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잔치로 치른 광주항쟁 열여섯 둘
  • 나권일 광주 주재기자 ()
  • 승인 1996.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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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멩이·최루탄 사라진 16번째 5·18… 시민 함께 잔치 한마당
5·18 광주 민주화운동 16주기를 맞은 올해 광주에서 열린 추모 행사는 최루탄으로 얼룩졌던 여느 해와 달리 시민들의 밝은 표정 속에 다양한 문화 행사 위주로 치러졌다. 5·18특별법 제정과 전두환·노태우 씨 구속이 가져온 시대 변화를 실감케 했다.

광주시와 전남도는 ‘5·18 민중항쟁 제 16주년 기념 행사위원회’(위원장 강신석 목사)가 주도한 모든 행사에 행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행사 비용 총 1억9천여만원(광주시 1억5천만원, 전남도 4천만원)도 시·도비로 전액 부담했다.

대학생들 역시 행사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돌멩이와 쇠파이프가 오가는 격렬한 시위는 자제했다. 학생들의 시위 진압에 매달려 왔던 전남경찰청은 행사 지원과 질서 유지, 행사장 주변 교통 정리에 치중했다.

도청앞 광장과 광주역 등 광주항쟁 격전지에는 5·18 16주기를 맞는 대형 현수막과 광고탑이 설치되어 ‘시민 잔치’ 분위기를 돋우었다. 18일 하루 동안 광주·전남 지역의 공공기관은 조기를 게양했고, 광주 시내 중·고등학교 대부분도 자체적으로 추모제를 지내거나 추모곡을 방송하며 영령들에 대한 묵념을 했다.

광주·전남은 한마음, 정치권·정부는 무관심

특히 18일 오전 10시 망월동 5·18 묘역에서 거행된 16주기 추념식은 광주시와 5·18 광주민중항쟁유족회가 주관해, 송언종 광주시장과 허경만 전남도지사를 비롯한 지역 단체장들과 전남경찰청 간부, 신한국당과 국민회의 소속 의원 등 5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려 16년 만의 첫 민관 합동 행사라는 의미를 남겼다.
5·18행사위원회는 ‘5·18의 전국화에서 세계화’를 내걸고 시민들의 적극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학술과 문화 행사를 다양하게 기획해 시민 잔치를 도모했다. 5·18 관련 행사 가운데 압권은 14일 조선대 운동장에서 있었던 ‘KBS 열린음악회’였다. 5·18기념재단과 개교 50주년을 맞은 조선대가 공동으로 주관한 열린음악회는 10만 인파를 헤아리는 광주 시민의 열띤 참여 속에 조영남·이선희·안치환 등 유명 가수의 노래와 흥겨운 국악이 곁들여 잔치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시민들은 서로 어깨동무한 채 <5월의 노래>와 <광야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등 5월 정신을 담은 노래를 합창하며 80년 5·18의 대동(大同) 정신을 되새겼다.

17일 전남도청앞 광장에서 3만여 시민이 참여해 열린 전야제는 과거 민중 가요와 노래극 일색에서 벗어나, 전국 각지의 노래패들로 구성된 ‘1천인 대합창’과 현대무용, 관현악 연주 등을 선보이며 레이저 빔과 멀티비전을 사용한 대규모 문화 공연으로 치러졌다. 전야제에 참석한 박현호씨(31·광주시 두암동)는 “시민이 흥겹게 참여할 수 있는 문화 행사가 많아졌다. 과거 한풀이와 투쟁 중심의 행사보다 경건하고 뜻깊은 잔치 형태의 행사 내용에 만족한다”라고 밝혔다.

‘저항’과 ‘대동’으로 집약되는 ‘광주 정신(Kwangjuism)’을 전세계에 널리 알리고 계승하자는 것도 올해 행사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광주시민연대모임(대표 윤장현)이 주최한 ‘5·18 정신 계승 인권과 평화를 위한 제1회 국제 청년 캠프’에는 뉴질랜드·태국·필리핀·東티모르 등 세계 20개국에서 인권·평화 단체 관계자 40여 명이 참여해 제3세계 인권운동의 연대를 결의했다. 시민연대모임은 인터네트에 ‘5·18 홈페이지’도 개설했다.

움바야 유엔 인권위원, 홀거 하이데 독일 브레멘 대학 교수 등 국제 청년 캠프 참가자들은 도청앞 전야제 행사에 참석해 시민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투사의 노래>와 <광주출정가>를 합창해 인종을 초월한 인권과 평화의 국제적 연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올해 16주기 기념 행사 역시 정치권과 정부의 외면 속에 광주·전남만의 지역 행사로 그쳐, 국가 기념일 제정 등 5·18의 ‘전국화’를 위한 산적한 과제 해결에는 아쉬움을 남겼다.

국가 기념일 제정이 무산됨에 따라 5·18 추념식의 전국 생중계는 공중파 방송 3사의 외면 속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와 달리 미국 CNN 방송은 YTN의 협조를 받아 추념식 현장과 전야제, 국민대회 등을 전세계에 중계해 대조를 보였다. 5·18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는 것과 관련해 지난 4월 ‘광주방송’과 광주사회조사연구소가 전국 1천4백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국가 기념일 제정 찬성은 호남권(83.3%) 부산권(37.7%) 중부권(35.0%) 충청권(32.8%) 대구권(30.7%) 순으로 나타나 지역에 따라 큰 편차를 드러냈다. 따라서 이 문제는 국민적 합의에 도달하기까지 상당 기간 진통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 ‘생색내기·체면치레’에 바빠

이와 관련해 광주시는 지난달 국가 기념일 제정이 당분간 어렵다고 보고 5·18을 광주시 기념일로 제정한다는 내용의 조례안을 시의회에 제출했으나 시의회는 국가 기념일이 제정되면 시 기념일 제정이 무의미하다는 이유로 조례안 통과를 반대해 현재 계류되어 있다.

정치권의 외면도 5·18 추모제를 지역 행사로 전락시킨 주요 원인 중의 하나로 지적됐다. 신한국당은 특별법 제정과 전두환·노태우 씨 구속 등 ‘역사 바로 세우기’를 생색내기에 바빴다. 국민회의 역시 총선 이후 경색 정국에 매달려 국가 기념일 제정과 국립묘지 승격을 촉구하는 ‘체면치레’에 그쳤다는 비판을 받았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추도사를 낭독하려던 시도는 정치색을 배제하려는 행사위원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5월 관련 단체들은 26일까지 기념 행사를 마무리한 뒤 전두환·노태우 씨 등 5월 학살 관련자 재판 감시와 미국 공개 사과 촉구 운동에 주력할 계획이다. 시립묘지인 망월 묘역의 국립묘지 승격, 학살 관련자 서훈 취소와 상훈 치탈, 5·18 관련자 전원 처벌 등 특별법 후속 조처도 정부에 강력히 요구할 예정이다.

5·18 광주항쟁 16주기를 맞는 지금, 광주는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투쟁의 성과를 정리하고 독재에 항거한 ‘광주 정신’을 전국화해야 할 기로에 서 있다. 5·18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는 일은 그 핵심으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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