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사 보복인가? 문충일씨 아들 의문사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1995.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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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사 마약왕국 탈출한 문충일씨 장남 ‘의혹의 죽음’…가족, 타살 가능성 제기
지난 6월13일 서울 천호동에 있는 강동 가톨릭병원 영안실에서는 한 장례식이 쓸쓸하게 치러졌다. 지난해 8월 쿤사 마약왕국을 탈출한 뒤 유엔의 난민 판정을 받고 귀국한 문충일씨 일가족 중 6월10일 한강에서 변시체로 발견된 장남 문 철군의 장례식이었다. 문상객이라고 해야 그동안 문씨 가족의 구명과 정착을 도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관계자들 및 귀국 후 문씨의 이웃이 된 남양주시 미금제일교회 신도 몇 명이 고작이었다.

간단한 장례 예배 절차가 끝나자 문군의 시신은 곧장 경기도 성남시 성남화장터로 향했다. 아버지 문충일씨는 아들의 유골을 깊은 산중에 뿌리면서 끝내 오열하고 말았다. “그렇게도 그리던 조국에 들어와 아들을 잃었으니, 마약 조직에 쫓기며 살던 타국에서 잃은 것보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요.” 문씨는 이렇게 말하며 문상객들을 ‘위로’했다.

문군의 사망 원인은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사건 수사를 맡은 서울 강동경찰서 형사과는 6월12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행한 부검의 완전한 결과가 나와야 수사를 계속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경찰은 일단 자살 또는 사고로 인한 익사가 아닌가 보고 현재까지 수사에 손을 놓고 있는 상태이다.

정부의 난민 정책은 허점투성이

그러나 문충일씨 가족을 비롯해 주변에서 정착을 도운 사람들은 타살되었을 수도 있다는 의혹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문씨 일가족이 쿤사 마약조직에 쫓기다 난민 판정을 받고 국내에 들어왔다는 특수한 사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그동안 문충일씨 가족을 보호해온 미금제일교회 신병철 목사는 “문씨 일가족이 귀국한 뒤 쿤사지역 메수야 마을에서는 문충일씨의 상사였던 쿤사의 지역사령관 장덕재 교장이 금년 1월 미국 연방마약수사국 요원들에게 체포돼 미국으로 끌려갔다. 이 사실은 우리 교회가 그 지역에 파송한 선교사에게서 확인했다”고 전한다. 신목사에 따르면, 장덕재 지역 사령관은 문씨 일가족이 귀국한 직후 현지의 한국인 선교사에게 ‘귀국까지는 눈감아 주겠지만 우리 정보를 알렸다가는 가만 두지 않겠다고 전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문충일씨는 귀국 후 탈출 지역의 국제 마약거래 실태를 제보한 바 있다. 미국은 이미 쿤사를 미국내 헤로인 다량 유입의 최고 책임자로 지목해 국제적인 마약사범으로 뉴욕 법정에 기소해 둔 상태이기 때문에 쿤사의 심복을 체포한 것은 쿤사를 잡으려는 계획의 하나로 보인다.

물론 이런 정황만 가지고 문군의 죽음을 쿤사와 연결된 국내외 마약 조직의 소행으로 추정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그러나 사고 후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그같은 악몽을 떠올리며 문군의 죽음이 타살이 아닌가 하는 의혹과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평소 수영을 잘하는 문군이 강을 자살 장소로 택할 리 없다는 점, 그리고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과, 옷에 변이 있었고 부검 당시 위장과 폐에 물이 차 있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경찰의 자살 추정을 믿지 않고 있다.

특히 문군이 실종되기 이틀 전인 6월3일 함께 밤을 보내며 의형제를 맺은 서울 구의 아멘교회 장득영 목사(동부경찰서 경목)는 지능범에 의한 타살로 확신한다. 그는 “시신을 자세히 살폈는데 자살 시신이 아니었다. 오랜 경목 생활로 숱한 시신을 보았다. 나는 철이의 시신을 보는 순간 살인 청부 전문인 또는 특정 국가 차원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은 고도의 살인 수법을 썼구나 하는 것을 직감했다”고 말한다. 장목사는 또 “철이가 사망 전에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저를 미행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며 안타까워했다.

장목사는 이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을 경우 남은 가족에게 제2, 제3의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고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그는 문군이 실종된 지 이틀 뒤인 지난 6월7일(시신 발견은 6월10일) 건장한 사내 2명이 교회로 찾아와 문군을 찾다 돌아갔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그들의 행적이 이번 사건과 모종의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본다고 주장했다.

문군의 사인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최종 부검 결과가 나오고 이에 따라 철저한 수사가 진행돼야 밝혀지겠지만,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든 이번 사건은 정부의 난민 수용 및 보호 정책이 얼마나 허술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무엇보다 문충일씨 일가족은 귀국 10개월째를 맞은 지금까지 정부로부터 보호 받기는커녕 정착 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주거는 물론이고 생계를 위한 직업도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정부는 지난해 11월20일 문씨 일가족 4명에게 한국 국적을 내줬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때문에 문씨는 교회의 도움으로 수도권 각지의 교회를 돌며 ‘간증’ 연설을 하고 그 강연료로 생계를 꾸려왔다.

이들은 귀국 후 마땅한 거주지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미금시에 있는 철거 대상 연립주택에서 임시로 살아 왔다. 그러다 철거 통지가 떨어지자 지난 6월5일 근처에 전세방을 얻어 이사했다.

문군은 이 날 이삿짐을 푼 뒤 잠깐 바람을 쏘이러 간다며 나갔다가 실종된 뒤 닷새 만인 6월10일 한강에서 변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사망한 문군은 귀국 후 한국 사회에 적응하려고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온 것으로 확인된다. 자신을 구출해준 조국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겠노라며 매일 아침 신문을 돌리는가 하면 자진해 헌혈을 하기도 했다. 또 한동안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에 나가 ‘장애인 체험대회’ 같은 행사를 돕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문군은 배움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75년 중국 내몽고에서 태어난 그는 그곳에서 조선족 중학교까지 마치고 천안문 사태 이후 부모를 따라 미얀마로 탈출했기 때문에 중학교 과정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신변 보호·정착 지원 절실

귀국 후 배움에 대한 그의 열망은 남달랐다고 한다. 이미 스무 살이 됐기 때문에 정부의 특별한 배려가 없이는 정규 교육을 받기 어려웠다. 그는 독학을 결심하고 서울 고려학원에 다니면서 고교 검정고시 과정을 준비했다. 학원에 다니던 4월께 그에게 징집 영장이 날아 들었다. 그는 학업과 사회 적응 노력을 포기하고 5월부터 입영 준비를 해오다 변고를 당했다.

문군이 귀국 후 한국에서 살아온 과정은 문씨 일가족을 난민으로 받은 뒤 취한 한국 정부의 태도에 큰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더구나 문군은 태어나서부터 20년간 타국에서 살다 귀국했다는 점으로 볼 때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것에 관한 한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주민등록증을 발급해 준 지 채 한 달도 안돼 신체검사 통지서를 보내고 불과 몇 달 만에 징집 영장을 발부한 것이다.

유엔에서 난민이라고 판정한 문씨 일가족을 정부 차원에서 받아들이기로 한 외무부 인권사회과도 마찬가지이다. 한 관계자는 “사실 공항에 들어온 뒤부터 정부는 대책이 없었다. 난민을 받아들인 경우는 처음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씨 가족의 구명과 정착을 위해 활동해온 KNCC 인권위원회는 이번 사고를 유엔난민구제고등판무관실에 보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유엔난민구제고등판무관실은 난민을 데려간 국가가 난민을 제대로 보호하고 있는지 관심을 기울이는 일도 하기 때문이다.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 들어와 채 정착도 하기 전에 문군을 잃은 나머지 가족은 망연자실한 상태이다. 당장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쌀과 돈이 아니다. 이 땅에서 남은 가족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와 공포이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문군의 사인을 한점 의혹 없이 밝히고, 남은 가족의 신변을 보호하며, 정착을 위해 최소한의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을 염려하는 주변 사람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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