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헤매는 지도부 '작심삼일' 당론
  • 안철흥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0.11.3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탄핵 정국’ 맞아 1주일 사이 세 번이나 바뀌어… 당내에서도 ‘전략 부재’ 비판 높아
검찰총장과 대검 차장에 대한 국회 탄핵 소추가 무산되었다. 그러나 11월18일 한나라당이 탄핵소추안을 다시 내기로 함에 따라 정국은 일정 기간 혼미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일단 검찰권 공백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는 막았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탄핵 정국의 최대 피해자 또한 민주당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국회 파행의 책임을 온통 뒤집어쓰게 되었고, 당면한 제2차 구조 조정을 위한 추가 공적 자금 조성과 실업대책 마련 등 산적한 현안에서도 야당의 협조를 얻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사태가 이렇게 흐르자 민주당 안에서까지 원내 지도부의 지도력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여야는 국감 이후 검찰총장 탄핵소추안, 공적 자금에 대한 국정조사, 김용갑 의원의 ‘2중대’ 발언 파장 등 굵직한 현안을 놓고 총무회담을 벌여 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정균환 총무를 비롯한 민주당 지도부는 한나라당에 계속 밀리기만 했을 뿐 한번도 정국 주도권을 쥐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한나라당이 탄핵소추안를 발의한 지난 10월13일 이후 한달여 동안 민주당 원내 지도부가 보인 행태는 오락가락 그 자체였다는 평이다.

여야 총무가 탄핵소추안을 놓고 본격적인 회담에 들어간 것은 11월8일. 이때까지만 해도 민주당의 입장은 ‘본회의 보고 불가’였다. 정균환 총무는 이 날 아침 열린 당무회의에서 당론을 재확인한 후 총무회담에 들어갔다. 그러나 1시간 만에 당론을 독자적으로 뒤집어 야당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후 열린 의원총회에서 정총무는 “국회 파행을 막아야 할 책임이 있다”라고 합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1주일여 만에 여야 합의를 다시 한번 뒤집었다. 11월16일 정균환 총무는 “한나라당이 발의한 검찰총장 및 대검 차장에 대한 탄핵소추안은 법적인 요건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본회의 상정 자체를 거부하겠다”라고 밝혔다.

민주당의 원내 대책이 이처럼 1주일 사이에 세 번이나 바뀐 것은 원내 의석 수 부족이라는 원천적인 한계 때문이다. 한나라당 의석 수 1백33석에 4석만 더해지면 과반수가 넘는 현실에서 민주당의 대야 협상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한 자민련이 탄핵 정국을 독자적인 생존 영역 확보의 장으로 활용하려 들면서부터 민주당의 협상 여지는 더욱 줄어들었다. 한때 본회의 상정 후 표결 불참이나 자민련 설득 후 부결 방안을 검토하던 민주당은 ‘위험 부담’ 때문에 아예 상정 자체를 막는 쪽으로 돌아섰다. 민주당이 탄핵소추안 상정 거부라는 당론을 최종 확정한 것은 11월16일. 탄핵소추안 표결을 불과 이틀 남겨둔 시점이었다.

그러나 민주당 안에서는 이런 외부적인 요인 외에도 내부적인 전략 부재가 더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최근 들어 당 지도부가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비단 이번 일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용갑 의원의 ‘2중대’ 발언에 대한 대응 역시 미숙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사태가 발생한 직후 여론의 흐름은 ‘김용갑 의원이 무리수를 두었다’는 쪽이었다. 한나라당도 당혹해 하며 조기 수습에 나섰을 정도였다. 그러나 민주당은 사태 초기에 초강경 대응으로 국회를 공전시켰을 뿐 정국 주도권을 잡는 데는 실패했다. 다음날 한나라당이 강경 입장으로 돌아서고 나서야 민주당은 국회 정상화에 급급해 ‘속기록 삭제와 한나라당 정창화 총무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수준에서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우위를 끝까지 살리지 못하고 시간을 끌다 오히려 상대에게 끌려다닌 셈이다.

더욱이 여야 합의로 국회 정상화를 합의한 직후 김용갑 의원 징계안을 제출하면서 파행의 책임을 민주당이 온통 뒤집어쓸 수도 있는 상황을 만들기까지 했다. 한나라당의 반발로 징계안 제출은 취소되었지만, 이미지는 이미 구긴 뒤였다. 모처럼 맞은 호기를 너무 쉽게 상대에게 내준 셈이다.
11월10일 여야 총무회담에서 합의한 ‘공적 자금 집행 내역 등에 대한 국정조사’도 당내에서 논란거리다. 이 역시 당론은 국정조사 수용 불가였지만 2차 공적 자금 국회 동의라는 시급한 현안을 이유로 ‘무조건 후퇴’를 해버렸다. 한 의원은, 시간을 끌며 줄 것과 받을 것을 계산하는 치밀함이 없었다고 원내 지도부의 전략 부재를 질타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당 지도부가 여야 대결 의식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예가 한나라당 이주영 의원에 대한 제명 결의안이다. 이주영 의원의 ‘KKKP’ 발언이 있자 민주당은 검찰에 이의원을 고발하고 제명 결의안을 내는 한편, 당내 율사 출신들로 하여금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을 제한하는 방법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이런 무차별 공세는 실효성 없는 정치 공세에 불과했다. 정치권의 공방에 검찰을 끌어들인 것 자체가 정치권의 위상 격하를 불러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또한 의원 직을 박탈하려면 국회 본회의에서 3분의 2 이상 찬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 가능성은 전무한 실정이다.
따라서 당내에서조차 지도부의 대야 대책에 대한 불만이 나오고 있다. 초선인 장성민 의원은 “공작 정치 근절이란 슬로건은 과거 여당에 야당이 당할 때 내걸던 것인데, 여당이 공작 정치를 당했다면서 대책위를 만든 것 자체가 희극이다”라고 말했다. 한 의원은, 정치 공세 차원에서 면책 특권 축소를 주장하는 것은 빈대 잡자고 초가 삼간 태우는 격이라면서 당의 근시안적인 대처 방식을 꼬집었다.

이렇듯 즉자적인 정치 공세만 펴는 지도부 때문에 민주당의 정체성이 실종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개혁 정당임을 주장하면서도 사안마다 대응하는 형태는 과거의 여당과 달라지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지도부는 항상 과거의 여당보다 낫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그러나 국민들의 보는 눈과 요구 수준이 달라졌는데 과거와 비교하려고만 하면 되겠느냐.” 최근 사태를 지켜본 민주당 한 당직자의 말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