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병 완전 정복 멀지 않았다.
  • 포항·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승인 2004.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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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질환을 유발하는 혈전이 얼마나 형성될지 미리 가늠하는 기기가 최근 발명되었다. 순환기질환 발생을 예측하는 획기적 경보 체계가 마련된 셈이다.

고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지 않은데도 왜 심장병에 걸릴까?
혈액의 유동이 나빠 혈관 내피세포에 상처가 나고, 그로 인해 혈전이 생기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에게 7은 행운의 숫자이다. 그러나 서울에 사는 유 아무개씨(69)에게는 불행의 숫자가 될지 모른다. 7이 그의 죽음을 재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심장병을 앓아온 그는 그동안 모두 여섯 번 쓰러졌다. 다행히 그때마다 기적처럼 소생했지만 일곱 번째에도 같은 행운이 찾아올지는 미지수이다. 몇년 전 관상동맥 우회술(迂廻術)을 받았다는 그는 여전히 두려움을 갖고 있다. “위험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가슴이 조금만 답답해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라고 그는 말했다.

순환기질환(심혈관 등에 생기는 질병)에 노출된 사람들이 체감하는 압박감은 비슷하다. 늘 언제 어느 곳에서 쓰러져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짓눌려 있는 것이다. 의료 선진국에서 꽤 오랫동안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의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지난 몇십 년간 괄목할 성과가 있었다. 의학자들의 노력 덕에 각종 약물을 이용해 협심증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고, 동맥경화 원인으로 알려진 혈전을 혈전용해요법으로 녹이는 일도 가능해졌다. 전재은 교수(경북대·순환기내과)는 관상동맥 우회술(심장 부근 동맥이나 다리 정맥을 잘라 막힌 관상동맥을 우회해 연결하는 시술)과 경피적 관상동맥 중재술(좁아진 혈관에 풍선을 넣어 혈관을 넓히는 ‘풍선 확장술’과, 풍선으로 넓힌 혈관에 금속 망을 고정시켜 혈관이 좁아지는 것을 방지하는 ‘스텐트 삽입술’을 말한다) 덕에 ‘급사’하는 사람이 크게 줄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 치료법에는 한계가 있다. 발병 위험을 예측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언제 어느 때고 재발할 여지가 있다. 많은 사람이 심혈관질환의 발병을 예측하고 재발 위험을 줄이기 위해 연구에 나섰다(그러나 성적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방문교수 자격으로 최근 포항공대에 온 조영일 교수(미국 드렉셀 대학·기계과)도 몇년 전 그 대열에 합류했다. 그의 전공을 보며 ‘기계과와 순환기질환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하고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관련이 있다. 그것도 아주 밀접하게.

1920년대 미국에서 순환기질환은 아주 드물게 발생하는 희귀병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 사정이 180° 바뀌어 ‘유행병’이 되었다. 미국 전체 인구의 30% 가량이 이 병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사망 원인 1위. 요즘도 미국에서는 매년 50여만 명이 심장병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한국도 사정이 비슷하다. 통계청이 9월 말 발표한 ‘한국인 10대 사망 원인’에 따르면, 순환기질환인 뇌혈관질환과 심장질환이 사망 원인 2,3위였다. 1위는 암).

순환기질환을 예방·치료하는 데 드는 비용 또한 만만치가 않다. 미국의 경우 보건 예산의 상당 부분을 쏟아 붓고 있는 실정이다. 위기를 느낀 미국 정부는 수년 전부터 과학 기술을 이용해 그 비용을 줄일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조영일 교수 같은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순환기질환 진단법과 치료 기술을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많은 과학자가 그 요청에 응했고, 조교수도 그 대열에 끼어들었다. 새로운 진단·치료 기술 개발에 나선 조교수가 처음 부딪힌 것은 세 가지 의문이었다. 먼저, 심장병으로 죽는 사람의 50%가 위험 인자인 고혈압·고(高)콜레스테롤에 상관없이 왜 그 병에 걸리느냐는 점이었다. 다른 하나는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한 심장마비의 근본 원인인 혈전 덩어리가 어떤 사람에게서는 터지는데, 어떤 사람에게서는 왜 터지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세 번째 의문은 심혈관질환이 왜 새총 모양의 분지관(혈관이 갈라지는 부분)에서 주로 발생하느냐는 것이었다.

조영일 교수는 수많은 논문을 들추고 밤늦도록 연구한 끝에 세 가지 의혹이 감추고 있는 비밀에 접근했다. ‘혈압과 콜레스테롤이 높지 않은데 왜 심장병에 걸리느냐’는 의문에 대한 해답은 ‘피의 유동성’에 있었다. 피가 잘못 흐르면 혈관 안쪽 내피세포에 상처가 나고, 그 상처가 결국 피의 응고로 이어져 혈전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혈전은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울혈성동맥경화를 일으키는 무서운 인자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피의 나쁜 흐름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자연스레 그는 이 의문에 부딪혔다. 조사해보니 의학자들이 꽤 오랫동안 그 문제에 천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체 역학 전공자들 덕에 몇년 전 그 문제가 풀렸다.
피가 흐를 때 내피세포가 저항하는 힘을 ‘전단응력’이라고 한다. 이 수치의 기준치는 15dyne/㎠로 수치가 이보다 훨씬 낮으면 내피세포가 상처가 나면서 피가 응고된다. 이는 전단응력이 높으면 항응고제를 내보내고, 낮으면 친응고제를 내보내는 몸의 ‘마술’ 덕분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의학자들은 그 수치를 재는 데 번번이 실패했다.

오랜 고민 끝에 의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내피세포에 있는 0.2~3㎛ 크기의 글리코켈릭스라는 섬유질이었다. 이 섬유질은 피의 흐름에 따라 일정하게 휘는 특성을 갖고 있었는데, 그 휘는 정도를 측정해서, 내피세포는 그 위를 지나는 피로 인해 생기는 전단응력의 값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전단응력을 측정해서 그 수치가 지나치게 낮다 싶으면 혈관을 수축시키는 화학물질이 내피세포에서 자동으로 나와서 전단응력을 높이고, 그로 인해 혈전 생성을 억제할 수도 있음을 뜻했기 때문이다. 동맥경화는 왜 주로 분지혈관에서 발생할까? 그곳에서 혈액이 역류하기 때문이다. 역류는 내피세포에 상처를 내고, 그것은 곧 혈전 생성으로 이어진다.

나쁜 피의 흐름을 연구하던 중에 조교수는 피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해 치명적인 질환에 걸리는 사람도 목격했다. 신장 기능을 상실한 신부전증 환자가 그들이다. 신장은 지름 2~5마이크론인 모세혈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문제는 피의 40~45%에 달하는 적혈구의 크기가 8마이크론이라는 데 있다. 즉 적혈구가 모세혈관 지름보다 커서 정상적인 형태로는 신장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데 ‘혈액의 기적’이 그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즉 적혈구가 모세혈관을 지나기 위해 스스로 모양을 바꾸는 것이다. 만약 적혈구가 모양을 바꾸지 못하면 피가 신장으로 흐르지 못해 핏속의 노폐물이 걸러지지 않는다. 신부전증 환자 대부분은 이 때문에 신장 기능을 잃는다. 피가 안 통해 생기는 갑작스러운 실명이나 다리 절단도 같은 과정을 거쳐 일어난다.

‘왜 동맥경화증이 분지관(分枝管)에서 주로 발생하느냐’는 의문도 풀렸다. 원인은 피의 국부적 ‘역류 현상’에 있었다. 정맥을 따라 흐르던 피는 분지에 이르면 20% 정도를 가는 혈관 쪽으로 흘려보내게 된다. 이때 혈관의 압력이 커지면서 피의 속도가 줄고, 그로 인해 피가 역류한다(73쪽 그림 참조). 피가 역류하면 ‘납작하게 엎드려’ 혈관 내막을 가리고 있던 내피세포가 동글동글해지면서, 피가 그 사이에 있는 세포 조직과 접촉하게 된다. 내막에 닿은 피는 그대로 응고되고 그로 인해 혈전이 발생한다. 조교수는 “두통의 원인도 뇌로 가는 경동맥의 분지관에서 혈관이 막힌 결과, 피의 유동이 줄어들어 생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조교수는 ‘혈전 덩어리가 어떤 사람에게서는 터지고, 어떤 사람에게서는 왜 안 터지는지’에 대한 해답은 얻지 못했다. 의학자들은 ‘그 비밀을 밝혀내면 노벨의학상은 떼어놓은 당상’이라고 말한다. 현재 그 원인 규명은 세계심장학회의 가장 무거운 연구 과제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혈전에 대한 비밀은 많이 풀렸다. 죽같이 생긴 혈전은 밑이 치석처럼 딱딱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일단 생성되면 20여년 뒤에 혈관을 꽉 채울 만큼(90%) ‘성장’한다. 그러나 50%까지 자라도 사람들은 잘 인식하지 못한다. 1년에 한두 번씩 가슴이 답답해지지만 그것을 위험 신호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물다(75쪽 기사 참조). 노인들이 운동 중에 급사하는 것도 대부분 혈전 탓이다. 운동을 하면 피의 유동 속도가 네 배 정도 빨라지는데, 혈전이 혈관의 절반 이상을 꽉 틀어막고 있으니까 피가 더 나아가지 못하고 터져버린다.남성도 주기적으로 혈액을 뽑으면 심장병에 덜 걸릴까? 그렇다. 놀랍게도 적혈구 수치가 떨어지면서 심혈관질환 발생률이 낮아진다.

두 가지 의문을 푼 뒤 조교수는 피의 점성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수많은 연구자들이 피의 점성과 순환기질환을 연관 지어 연구했음을 확인했다. 논문이 무려 4천 편이 넘었다. 그중에는 여성과 남성의 피를 비교 연구한 논문도 있었다. 논문은 남성의 적혈구가 피의 45%인 데 반해 여성의 적혈구는 40%라고 전제한 뒤, 여성들이 심장병에 덜 걸리는 이유가 ‘적은 적혈구 숫자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그 논문 역시 의학자들의 오랜 숙제인 ‘왜 여성은 폐경기가 되면 적혈구가 증가하고, 순환기질환에 더 잘 걸리는가’에 대한 해석은 내놓지 못했다.

피의 점성이 중요한 이유는 피의 농도에 따라 동맥경화가 일어날 확률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진행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피가 빨리 흐르면 점도가 묽고, 느리게 흐르면 점도가 진하다. 당연히 점성도가 진하면 피가 분지관에 더 오래 머물러 동맥경화에 걸릴 위험이 커진다. 조교수는 “피가 분지관에 오래 머무르면 몸에 해로운 산화된 콜레스테롤(LDL)이 혈관 벽에 부착되고, 내피세포에 상처가 날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그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재미난 연구 결과도 만났다. ‘남성이 일정하게 피를 뽑으면 순환기질환에 덜 걸린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여성은 적은 적혈구 숫자 덕인지 남성들에 비해 순환기질환에 덜 걸린다. 그러나 아직 왜 여성들의 적혈구가 적은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의학자들은 월경 때문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렇다면 남성도 여성들처럼 한 달에 한 번 피를 뽑아내면 어떻게 될까. 놀랍게도 적혈구 비율이 40% 정도로 떨어진다. 그것은 곧 피를 주기적으로 뽑아내면 여성처럼 순환기질환에 덜 걸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최대 90일에 한 번씩 뽑아 주어도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주장이었다.

1997년, 몇몇 유럽 의사가 주기적으로 피를 뽑으면 우리 몸에 이롭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2천6백82명을 5년6개월간 추적한 결과, 피를 주기적으로 뽑아낸 그룹에서는 급성심근경색이 0.7% 발생한 반면, 피를 뽑지 않은 그룹에서는 9.8% 발생했던 것이다(<영국 과학 저널> 1997년).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의사들이 피에 대해 거의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윤정한 교수(연세대·내과학교실)는 “피를 순환기질환의 위험 인자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고혈압과 고콜레스테롤 외에 흡연·비만·당뇨 등이 수십 년 동안 확인된 심혈관질환의 위험 인자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조교수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피가 병을 만든다고 보았다. 그가 켄 켄지 박사(위 상자 기사 참조)와 손잡고 피의 물리적 성질을 파악하는 기계를 발명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와 켄지 박사는 얼마 전 피의 점도와 혈전의 변화 가능성 등을 측정할 수 있는 ‘자동 피 점성계’라는 기기를 발명해냈다. 그러나 이 기기는 아직 실용화 전 단계에 머물러 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허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대신 대학병원에서 연구용으로 적극 쓰이고 있다. 만약 조교수와 켄지 박사의 바람대로 이 기기가 피의 점도를 재고 혈전 경향성을 파악하는 기기로 승인받으면 순환기질환 예방·치료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될 전망이다.

자동 피 점성계는 매우 유용해 보인다. 그동안 혈액 검사는 주로 혈당·콜레스테롤 수치를 재는 화학적 분석만 했는데, 이 기기는 물리적 분석까지 해내기 때문이다. 즉 적혈구의 변형 가능성과 피의 응고성을 예측하고, 혈전이 얼마나 형성될지 미리 가늠하고, 피의 점도를 측정한다. 이 기기가 병원에 설치되면 우리는 약간의 혈액만으로 자신이 심장병에 걸릴지 안 걸릴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조교수는 심장병 정복의 ‘전망이 밝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란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사람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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