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장이 무서워 가위눌린 금배지들
  • 김은남 (ken@sisapress.com)
  • 승인 2003.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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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군수·구청장들, 내년 총선 ‘막강 후보’로 떠올라… 의원들, ‘라이벌 물 먹이기’ 혈안
새신임 정국 이후 여야가 노상 쌈질만 벌이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때로는 한 식구보다 더 오순도순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단체장 물 먹이기’ 같은 것을 모의할 때가 바로 그렇다.
지난 10월16일, 국회 정치개혁특위(위원장 목요상)는 광역·기초 단체장 2백48명의 명운을 가를 수도 있는 법안 하나를 도마 위에 올렸다. 내년 총선에 출마할 단체장의 공직 사퇴 시한을 선거일 1백20일 전(현행 1백80일)으로 조정한다는 선거법 개정안이 바로 그것. 국회가 이 문제를 다루게 된 것은, 지난 9월25일 헌법재판소가 선거일 1백80일 전 사퇴 조항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에 단체장들은 다른 공무원과 마찬가지로 이제부터는 자신들도 선거일 60일 전에만 사퇴하면 총선에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국회가 또다시 단체장들에게 태클을 건 것이다. 정치개혁특위가 이 개정안을 특위안으로 확정짓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0여 분. 이 법안은 다음날 본회의에서도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되었다(찬성 1백36표 대 반대 5표). 여야, 출신 지역, 초선·다선 구분이 그 순간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단체장들, 국회에 맞서 총력 투쟁 다짐

국회의원들이 선거일 1백20일 전 사퇴 조항을 고집한 표면적인 이유는 단체장들의 조기 사퇴에 따른 행정 공백 우려 및 사전 선거운동 위험성 차단. 그렇지만 단체장들은 이것이 속 보이는 핑계일 뿐이라며 극력 반발하고 있다. 헌법소원을 이끌었던 황대현 대구시 달서구청장은 “재신임 파동으로 정국이 요동하고 있는데 정치권이 다른 개혁안들은 제쳐둔 채 단체장들의 손발을 묶는 법안만 따로 먼저 통과시킨 것을 상식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라며, 이는 이해 집단간 야합이나 다름없다고 비난했다.
10월21일 대전에서 긴급 회의를 소집한 전국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회장 김완주 전주시장) 또한 이번 개정 법률안에 대해 효력정지가처분신청을 내는 등 총력 투쟁을 벌이겠다고 다짐했다(박스 기사 참조).
그렇다면 현역 의원들은 무엇 때문에 이런 반발을 무릅쓰고 선거법 개정안을 밀어붙인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단체장들이야말로 이들에게 최대의 잠재적 라이벌이기 때문이다. 회의장 한켠에서 국회의원끼리 나누는 잡담을 들어보면 이들이 단체장에게 얼마나 경계심을 갖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누구 좋으라고 60일 전에 사퇴를 시킨답니까? 그랬다가는 단체장 전부가 내년 총선에 나올 걸요.”(ㄱ의원) “누가 아니랩니까? (단체장들이) 아주 불량한 마음을 먹고 있어요.”(ㅇ의원) DJ 정부 때 고위 각료를 지낸 한 의원은 여기 또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민선 단체장을 아예 다 없애야 돼요.”

단체장은 사실상 그 존재 기반부터가 현역 의원에게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몇몇 광역 단체장은 웬만한 중진 의원 부럽지 않은 힘을 과시하고 있다. 심지어는 ‘경기도 독립’을 선언한 손학규 경기도지사처럼 대통령을 상대로 ‘맞장을 뜨는’ 광역 단체장까지 나오는 판이다. 기초 단체장도 무시할 수 없다. 여의도에 일정 시간 묶여 지낼 수밖에 없는 국회의원과 달리 기초 단체장들은 지역에서 3백65일 유권자들과 부대끼며 ‘막걸리 스킨십’을 쌓을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예산 집행이나 공사 인허가권·인사권 등을 적절히 활용해 지역 민심을 주무를 수도 있다. ‘단체장의 일거수 일투족은 모조리 사전 선거운동’이라는 국회의원들의 볼멘 소리는 그래서 나온다.

더욱이 내년은 상황이 더 수상쩍다. 3선으로서 2006년에 임기가 만료되는 단체장이 전국에서 44명에 이른다(76쪽 표 참조). 현행법상 단체장은 3선까지만 연임할 수 있다. 이들 3선 단체장이 임기를 마치고 2008년 치러질 제18대 총선에 도전할 수도 있겠지만, 현기증 나게 변화 속도가 빠른 한국 정치판에서 2년을 ‘끈 떨어진’ 상태로 있겠다는 것은 무모한 모험에 가깝다(적어도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정치권이 4당 체제로 재편된 것 또한 단체장들에게는 호기이다. 영남 한나라당, 호남 민주당 식으로 일당 공천에 목 매야 했던 과거와는 다르다. 신당이 출현해 단체장들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은 그 어느 때보다 넓어졌다. 이제는 현역 의원이 붙박이로 있어도 다른 당 간판으로 당선을 노려볼 만하다. 이부영 의원이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통합신당을 택하자 그 빈틈을 노려 한나라당 강동 갑 조직책을 신청한 김충환 강동구청장이 대표적인 예이다. 과거 같으면 자기를 발탁하고 밀어준 현역 의원에 대한 의리 때문에라도, 또는 현역 의원의 아성을 깨뜨릴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라도 자중했을 구청장이 이런 ‘반역’을 감행한 것 또한 4당 시대의 새로운 풍속도이다.

이 때문에 의원들은 안절부절이다. 특히 민주당과 통합신당에는 단체장을 의식해 오락가락 행보를 보이는 것 아니냐며 입방아에 오르는 의원도 여럿 있다. 간다, 안간다 한동안 뜸을 들이다 10월14일 결국 통합신당에 합류한 정대철 전 민주당 대표(서울 중구)가 그런 예. 정 전 대표는 본인이 연루된 굿모닝시티 사건 외에도 3선인 김동일 중구청장을 의식해 그간 신당행을 주저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총선 출마 예상자, 40명에서 70여 명으로 급증

당선자 시절 노무현 대통령의 대변인으로 활약한 이낙연 의원이나, 노대통령에게 대선 자금 50억원을 빌려주었던 이정일 의원은 반대로 단체장 때문에 평소의 ‘친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잔류를 택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이들이 신당행을 택하는 순간 지역 내 단체장들이 민주당 간판을 노리고 덤벼들 것은 거의 확실하다.

이런 상황에서 내려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은 정치권에 엎친 데 덮친 격의 ‘재앙’일 수밖에 없다. 사퇴 시한이 짧아지면서 ‘얌전하던’ 단체장까지 콧바람이 들었다는 것이 현역 의원들의 중평이다. 실제로 헌재 판결 이후 내년 총선에 출마할 것으로 거명되는 단체장 수는 40명 선에서 70명 선으로 급증했다. 이 중 출마 의사를 공개한 단체장은 아직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지만, 사퇴 시한이 다가오고 선거구 조정에 따라 분구가 되는 지역이 많아질수록 그 수는 늘어날 전망이다.
이쯤 되자 지역에서는 벌써부터 신경전이 치열하다. 최근 이명규 대구시 북구청장은 구내 복지시설 개관식에서 참석 주민 2천여 명에게 식사를 제공한 건과 관련해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같은 대구시의 임대윤 동구청장은 구청이 주최하는 축제(팔공고려문화제전)를 예년보다 1∼2개월 앞당겨 연 것이 문제가 되었다. 내년 총선 준비를 위해 행사 일정을 조정한 것 아니냐는 것이 선관위에 조사를 의뢰한 쪽의 주장이었다.
이같은 제보가 잇따르면서 단체장이 참석하는 행사장에는 가능한 한 감시 직원을 꼬박꼬박 챙겨 보낸다는 것이 선관위 관계자의 말이다. 단 그에 따르면, 내년 총선과 관련해 선관위가 단속한 선거법 위반 건수 1천1백77건 중 단체장 관련 건은 7건밖에 안된다(9월 말 현재).

총선 의식한 선심·전시 행정 펴 비판받기도

그런데도 단체장을 향한 의원들의 견제구는 갈수록 잦아지고 있다. 최근 지역에서 여론조사를 해본 결과 단체장 인지도가 만만치 않은 것으로 나와 충격을 받았다는 수도권의 한 의원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이 단체장 부친의 친일파 경력을 수집하는 등 비밀 파일을 축적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런가 하면, 지역민에게 향응을 베푼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은 한 단체장은 최근 무혐의 처분을 받은 것과 동시에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의구심을 낳았다. 평소 출마를 공언해 온 그의 행보로 미루어 보자면 무혐의 처분 이후 더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 그런데도 그가 오히려 몸을 움츠리자 주변에서는 그가 현역 의원으로부터 ‘총선 불출마를 약속하면 손을 써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는 설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단체장들의 총선 출마 움직임에 의원들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벌써부터 총선을 의식한 단체장들이 선심·전시 행정을 편다는 비판이 드높다. 중도에 단체장 직을 그만두고 총선에 출마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호소해 3선을 달성한 단체장들이 말 바꾸기를 어떻게 합리화할 것인지도 의문이다. 그럼에도 단체장들이 17대 총선에서 최고의 블루칩이라는 데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단체장의 힘’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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