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보잉의 봉인가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2.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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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5 가격 인하도 ‘눈속임’ 의혹…시민단체, 계약 철회 촉구
국방부는 최근 보잉측과 추가 협상을 벌여 차세대 전투기로 선정된 F15의 가격을 일부 낮추었다고 발표했다. 보잉 사가 제시한 44억6천7백만 달러에서 2억3천만 달러를 깎아 42억6천4백만 달러로 최종 결정했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프랑스 닷소 사가 제시한 라팔 기종 가격인 42억6천8백만 달러보다 4백만 달러가 싸다고 강조했다. 경쟁 기종에 비해 미세하게나마 싸다는 점을 내세워 권력형 로비 의혹을 희석하려고 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냉정히 살펴보면 국방부가 이끌어냈다는 F15 가격 인하는 눈속임 성격이 강하다. 이미 지난해 9월 보잉 사는 42억4천7백만 달러를 제시했다가 국방부가 흡족해 하자 6개월 뒤 최종 제시안에서 금융비용 2억2천만 달러를 추가했다. 따라서 가격을 낮추었다기보다 당초 보잉이 제시한 가격으로 돌아간 셈이다.



“보잉, 회계 조작 일삼는 위험한 기업”



국방부는 내친 김에 대통령의 최종 재가를 받아 보잉과 본계약을 체결한다는 방침이다. 참여연대 등 3백여 시민·사회 단체로 구성된 `‘FX 공동 시민연대’는 국방부의 이런 방침에 강력히 반발해 FX사업 불법 로비에 관련된 의혹을 받고 있는 김동신 국방부장관을 지난 5월21일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이들은 그동안 최규선씨와 김홍걸씨, 권노갑씨의 아들, 김동신 국방부장관 등을 거명하며 F15 로비 의혹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해 왔다. 특히 시민단체는 지난해 8월 국방부가 ‘불법 로비 행위가 밝혀질 경우 사업자 선정이 이루어진 뒤라도 계약 자체를 백지화한다’라는 서약을 FX사업 입찰 참여업체들로부터 받았다고 공표했다는 점을 들어, 최규선씨의 불법 로비 혐의가 불거지고 있는 보잉과의 F15 구매 계약은 원천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방부는 이런 주장을 터무니없다고 일축하며 사업을 강행하고 있다. 국방부가 추진하는 대로 일이 성사되면 한국은 보잉 사에 대단한 ‘은인’이 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정부 들어서만 한국이 보잉 사에 안겨준 민항기와 전투기 계약액은 무려 62억 달러가 넘는다. 한국은 1998년 김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 미국을 방문했을 때 20억 달러어치 선물 보따리를 보잉 사에 안겨주었다. 당시 대한항공 사장과 함께 방미한 김대통령은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워싱턴에서 보잉 사와 민항기 20억 달러어치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이튿날 김대통령을 만난 클린턴 대통령은 전날 이루어진 보잉 사와의 계약에 대한 감사 표시로 인사말을 시작했다. 당시 보잉 사는 민항기 제작 시스템이 노후화해 생산성이 악화된 상태였다. 1997년 5월 보잉의 위기를 조사하기 위해 구성된 특별팀은 ‘우리의 생산 시스템은 완전히 붕괴된 상태이다’라는 내용을 담은 비밀 보고서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보잉 사로서는 설상가상으로 세계 민항기 시장에서 누려오던 독점적 지위를 프랑스 에어버스에 빼앗길 처지에 놓였다. 2000년 국제 민항기 시장에서 에어버스는 2백74대, 보잉은 2백72대를 판매했다. 또 신규 수주 물량에서도 에어버스(3백75대)는 보잉(3백35대)을 추월했다. 특히 초대형 민항기 시장에서는 에어버스 사의 A 380 기종이 85대나 팔린 반면 동급인 보잉 747-400 기종은 단 14대만 팔렸다.



이처럼 보잉 사가 민항 부문에서 위기를 맞고 있는데 김대통령이 임기 안에 또다시 42억 달러에 이르는 보잉 사 전투기 구매를 재가한다면 미국의 특정 군수산업체에 대한 한국 정부의 `‘특별한 애정’은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될 만하다. 그도 그럴 것이 1980년대 10년간 미국 국방부가 미국 군수산업체들로부터 구입한 전투기는 연평균 3백대에 달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그 숫자는 급격히 줄어 연평균 12대에 머물렀고, 그나마 대부분이 1995년 이전에 이루어진 구매였다. 그만큼 보잉은 민항과 군용 부문에서 끝 모를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더욱이 지난해 미국 공군 차세대 전투기 경쟁에 나섰다가 록히드 사의 JSF에 밀려 탈락한 보잉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한국이라는 구세주를 만난 꼴이다.



보잉 사는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 육군이 추진하고 있는 차세대 헬기사업(AHX)에도 아파치 롱보우 기종을 내세워 군침을 삼키고 있다. 20억 달러에 달하는 이 사업에 대한 육군의 집착은 지난해 6월 육참총장이‘전간부는 아파치 헬기 도입을 신념화하라’는 내부 지휘 서신을 내렸을 정도이다. 지난해 말 예산 문제를 이유로 이 사업은 우선순위에서 밀렸지만 언제든지 되살아날 수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위기에 빠진 보잉에 막대한 액수의 구형 전투기를 사겠다고 나선 한국은 정작 후속 군수 지원마저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미국의 경제 주간지 <비즈니스 위크>는 최근호(5월20일자)에서 `<보잉 사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대형 특집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의 핵심 요지는 보잉 사가 1997년 이후 회계 조작을 일삼고 부실을 은폐해 26억 달러에 달하는 손실을 입음으로써 투자자에게 큰 손해를 끼쳤으며, 그 결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 같은 위태로운 기업이라는 것이다.


이 매체는 이어서 만일 투자자가 보잉의 이런 심각한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더라면 보잉의 주가는 곤두박질하고, 맥도널 더글러스와의 합병도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현대 기업의 최대 덕목으로 꼽히는 투명성이 보잉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투명성 부족으로 보잉의 신화가 무너질 수 있으며, 그럴 경우 한국의 FX사업이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국방부는 미국 국방부가 안보지원본부장 명의의 서한을 보내와 수명 주기 기간인 30년간 부품 공급을 보장하겠다고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서한이 아무런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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