형편이다.


일부에서는 이도에 대한 연구와 재현 열기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이름을 밝히지 말라는 한 학자는, 막사발인 이도가 한국 도자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높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학자는 또한, 이도를 재현했다는 한국 도예가가 그동안 한둘이 아니었다며, 도예가 대부분이 이도를 비싼 값에 구입하는 일본 도예 시장에 진출하려는 세속적 욕망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한국 고유의 다도를 정립하기 위해 애써온 석성우 스님은 "일본을 상대로 한국의 위상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것은 이 찻사발 하나밖에 없다. 정동주씨와 길 성씨가 잃어버린 우리 민족혼을 되찾아주었다"라며 그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석성우 스님은 찻잔은 차와 더불어 존재하는 것이라며 "이를 계기로 중국과 일본 눈치를 보느라 정체성을 잃어버린 한국 다도가 바른 길로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위 상자 기사 참조).


길씨 부녀가 지난 8월 1차로 재현한 이도는, 9월6일 두 번째 가마에서 나오는 이도와 함께, 한국과 일본 전문가들로부터 꼼꼼한 검증 작업을 거치며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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