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릭스'를 가다/신흥 부국 러시아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4.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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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수도는 모스크바. 국기는 원래 제정 러시아 때 것인데, 소련이 붕괴한 이후 다시 사용하고 있다. 표트르 대제가 네덜란드 국기를 본떠 만든 것으로 흰색은 평화와 정의, 파란색은 성실과 신념, 빨간색은 힘과 조국을 위해 흘린 피를 상징한다. 국토 면적은 1천7백만㎢(세계 1위)이고, 인구는 1억5천만 명이다.

세계 최대 원유 수출국이자 무려 1천7백조 t에 달하는 천연 가스 매장량을 가진 세계 1위의 천연 가스 수출국이다. GDP의 절반 이상을 석유 수출에 의존하는 러시아는 최근 유가 상승에 힘입어 연평균 7%라는 고도 성장을 기록하며 소비 시장 또한 급성장하고 있다. 시베리아가 품은 무궁무진한 자원과 러시아의 엄청난 소비 시장을 겨냥한 ‘총성 없는 전쟁’을 현장 취재했다. 러시아는 더 이상 먼 나라가 아니다. 러시아인 2명 중 1명은 LG전자나 삼성전자의 가전제품으로 집안을 채운다. LG전자와 삼성전자는 러시아 시장에서만 연 15억 달러 이상 벌어들인다. 러시아의 모든 사람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오리온 ‘초코파이’와 한국야쿠르트의 ‘도시락’ 라면을 간식으로 먹는다. 러시아에서 수입차를 타는 사람 10명 가운데 셋은 현대·대우·기아 자동차와 같은 한국산 자동차를 이용한다. 블라디보스토크를 포함한 연해주의 러시아인 2명 중 1명은 KT 자회사인 엔테카(NTC)의 통신 서비스를 이용한다.

LG전자 8개 제품, 시장 점유율 1위

남한 면적의 1백71배가 넘는 거대한 나라 러시아에서 한국 기업들이 일군 성과는 그야말로 눈부시다. 러시아 이웃 나라 카자흐스탄의 대통령은 “누가 LG를 한국 기업이라고 말하는가. LG는 카자흐스탄 기업이다”라고 자랑스러워한다. 또 지난 9월 중순 모스크바를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이 왜 ‘기업이 나라’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러시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LG전자 러시아 법인의 목표는 러시아를 ‘LG 공화국’으로 만드는 것이다. 방대한 러시아 전역에 LG ‘깃발’을 꼽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LG전자는 현재 러시아 전역 2백 개 주요 도시에 단독 브랜드 숍을 내는 데 성공해 러시아에서 가장 방대한 유통망을 갖추고 있다. LG전자 변경훈 러시아법인장은 “산골 마을에 있는 매장까지 LG전자 제품이 진열되지 않은 곳이 없다. 지방까지 퍼져 있는 단단한 유통망이 8개 가전제품이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한 비결이다”라고 설명했다.

시장에서의 성공은 LG전자의 에어컨·오디오·진공청소기·전자레인지 4개 제품이 지난해 러시아 국민 브랜드로 선정되는 개가를 올리게 했다. 러시아 국민 브랜드는 러시아 전역을 대상으로 러시아 국민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20개 소비자 품목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해서 뽑았다. 러시아 제품 가운데 국민브랜드로 선정된 것은 자동차·맥주를 비롯한 8개 부문이었다.
LG전자의 성공 신화는 1998년부터 시작된다. 그 해부터 LG전자는 각종 프로모션을 통해 ‘LG 붐’을 조성했다. 해마다 28개 주요 거점 도시를 순회하면서 LG페스티벌을 개최하고, LG 요리 교실을 열었다. 지금도 러시아의 유명 가수를 초청한 콘서트, ‘미스 LG 선발대회’ ‘LG 가라오케 경연대회’ 등으로 구성된 LG페스티벌이 열리면 그 지역은 축제의 장으로 변한다. 콘서트 막바지에는 러시아 가수의 선창에 따라 지역 주민들이 다함께 ‘LG송’을 부른다. 러시아어로 바꾼 LG송은 현재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 가운데 하나이다. LG 페스티벌이 열리면 보통 수만 명이 몰려든다. LG전자 모스크바 지사 정석준 부장은 “LG페스티벌 기간에는 지역 주민 절반 가량이 우리 제품 하나 이상을 구입한다”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문화·스포츠 마케팅 효과 만점

LG전자는 현지 실정에 맞추어 차별화한 제품으로 러시아인들을 사로잡았다. 러시아 요리 3백 가지의 레시피가 내장된 전자레인지, 난방과 냉방 겸용 에어컨, 홈 가라오케 시스템을 장착한 오디오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겨울의 나라’ 러시아에서 연간 35만 대 이상 판매하는 에어컨이 ‘효자 상품’으로 자리잡았다. 이승조 LG전자 페테르부르크 지사장은 “여름과 겨울 두 계절밖에 없는 탓에 러시아인들은 간절기 추위와 더위에 약하다. 이 점에 착안한 냉난방 겸용 에어컨을 내놓았는데, 대히트였다”라고 말했다. 노래방이 한국의 음주 문화를 바꾼 것처럼 홈 가라오케 시스템을 장착한 LG전자의 오디오는 러시아인들의 음주 문화를 바꾸어 놓았다.

삼성전자는 다른 브릭스 시장에서처럼 휴대전화·노트북·프린터 등 IT 제품에서 발군의 성적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부터 시판한 삼성전자 프린터는 고가화 전략으로 HP를 제치고 올해 시장 점유율 1위에 올라섰다. 삼성 휴대전화는 시장 점유율에서는 아직 모토롤라를 넘어서지 못했지만, 가격이 높아 매출액은 최고를 자랑한다.

삼성전자의 IT 분야는 러시아 시장에서 매년 60~70%씩 성장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2001년부터 시장 점유율보다 고부가 제품 중심으로 매출액을 높인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삼성전자 러시아 법인 은주상 부장은 “러시아 시장에서는 아직 고부가가치 제품보다는 중저가 제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올해 삼성의 고가품 매출액 비중은 지난해에 비해 배로 늘었다”라고 말했다. 볼쇼이 극장·에르미타주 박물관 등 예술 단체를 후원하고, 아이스하키와 테니스 등을 후원하는 삼성전자의 문화·스포츠 마케팅은 삼성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다. 물론 그것은 곧 매출 확대로 이어진다.

모스크바 시내 중심가에는 삼성의 디지털 제품을 전시하는 ‘갤러리 삼성’이 있다. 세련된 인테리어로 꾸민 이곳에는 삼성의 최고급 제품들만 모아놓았다. ‘갤러리 삼성’에서 만난 대학생 크세리아 양은 “이곳에 오면 인터넷을 이용하고, MP3에 노래를 내려받을 수 있다. 삼성 제품의 기술력은 뛰어나다”라고 말했다.

현대자동차는 러시아 수입차 시장의 차르(제정 러시아 시대의 황제)로 불리는 도요타를 지난 6월부터 연속 추월하며, 최근 수입차 시장의 1위 자리를 차지했다. 현대자동차는 러시아 시장에서 엑센트 가격의 절반밖에 안 하는 러시아산 자동차와 도요타·포드·GM 등 쟁쟁한 글로벌 기업들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대차는 올 상반기에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매출을 250% 이상 신장시키며 러시아 시장에서 급성장하고 있다. 쏘나타·클릭·투싼 등 모델을 다양화하고, 발 빠르게 애프터 서비스(A/S)를 정착시켜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어가고 있다.

기온 격차가 심한 러시아에서는 다른 나라보다 A/S 수요가 3배 이상 높기 때문에 A/S를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주요 경쟁력이다. 모스크바의 현대자동차 A/S센터에서 만난 제냐 씨(38)는 “다른 자동차 회사에서는 A/S 한 번 받으려면 몇 달씩 걸리지만 여기서는 그 날 바로 해결된다. 현대차 하면 ‘빠른 A/S’를 떠올리는 러시아인들이 많다”라고 말했다. 오리온 초코파이, 파이 시장 50% 장악

LG·삼성·현대 ‘빅 스리’만 깃발을 펄럭이는 것은 아니다. 오리온과 한국야쿠르트는 러시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오리온 ‘초코파이’와 한국야쿠르트의 ‘도시락’ 라면은 동네 슈퍼는 물론 기차역과 공항 등 러시아 어디서나 쉽게 살 수 있을 만큼 인기가 높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에서 ‘도시락’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은 러시아인들의 새로운 여행 문화로 자리잡았다.

1991년 러시아 시장에 진출한 한국야쿠르트가 지금까지 판 ‘도시락’은 14억 개가 넘는다. 이것을 일렬로 늘어놓으면 지구를 한 바퀴 돌고도 남는다. 러시아인들은 ‘라면=도시락’으로 생각할 정도여서 도시락을 본뜬 모방 제품까지 나온다. 아예 ‘도시락’이라는 한글을 거꾸로 배치해서 포장한 라면을 내놓은 회사도 있다. 이 모방 제품을 시장에서 몰아내기 위해 한국야쿠르트는 1년 넘게 법정 투쟁을 벌여야 했다. 도시락이 러시아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현지화 전략. 한국야쿠르트 정창진 블라디보스토크 지사장은 “스프에 빵을 적셔 먹는 러시아인의 문화와 잘 맞아떨어졌고, 현지인 입맛에 맞추기 위해 매운 맛을 줄인 전략이 적중했다”라고 분석했다. 사각 용기여서 기차나 선박 안에서 안정적으로 먹을 수 있고, 용기를 반찬통이나 화분으로 재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이점으로 작용했다.

오리온 초코파이는 러시아 파이류 시장에서 50%가 넘는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한 사람이 1년 동안 초콜릿을 5kg 이상 먹을 정도(한국인은 0.69kg)로 단맛을 좋아하는 러시아인들에게 초코파이는 매력적인 간식이다. 오리온 초코파이의 인기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세계적인 식품 회사 네슬레는 얼마 전 초코파이와 생김새가 똑같은 비스켓을 러시아 시장에 새로 선보였다. 겉만 보면 초코파이로 착각할 정도이다. 독일의 대표적인 제과회사 페레로 사는 자사의 초콜릿 제품을 오리온 초코파이 옆에 진열하라는 영업 지침을 내리고 있다. 오리온은 초코파이의 성공을 발판으로 모스크바에 현지 공장을 설립해 ‘초코보이’라는 과자를 생산하고 있다. ‘초코보이’로 제2의 오리온 열풍을 만들어내겠다는 전략이다. 인종 차별·치안 불안 뚫고 ‘승전가’

러시아 최고의 이동통신회사인 MTS가 연해주에도 들어왔지만, 엔테카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요금 세분화, 관광객을 겨냥한 프리페이드 서비스(선불을 내고 휴대전화를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 등 엔테카의 선진적인 마케팅 전략 앞에서 러시아 최고의 이동통신 회사들이 맥을 못추고 있다. 연해주 주지사가 엔테카의 서비스를 배우기 위해 엔테카 고객센터를 방문할 정도로 엔테카의 마케팅 전략은 이 지역에서 가장 앞서 있다. 엔테카 윤한성 부장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과 모바일 인프라를 가진 한국에서의 경험이 큰 자산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러시아에서 한국 기업들이 일군 성과는 거저 얻은 것이 아니다. 러시아 비즈니스 전쟁터에 파견된 ‘수출 전사’들에게는 투쟁기가 숱하게 많다. 국내 기업으로는 최초로 모스크바에 생산 공장을 설립한 오리온은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중국에서는 법인을 설립하는 데 도장이 2백 개 필요하지만, 러시아에서는 공식적인 도장만 3백 개가 필요하다. 비공식적 도장까지 합하면 셀 수가 없다.

오리온 김정수 러시아 법인장은 “어떤 일을 개선해 달라고 요구하면 온갖 인종 멸시 발언을 하면서 ‘그런 것까지 요구하려면 네 나라에 가서 사업하라’고 큰소리치는 것이 러시아 공무원이다.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려는 마인드라고는 전혀 없다. 치사해서 접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라고 털어놓았다.

LG전자 러시아 주재원들에게는 휴일이 없다. 주재원 20여 명은 모두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가방을 싸들고 러시아 각 지역에 흩어진 딜러들을 만나러 국내선 비행기에 올랐다가, 일요일 저녁이면 제자리로 돌아가 자기 업무를 시작한다. 마케팅 담당자뿐 아니라 모든 직원이 출장길에 나선다. 러시아 안에서만 움직이는 데도 시차가 10시간 이상 나고, ‘술 없이는 비즈니스가 안되는’ 러시아 문화 때문에 지역 딜러와 만나면 쓰러지기 직전까지 보드카를 마시는 경우도 허다하다. ‘수출 전사’들은 불안한 치안으로 인해 신변 위협 또한 적지 않게 받는다. LG전자 어경하 블라디보스토크 지사장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스킨헤드(백인우월주의자)족들로부터 거리에서 두 차례나 폭행당해 병원 신세를 지는 사고를 겪기도 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난 LG전자 막내 주재원 최성식 과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근 이 도시에서 가장 큰 노트북 매장에 우리 제품을 넣느라 애를 먹었다. 하루가 멀다 않고 찾아가 온갖 방법으로 사장을 설득했지만 제품을 넣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LG 하면 러시아 국민 브랜드’인 요즘도 이렇게 힘든데, 10여 년 전 LG도 코리아도 몰랐던 이 땅에 맨 손으로 들어와 성공을 일군 선배들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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