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념의 철벽'' 뚫고 생명들이 살아온다
  • 김 당 기자 ()
  • 승인 1995.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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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그가 살아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보란 듯이 망각이라는 터널을 빠져나왔다. 매몰된 지 2백30여 시간, 날짜로 치면 9일 14시간 만이다.

최명석씨(수원전문대 2년 휴학)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막 빠져나온 사람답지 않은 여유와 싱싱함으로 온 국민의 일요일 아침을 들뜨게 했다.

최씨는 구조되는 순간부터 구조반원들이 시력 보호를 위해 얼굴에 씌운 노란 손수건을 자기 손으로 코 부근까지 벗겨 올릴 만큼 온전했다. 또 최씨를 현장에서 응급 처치한 의사 박규남씨(강남 성모병원 응급의학과)에 따르면, 최씨는 구급차에 실려 후송되는 동안에도 동승한 부모 최봉렬·전인자 씨에게 “아버지 어머니, 저는 괜찮아요. 걱정마세요”라고 안심시키고 사고 직전까지 함께 있던 친구들을 걱정하리만큼 여유가 있었다.

그의 낙천적 성격은 병원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나서 기자회견을 자청한 데서도 엿보였다. 최씨는 손을 움직일 수 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싱긋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승리의 V자를 표시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무너진 건물더미 속에 갇혀 있는 동안 마셨던 콜라 맛을 잊지 못하겠다는 듯이 “콜라가 먹고 싶다”는 말도 했다. 그는 또 의사들한테 자기는 건강하다며 “주사 놓지 말아 달라”고 엄살을 부리기도 했다. 67년 지하 1백25m 갱도에 매몰되었다가 15일 9시간 만에 구조된 양창선씨(당시 36세) 이후 28년 만의 ‘기적 같은 인간 승리’를 기대했던 취재진한테, 그는 “한 이틀 자고 온 느낌이다”라고 말해 싱거운 느낌이 들게 하리만큼 순박해 보였다.

오히려 ‘기적 같은 감동의 드라마’는 최명석씨의 일가족과 아버지의 형제 7남매와 외숙부 3명이 보인 눈물겨운 구조 노력에서 찾을 수 있었다.

최씨의 아버지와 숙부·외삼촌 등 일가족 20명은 사고 첫날부터 최씨가 매몰된 지점으로 추정된 백화점 북관(생활관) 주변을 맴돌며 직접 삽과 해머를 들거나 구조팀에게 물과 장비를 날라주는 등 릴레이 구조 작업을 벌였다. 어머니 전씨 또한 열흘 동안 삼풍주유소 한켠에 신문지를 깔고 새우잠을 자면서 자원봉사 구조대원들에게 물과 음식을 날랐다. 아들이 구조될 때까지 실종자 가족이 모여 있는 서울교대 체육관에도 가지 않고 현장 근처의 삼풍주유소에서 줄곧 가족과 함께 지내온 전씨는 “아들이 죽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 기적의 주인공은 사고대책본부 실종자 명단에 올라 있지 않았다. 그는 실종되었지만 그의 가족들 마음 속에서는 처음부터 ‘실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명석씨의 기적은 또 다른 기적을 낳았다. 최씨의 생환이 체념과 절망에 빠진 구조반원들과 실종자 가족 그리고 온 국민에게 희망을 주자 그 희망은 그로부터 이틀 만에 다시 유지환씨(여·19·백화점 지하 1층 도자기코너 근무·큰 사진)에 대한 극적인 구조로 이어졌다. 매몰된 지 11일 21시간 만의 생환이었다. 체념의 철벽을 뚫고 살아나오는 생명들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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