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총장 “아직 배가 고프다”
  • 나권일 기자 (nafree@sisapress.com)
  • 승인 2002.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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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총장은 김홍업·김홍걸을 구속하고, 신승남 등 정치·비리 검사를 기소 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검찰을 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7월11일, 이명재 검찰총장(59)은 출근한 뒤 돌부처마냥 말이 없었다. 서울 서초동 대검 청사 8층에 자리 잡은 총장실은 며칠 전부터 폭풍전야와 같은 침묵에 휩싸였다. 총장부속실 비서관의 말에 따르면 ‘취임 이후 가장 어두운 표정’이 며칠째 계속되었다. 대검 중수부가 검찰 총수였던 신승남씨와 현직 고검장 김대웅씨를 불구속 기소한 이 날, 이총장은 임명권자인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대검 간부들조차 대통령이 사표를 반려했다는 소식을 방송을 통해 듣고서야 알았을 정도로 이 날 사퇴 표명은 전격적이었다.


검찰 주변에서는 선배 총장을 비롯한 집안 식구를 기소해야 하는 인간적 고충 때문에 사표를 제출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청와대가 허를 찔렸다기보다는 검찰 살리기에 나선 이총장의 고뇌에 찬 결단이다. 앞으로 더 강력하게 수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는 지적도 뒤를 이었다. 이총장이 사표를 제출하자 특정 지역 죽이기라며 이총장을 비난했던 일부 검사들도 잠잠해졌다. 호남 출신 한 소장 검사는 “김태정 전 총장이 1999년 대전 법조 비리 때 책임을 지고 자기가 옷을 벗어야 했는데도 애꿎은 후배 검사들의 옷만 벗겼다가 처참하게 몰락했다. 이총장의 결단은 존중받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총장은 검찰 내에서 수도승으로 통한다. 1월17일 취임 이후 ‘檢察總長 李明載’라는 명패는 집무실 책상 위에 한번도 올라간 적이 없다. 사적인 짐꾸러미 하나 집무실에 들여놓지 않았다. 이총장은 검찰에 복귀한 뒤 골프를 끊었다. 시계추처럼 정시에 출퇴근했고, 일과 후에는 두문불출했다. 점심은 간부들과 함께 구내 식당에서 5천원짜리 식사로 해결했다. 취임 직후 가진 출입기자단과의 상견례에서 한 간부는 ‘수도승이 오랜만에 고기를 맛보는 날’이라는 농담을 건넸다.


이총장은 지난 1월 가사 상태에 빠진 검찰을 살려낼 구원투수로 전격 투입되었다. 신승남 총장이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되어 물러난 뒤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을 정도’로 검찰은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 김대중 정부는 한때 ‘당대 최고의 검사’로 불리던 영남 출신 이명재 변호사를 삼고초려 끝에 다시 불러들였다.


허허실실과 독종 정신으로 김홍업 구속







이총장(사법고시 11회)은 신승남 전 총장보다 사법고시 2년 후배였다. 언론은 그를 ‘검찰내 TK 인맥의 대표’라고 보도했지만 그만큼 지역색 없는 검사도 드물었다. 올해 취임사에서 ‘무사는 얼어죽을지언정 곁불을 쬐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할 정도로 자긍심 강한 검사였다.
이총장이 취임한 뒤 김승규 광주고검장이 대검 차장으로 옮겼다. 대검 중수부장은 김종빈 검사장이 맡았다. 정부는 위기 국면에서도 지역 안배를 통한 견제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명재 총장은 취임 뒤 침묵했다. 사법고시 동기인 차정일 변호사가 이용호 게이트 특검을 맡아 국민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었다. 이총장과 검찰은 삼성동 특검 사무실에서 연일 대형 뉴스가 터져나오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검찰이 다시 눈길을 끌기 시작한 것은 대통령의 3남 김홍걸씨 비리가 터지고 특검으로부터 넘겨받은 이용호 게이트 재재(再再)수사를 시작한 4월부터였다. 이총장은 대검 중수부 내에 실력파 수사진을 꾸려 승부수를 던졌다.
특수수사통이었던 이총장은 김진태 중수2과장과 이재원 3과장에게 중책을 맡겼다. 김종빈 중수부장과 박 만 수사기획관이 수사를 총괄하기로 했다.

수사팀 인선에는 고심한 흔적이 엿보였다. 언론은 김종빈·이재원 (호남), 박 만·김진태(영남)로 균형을 맞춘 것을 놓치지 않았다. 당연히 수사가 제대로 되겠느냐는 의문이 뒤따랐다. 그러나 이총장을 잘 아는 이들은 특수 1부장 시절 함께 일한 경험이 있는 박 만 기획관과 김진태 과장에게 무게 중심이 쏠릴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총장이 김홍업씨를 구속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검 주변에서는 이명재 총장의 ‘허허실실’과 박 만 수사기획관의 ‘동물적 감각’ 그리고 김진태 중수2과장의 ‘독종 정신’이 큰 작품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4월 말 이총장에게 첫 번째 시련이 닥쳤다. 자꾸 출두를 미루는 김대웅 고검장 소환 문제였다. 현직 고검장의 검찰 출두는 검찰 조직에 큰 부담이었다. 신승남 총장이 물러난 뒤 검찰 내 호남 인맥의 대표 주자로 거론되던 김고검장은 검찰 소환 하루 전인 4월24일 기습적으로 대검 청사에 출두해 여전히 힘이 있음을 과시했다.





정치적 외풍도 불어닥쳤다. 한나라당 이재오 총무는 대통령의 세 아들에 대한 수사를 요구하며 4월23일 예고도 없이 이총장을 전격 방문해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총무는 도망간 최성규 총경을 놓치면 검찰은 문을 닫으라는 국민적 비난에 직면할 것이라고 이총장을 압박했다. 민주당도 가만 있지 않았다. “특검제 즉각 도입을 연일 주장하는 한나라당이 검찰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다. 검찰에 대한 과도한 압박을 중단하라”며 한나라당을 비난했다.


양당의 틈바구니에서 이총장은 여전히 침묵하며 원칙 수사만을 되뇌었다. 기다렸던 이총장은 첫 ‘작품’을 대검이 아닌 서울지검을 통해 먼저 내놓았다.
5월3일 정권의 핵심 실세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이 진승현씨에게서 5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권노갑씨 구속은 어떤 성역도 두지 않고 철저히 수사하겠다는 이총장의 단호한 의지로 읽혔다. 언론은 ‘이총장이 정치권과 권력 핵심을 향해 칼끝을 정면 겨냥했다. 홍업·홍걸 씨에 대한 검찰의 소환과 사법 처리가 본격화할 것이다’라고 관측했다.


5월18일 대통령의 3남 김홍걸씨가 구속되었다. 대검 청사에는 5년 만에 재현된 대통령 아들의 구속을 보도하려고 국내외 보도진 100여 명이 몰려들었다.
김홍걸씨를 구속하고도 이총장은 계속 배고파 했다. 6월17일 검찰은 김홍업씨를 소환했다. 홍업씨 대학 동기 유진걸씨가 구속되었고, 국가정보원 자금이 홍업씨에게 유입되었다는 언론 보도까지 나온 뒤였다. 검찰이 홍업씨가 이권 청탁과 관련된 돈을 받았다는 관련자 진술을 확보해 놓고도 소환을 미루는 것은 ‘청와대 눈치 보기’라는 비난이 나오던 터였다.


원칙론으로 승부해 청와대에 완승





소환 전날인 6월16일 밤, 김종빈 중수부장과 김진태 2과장은 긴급히 수사팀 회의을 열었다. 다음날 아침, 중수부는 출근과 동시에 홍업씨 소환에 대한 이총장의 재가를 받았다. 설마 두 아들을 다 구속하겠느냐는 청와대의 관측은 전혀 별개인 사안을 놓고 봐줄 수 없다는 수사팀의 원칙론에 나가 떨어졌다. 이총장의 두 번째 승부수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대검의 한 부장검사는 “일선 수사 검사의 의견을 배척할 수 없었다. 어떠한 영향력이나 부탁도 통하지 않았다”라고 전했다. 원칙 수사를 강조한 이총장이 홍업씨 혐의가 확실하다는 수사 검사의 의견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6월21일 이틀 동안의 밤샘 조사를 거쳐 홍업씨가 구속되었다. 홍걸씨 구속 이후 한 달여 만이었다. 대검 청사에는 국내외 기자 1백50여 명이 몰려들었다. 한나라당 남경필 대변인은 ‘사필귀정이고, 부패 정권이 스스로 불러들인 참극’이라는 논평을 냈다.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이총장에게는 가장 중요한 마지막 고뇌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신승남 전 검찰총장과 김대웅 광주고검장 소환 조사였다. 대검 청사는 겉으로는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나 서초동 청사뿐만 아니라 전국의 검찰 청사 주변에서는 두 사람 소환 문제를 두고 의견이 팽팽히 대립했다.
호남 출신 한 검사는 “친분 있는 인사들이 사건에 대해 물어오면 알아봐주는 것은 관례였다. 신 전 총장이나 김고검장을 공무상 비밀 누설로 처벌한다면 어떤 검사도 비밀 누설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대검의 한 검사장급 인사는 “관례처럼 이뤄진 일을 형사 처벌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얘기들이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을 소환하지 않는다면 검찰은 국민의 신뢰를 얻을 기회를 영영 잃어버릴 위기 상황이었다. 당시 검찰 내부에서 반발 기류가 상당했다”라고 귀띔했다. 일부 검사들은 때마침 김진관 제주지검장 사건이 터지자 호남 출신 검찰 인사들이 줄줄이 옷을 벗는 상황이 올 것이라며 이명재 총장이 ‘특정 세력 죽이기’를 시도한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6월 한 달을 뜨겁게 달군 월드컵 열기 속에서도 총장실은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결국 토요일인 7월6일, 신승남 전 총장과 김대웅 고검장이 소환되었다. 이총장은 두 사람이 소환되던 날에도 구내 식당에서 식사하고 오후 1시30분 정시에 퇴근했다.
겉으로는 이총장의 동요가 감지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총장은 고심을 거듭했다. 8일에는 확대간부회의와 중수부 수사팀 회의가 열렸다. 이총장은 간부회의에서 “화합과 단결로 검찰의 위상을 재정립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라며 두 사람에 대한 사법 처리를 예고했다. 반발하는 신 전 총장에 대해서는 기밀 누설 외에 직권남용 혐의까지 적용하는 강공이었다.





7월10일 대검 청사는 다시 긴박하게 움직였다. 이미 9일 신 전 총장의 강력한 반발 움직임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신씨는 친분 있는 대검의 검사장급 간부들에게 전화를 걸어 억울함을 호소했다. 자신이 기소되어 법정에 선다면 사건을 수사했던 검찰 간부들이 증인으로 출석해야 하는 등 검찰이 또 한번 망가질 수밖에 없다고 항변했다. 신씨가 반발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언론에는 신 전 총장이나 김고검장을 내사자 신분으로 소환한다고 해놓고 7월6일 밤에 두 사람에게서 피의자 신문조서까지 받았던 것이다. 소환 당시에 이미 검찰은 두 사람을 기소하기로 확정한 것으로 읽혔다.
신 전 총장은 반발했지만 이총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박 만 수사기획관은 1992년과 1999년 김기춘씨와 김태정씨 수사에 참여했던 배짱 두둑한 특수수사통이다. 몇 차례 회의가 숨가쁘게 진행된 뒤 정치 권력의 지근 거리에 있던 ‘대통령의 집사’ 이수동씨를 형님으로 모신 두 ‘정치 검찰’은 11일 전격 기소되었다.


홍업씨에 대한 중간 수사 발표에서도 검찰을 바로 세우려는 강력한 의지가 엿보였다. 검찰은 현대와 삼성 등 대기업과 국정원 인사의 돈까지 받은 홍업씨 비리를 낱낱이 밝혔다.


정권의 견제와 정치권의 흔들기 큰 부담


대통령의 재신임으로 다시 조직을 장악했지만 이총장의 앞길은 멀다. 일각에서는 청와대가 김정길 법무부장관을 다시 등용해 이총장 견제에 나섰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경기도 부천 범박동 재개발 비리에 연루되어 또 다른 비리 검찰로 지목된 김진관 전 제주지검장을 사법 처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부패방지위원회가 전·현직 검찰 간부가 연루된 사건에 대해 재정 신청을 냈기 때문에 검찰 내부 개혁 의지를 국민에게 보여줄 수 있을지도 관심 사항이다.


민주당이 편파 수사 의혹을 제기하고 있고, 한나당이 또다시 특검제를 주장하고 있는 등 대선 국면에서 예상되는 ‘검찰 흔들기’도 이총장에게 큰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26~27쪽 딸린 기사 참조).
검찰 조직이 하루빨리 안정되기를 바란다는 한 소장 검사는 “검찰이 정치 권력 근처를 기웃거리는 일도 없어야겠지만, 권력이 검찰을 흔드는 일도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쉬울지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이총장은 이제 겨우 임기의 4분의 1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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