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의 진수 보여준 여인들
  • 윤석진 (충남대 교수·국어국문학) ()
  • 승인 2005.0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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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송지나·노희경·인정옥, 자기만의 세계 구축…여배우와 ‘찰떡궁합’
새해 벽두부터 안방극장의 공기가 심상치 않다. 절대 강자를 가리지 못했던 2004년의 아쉬움을 떨쳐버리겠다는 듯 방송사마다 회심의 카드를 던지면서 안방극장의 분위기를 달구고 있기 때문이다. 초반 레이스에서 <해신>과 <봄날>이 앞서가고는 있지만, 그 가운데 어떤 드라마가 절대 강자의 위치를 차지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한 편의 드라마가 시청자의 지지를 받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으뜸은 역시 완성도 높은 극본이다. 그러나 최근 드라마는 짜임새 있는 극본에 탄탄한 연출력과 연기력이 더해졌을 때 시청자의 절대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망각한 채 출생의 비밀이나 불치병에 걸린 주인공의 안타까운 사랑, 혹은 신데렐라와 캔디 같은 정형적인 모티브를 단순 복제하면서 스타 시스템으로 승부수를 던지는 경우가 많다.

엉성한 극본과 얄팍한 스타 시스템의 결합은 한류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우리 드라마의 경쟁력을 좀먹는 악이다. 이것이 왜 문제인지는 김수현과 송지나, 노희경과 인정옥 등 완성도 높은 극본과 각기 다른 색깔을 보여주는 작가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탄탄한 극본과 자신의 의도를 100% 구현해주는 ‘아바타’와 같은 배우와의 찰떡 궁합으로 완성도 있는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40여 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변함없이 시청자의 절대 지지를 받고 있는 김수현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방송작가로 <새엄마> <신부일기> <사랑과 야망> <사랑과 진실> <사랑이 뭐길래> <청춘의 덫> <완전한 사랑> 등을 통해 일일 연속극과 주말 연속극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숨 돌릴 틈 없이 긴박하게 전개되는 이야기,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짧고 간명한 대사, 저마다의 처지를 고루 대변하는 주변 인물 배치와 삶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의제 설정 등은 김수현 드라마만이 가진 색깔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의 마술사 김수현은 연기파 배우 제조기

김수현은 배우들에게 혹독한 작가로도 유명한데, 배우의 연기까지 직접 지시하는 극본 때문에 김수현 드라마를 거쳐 간 배우들은 대부분 연기파 배우로 거듭 태어났다. 1980년대의 차화연과 1990년대의 심은하, 그리고 2000년대의 김희애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여명의 눈동자>와 <모래시계>를 통해 스타급 작가로 발돋움한 송지나는 정치·사회적인 문제들을 멜로 드라마 구조에 녹여냄으로써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절제된 대사와 영상미를 강조한 극본으로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의 경계를 흔들었던 송지나는 이후 <카이스트>를 통해 과학 드라마의 전형을 만들고, <대망>과 같은 작품을 통해 퓨전 사극의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한 편의 멜로 드라마에서도 얼마든지 사회적인 발언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작가 송지나의 분신은 고현정·이은주·이요원 같은 배우들이었다. 이들은 자기 주장이 강한, 그래서 지성미가 넘치면서도 동시에 청순미를 겸비한 외유내강형 인물들로 시청자의 사랑을 받았다.
MBC <베스트 극장> <엄마의 치자꽃>을 통해 안방극장에 입성한 작가 노희경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과 <내가 사는 이유>로 작품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이후 <거짓말>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바보 같은 사랑> <슬픈 유혹> 등의 드라마가 높은 완성도와 달리 시청률 면에서 그리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노희경을 자기 세계가 분명한 작가로 자리 잡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희경 드라마의 매력은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인 일상을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해 마치 한 편의 시와 같은 대사로 보여준다는 데 있다.

노희경은 강한 듯하면서도 한없이 약한 내면 연기에 탁월한 배우 배종옥을 통해,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두려워 애써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쇠락한 청춘에서 길어 올린 순수를 표현할 줄 아는 배우 배종옥은 드라마에 스며든 노희경의 분신이라 할 수 있다. 2004년 최고의 화제작 가운데 하나인 <꽃보다 아름다워>는 노희경의 장점이 유감없이 발휘된 드라마로 오랫동안 우리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인정옥, 기존 드라마의 뒤통수 때리다

쿨하게 변한 세상을 반영하지 못하고 여전히 질퍽한 이야기에 머물러 있던 기존 드라마의 뒤통수를 치며 등장한 <네 멋대로 해라>는 2000년대 변화한 청춘의 모습을 담아내면서 새로운 마니아 층을 형성했다. 이 드라마 한 편으로 양동근은 고만고만한 청춘 스타에서 자기만의 연기 색깔을 가진 배우로 거듭 태어났고, 이나영 역시 CF 요정 이미지에서 벗어나 자기 세계가 분명한 배우로 도약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작가 인정옥은 2004년 <아일랜드>를 통해 자기 색깔을 더 분명히 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일상의 속살을 헤집으면서도 결코 질척거리지 않는 인정옥의 이야기 전개 방식은 젊은 세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그 반응이 극히 일부에 머물러 아쉬움을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옥의 스타일이 한국 드라마의 다양성을 담보하는 증거임은 분명하다.

김수현과 송지나, 노희경과 인정옥처럼 각기 다른 색깔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했거나 구축해가고 있는 작가들의 드라마는 최근 블록버스터급의 화려한 볼거리에서 한 발짝 비켜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분명 영상 예술이다. 그런 만큼 아름답고 화려한 볼거리가 많아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짜임새 있는 극본이다. 구성이 탄탄한 극본을 만나야 감각적인 영상과 스타 시스템도 빛을 발할 수 있다. 이 평범한 진리를 잊지 않을 때 드라마를 통한 한류 열풍도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안방극장에 쏟아지기 시작한 새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의 시선이 불안한 것도 이들 드라마가 극본의 짜임새보다 화려한 영상과 스타 시스템에 기대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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