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테나]여성계 "성희롱 사건, 법원이 희롱했다"
  • 金恩男 기자 ()
  • 승인 1995.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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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우조교 사건, 원고 패소 판결… ‘일반 평균 여자’가 성적 괴롭힘의 판단 기준돼야
‘성적 괴롭힘’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전 서울대 조교 우아무개씨(27)와 지도교수 신아무개씨(54) 간에 벌어진 이른바 ‘성희롱’ 재판 항소심 판결에서 재판부(재판장 박용상 부장판사)는 ‘희롱’이란 낱말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모호하게 한다는 일각의 지적을 받아들여 이를 ‘성적 괴롭힘’이라 고쳐 부르겠다고 전제했다.

진일보한 용어가 말해주듯 재판부는 판결에서 성희롱(‘성적 괴롭힘’도 아직 합의된 용어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성희롱’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을 법적으로 정의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번 판결을 위해 미국의 유사 사건 판례 20여 건을 정밀 검토했다는 재판부의 말이나, 재판부가 A4 용지 21쪽에 이르는 판결문 중 7쪽 가량을 성희롱 실태를 살피고 행위 유형과 판단 기준을 정의하는 데 할애한 대목이 이를 증명한다.

재판부는 ‘성적 괴롭힘’이라는 행위 유형이 현행법상 법이 금하는 대상으로 명문화돼 있지 않으므로, 새로운 유형의 불법 행위를 인정하려면 더욱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신중히 검토한 결과는 우조교의 패소라는, 1심 판결을 뒤엎은 결과로 나타났다.

재판부의 이번 판결을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신교수의 성적 접근에 대한 우조교의 거부와 재임용 탈락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조건적 성희롱 이론) △신교수가 몇 차례 우조교의 신체에 접근한 것은 인정되지만 그것은 성적 괴롭힘이라 규정할 수 없는 경미한 수준으로 굴욕적인 근무 환경을 조성하지는 않았다(환경형 성희롱 이론).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이 두 번째 결론이다. 보복성 해고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둘째 치고라도, 성적 접근 행위를 인정하고도 그것이 성희롱이 아니라면 성희롱의 기준은 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서울대 조교 성희롱사건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의 주장이다. 재판부는 건전한 품위와 예의를 지닌 ‘일반 평균인’의 처지에서 성희롱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여자 3명이 성희롱이라고 느낀 행위를 남자는 1명만이 성희롱이라고 느낀다는 연구 결과는, 남녀 관점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준다. 그래서 미국 법정은 ‘일반 평균인(reasonable person)’이 아닌 ‘일반 평균 여자(reasonable woman)’의 관점을 성희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채택하고 있다.

나아가 공대위측은 재판부 개개인의 보수적 성향을 문제 삼고 있다. 특히 재판장 박용상 부장판사에 대해서는 해임 촉구 및 탄핵 소추 움직임마저 일고 있다.

공대위에 참여하고 있는 참여민주사회연대는 박용상 부장판사가 80년 신군부 출범 당시 언론 장악의 ‘끝내기’ 순서로 평가되는 ‘언론기본법’ 제정 실무대책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으로 깊숙이 관여한 점을 지적하면서 △파리바은행 여성 노조쟁의부장 박현옥씨의 해고무효확인 소송에 패소 판결을 내린 것(91.2) △현대자동차 해고 노동자(92.4)와 진주 경상대 ‘지리산 결사대’(92.6) 항소심에서 관련 피고인들에게 1심보다 높은 형량을 선고해 놓고, 그 직후인 92년 7월 참깨 밀수조직 두목을 집행유예로 풀어주었다가 석방 3일 만에 그가 다시 마약 밀수 혐의로 구속돼 사회적 물의를 빚었던 사건 △애인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김기웅씨에게 항소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했다가 나중에 진범이 밝혀져 풀려난 사건(93.9) 등 박부장판사가 내렸던 판결을 근거로 “그가 노동자·여성 등 약자의 인권을 무시하고 강자의 논리만을 대변해 왔다”고 결론짓는다.

남·녀 대립구도로 변질

성희롱 문제는 성 문제라기보다는 ‘고용’ 문제이다. 안전하고 쾌적한 근무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제기하는 것이다. 법조계나 여성계가 성희롱 문제를 남녀고용평등법에 포함하려 노력하는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이다. 항소심에서 우조교는 서울대 총장과 정부를 소송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성희롱의 가해자뿐 아니라 안전한 근무 환경을 제공하지 못한 사용자에게 책임을 묻는 수준까지 나아가는 듯했던 성희롱 논의는, 남성과 여성의 대립 구도로 변질돼 버린 느낌이다.

우조교의 1심 승소 이후 군포 ㄷ전자 사건, 태백 장성병원 사건 등 줄을 이은 성희롱 고발과 여성들의 승리도 이번 판결로 ‘빛바랜 전리품’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 여성단체들의 평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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