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건 ‘위대한 비행’항공산업 살렸다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9.03.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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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이진호 소령, ‘지붕’ 날아간 시제기 안착시켜
하늘을 날아가던 비행기의 지붕이 갑자기 벗겨진다면? 지붕이 날아간 민항기를 소재로 한 어떤 영화에서는 승객들이 고함을 지르고 일부가 비행기 밖으로 빨려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그러나 비행기 지붕이 날아가면 과연 소리를 지를 수나 있을까?

2000년부터 양산에 들어갈 공군의 기본 훈련기 KT1은 우리 손으로 설계하고 제작한 최초의 터보 프롭 제트기이다. 겉모습은 짜리몽땅하지만, 이 항공기의 성패에 한국 항공산업의 미래가 달렸다고 하여 ‘웅비’라는 애칭이 붙었다. KT1은 개발 과정에서는 KTX1로 불렸다.

그런데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서 제1회 서울 에어쇼 팡파르가 울려퍼지던 96년 10월21일, 경남 사천비행장을 이륙한 KTX1 시제 3호기의 지붕이 ‘진짜로’ 벗겨졌다. 너무나 엄청난 일이어서 극비에 부쳐졌던 이 사고가 최근 공개되었다.조종사 ‘뱉어버린’ 시제 1호기

사고의 주인공은 제3 훈련비행단 소속 이진호 중령(41·공군2사 3기). 당시 이중령은 공군 전투발전단 소속 시험 비행 조종사로 계급은 소령이었다. 그 날 이소령은 만 피트(3천m) 상공에서, 동정압(動靜壓) 보정 시험을 위해, 1백50 노트에서부터 10 노트씩 속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2백 노트에 도달한 순간 ‘펑’ 하는 폭발음과 함께 항공기가 출렁거리고, 가슴이 답답해져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뭔가가 씌운 듯 아무리 눈을 뜨려고 해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위로 올라갈수록 공기 밀도가 적어지기 때문에 항공기의 속도가 빨라진다. 속도계에는 2백 노트로 표시되어도 실제 속도는 2백40 노트(시속 4백44㎞)에 이른다. 시속 4백44㎞인 바람을 정면으로 받으면, 영화 <마스크>의 주인공이 마스크를 떼어낼 때처럼 얼굴 살갗이 기묘하게 늘어난다. 산소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강한 바람이 가슴을 압박해 숨을 쉴 수가 없다. 이소령이 앞을 보지 못한 것은 고글(선글라스) 틈새로 들어온 강한 바람이 아래 눈꺼풀을 위로 밀어 올렸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이소령의 뇌리에 두 가지 모습이 떠올랐다. 먼저 KTX1과 함께 그가 사망했다고 발표되었을 때 오열하는 처(김인숙)의 모습이 떠올랐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매년 초 유서를 작성해 작은 함에 넣어둔다. “내가 죽기 전에는 절대 열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에, 가족은 유서가 들어 있는 줄도 모른다. 아내가 유서를 발견하고 또 한번 오열하는 모습이 떠오르자 이소령은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격 등으로 조종 불능 상태가 되면 전투기 조종사들은 조종석을 사출(射出)시킨 뒤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다. KTX1의 사출 핸들은 조종사의 두 다리 사이에 있다. 이소령이 사타구니 사이로 손을 뻗는 순간 95년 11월25일 서울기지에서 추락한 시제 1호기 모습이 떠올랐다. 곡예 기동인 ‘임멜만 기동’을 연습하던 시제 1호기는 KTX1의 배 부분을 하늘로 향하는 ‘배면(背面) 비행’에 들어간 순간 갑자기 조종석이 사출되었다.

KT1은 훈련기이므로 앞좌석에는 조종 훈련생이, 뒷좌석에는 교관이 타도록 ‘전후 복좌(複座)’로 설계되어 있다. 당시 시제 1호기 KTX1의 앞좌석에는 시험 비행 조종사 정영식 소령(공사 32기)이, 뒷좌석에는 ‘시험 비행 기술사’ 백헌영 대위(공사 36기)가 타고 있었다. 전투기 조종석 아래에는 사출용 작은 로켓이 있다. 사출 핸들을 당기면 이 로켓이 점화되는데, 이때 조종사는 지상보다 9배나 높은 중력(9G)을 받고 튕겨 나간다. 9G는 대단한 압력이므로 꼿꼿한 자세가 아니면 척추뼈가 탈골된다. 다리를 앞으로 오므리지 않은 채 사출되면 다리가 조종석 패널 등에 부딪쳐 잘려 나가기도 한다.

눈 깜박할 사이에 앞좌석에 있던 조종사가 사라지자, 백대위는 ‘사고’를 직감하고 사출 핸들을 잡아 당겼다. 두 장교가 낙하산을 펴고 지상에 내려올 때쯤 조종사를 잃은 KTX1은 지상에 떨어져 폭발했다. 3, 4번 요추가 탈골되어 병원으로 옮겨진 정소령은 “사출 핸들을 당기지 않았는데도 조종석이 저절로 사출되었다”라고 주장했다. KTX1의 사출 핸들은 40 파운드(18㎏) 이상으로 당겨야 조종석을 사출시킨다.

공군과 조종석 납품 업체인 영국의 마틴베이커 사가 합동 조사에 착수했는데, KTX1의 사출 핸들은 배면 비행시 10 파운드(4.5㎏)의 힘을 받아도 작동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배면 비행을 하면 조종사의 체중이 머리 쪽으로 쏠린다. 이때 조종사는 무의식적으로 양 다리를 오무리므로, 사출 핸들에 10 파운드 정도 힘이 가해질 수 있다. 정소령은 이런 상황이었기에 ‘저절로’ 사출된 것이다.

개발 과정에서 추락한 항공기는 개발된 뒤에도 기피 대상이 된다. 이소령은 지상에서 완성된 시제 1호기를 처음 하늘로 띄운 조종사이다. 한 번도 난 적이 없는 항공기를 처음 타는 것은 ‘죽음’을 담보로 한다. 목숨을 건 초도 비행을 성공시켰기에 96년 당시 이소령은 KTX1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었다. 사고 순간 ‘나까지 사출해서 시제 3호기마저 추락하면 KTX1 개발 사업은 끝이다’라고 생각한 이소령은 사타구니로 향하던 손을 스스로 거두어들였다.

조종사들은 5점식 안전 벨트를 맨다. 양쪽 어깨와 좌우 허리, 그리고 사타구니 안쪽에서 나온 벨트로 온몸을 조종석에 결박한다. 때문에 강한 바람 앞에서 이소령은 겨우 고개만 숙일 수 있었을 뿐 상체를 조종간 안쪽으로 낮출 수 없었다. 하지만 조종간에는 조종석을 조종사 앉은키에 맞추어 상하로 이동시키는 버튼이 있다. 이 버튼을 눌러 최대한 조종석을 낮추고 동시에 파워를 줄여 속도를 줄이자, 비로소 눈을 뜨고 숨을 쉴 수 있었다. 급히 사천비행장을 불러 ‘비상 상태’를 호출한 그는, 조종간 안에서 고개를 돌려 위를 살펴보았다. 맙소사! 조종석을 덮는 유리 덮개(캐노피)가 사라지고 없었다.

KTX1의 캐노피는 기체와 나란히 여닫는데, 캐노피가 옆으로 열리면서 기체를 때려 ‘펑’하는 충격이 왔던 것이다. 그 순간 유리는 깨져 나가고 철사처럼 찌그러진 철제 프레임만 남아서 이소령의 얼굴을 겨누고 있었다. 나중에 블랙박스를 분석하자 사고에서부터 이때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23초였다. 하지만 이소령에게 23초는 23년만큼이나 길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러는 사이 속도는 1백20 노트, 고도는 7천 피트(2천1백m)로 떨어져 있었다. 속도가 더 떨어지면 추락한다. 한국 최초 시험 비행 조종사 이진호

이소령은 사천비행장에서만 12년을 근무했기에 주변 지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스틱을 부여잡은 이소령은 이따금 고개를 기체 밖으로 빼내 아래 지형을 살펴보며 사천비행장을 향해 날았다. 10여 분 후 이소령은 순전히 ‘감’만으로 시제 3호기의 바퀴를 사천비행장 활주로에 닿게 하는 데 성공했다. 시제 3호기가 활주하는 동안 바로 곁에 소방차가 함께 달렸다. 그러나 이소령은 2차 사고를 일으키지 않고 정지했다.

‘뭔가 찜찜한 것은 반드시 사고를 일으킨다’는 것을 가리켜 ‘머피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소령은 KTX1을 탈 때마다 캐노피의 잠금 장치가 확실히 작동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역시 잠금 장치에 문제가 있었다. 이소령이 사출되어 시제 3호기가 추락했다면, KTX1은 캐노피 잠금 장치가 잘못된 것을 발견하지 못한 채 개발이 완료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KT1은 ‘병아리 조종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었다.

시험 비행 조종사는 생명보험에 가입하는 유일한 전투기 조종사이다. 비행기는 육상 근무 설계자들이 처음 개발하지만, 온갖 비행 조건 속에서 시제기를 몰아본 뒤 결함을 발견해 항공기를 ‘완성’시키는 것은 시험 비행 조종사이다. 이때 결함이 발견되면 육상 설계자들은 수 차례 수정 작업에 돌입한다. 이처럼 목숨을 걸고 비행기의 안전성을 최종 검증하는 사람이 시험 비행 조종사다.

이중령은 한국 최초의 시험 비행 조종사이다. 제1호 시험 비행 조종사로 선발되어 1년간 영국의 국제시험비행조종사학교(ITPS)에서 공부했을 때 들인 학비가 무려 75만 달러였다. 가난 때문에 부모와 헤어져 자란 그는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획득해, 지금은 없어진 2년제 공군 2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이러한 학력인데도 출중한 조종 기술과 영어 실력으로 그는 ‘75만 달러 사나이’가 되었다.

29개월 전 그가 만약 KTX1을 버리고 탈출했다면 KT1은 ‘웅비’가 아니라 비행을 졸(卒)하는 ‘졸비(卒飛)’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국 최초 제트기와 한국 최초 시험 비행 조종사의 절묘한 만남이 한국 항공산업을 하늘 높이 띄워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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