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정부의 ‘민관 합작 실험’ 1년 점검
  • 김 당 기자 ()
  • 승인 1999.04.0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대중식 제3의 길 정체성 점검/노사정 위·민화협 통해 ‘참여 민주주의’ 모색중
집권 2년째를 맞은 김대중 정부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규정하면 무엇일까. 김대중 대통령 본인은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병행 발전’이라는 틀을 설정했지만, 진보적 지식인들은 그것의 작동 원리를 신자유주의라고 하고 더러는 신보수주의라고도 한다. 온통 신(新)자투성이인 세상이라지만, 이른바 노동 시장의 유연화와 정리 해고가 최대 쟁점인 시대가 되다 보니 더 그럴듯하게 들린다. 물론 김대중 정부의 경제 정책에서 신자 돌림 주의(主義)를 갖다 붙일 만한 요소는 적지 않게 발견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허전하다. 김대중 정부의 정체성에서 ‘제3의 길’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 관심을 끄는 것은 제3의 길 이론을 주창한 영국 런던 정경 대학(LSE) 앤서니 기든스 학장의 발언이다. 사실 김대통령 본인이나 정부 고위 관계자 누구도 김대중 정부의 노선이 제3의 길을 표방했다고 한 적은 없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한국을 방문한 기든스는 12월에 출간된 크리스토퍼 피어슨 교수(영국 노팅엄 대학)와의 대담집 〈기든스와의 대화〉(21세기북스)에서 ‘좌우 대립은 물론 지역 대립에 시달려온 한국인들에게 제3의 길은 이 모든 갈등을 뛰어넘는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기든스가 제3의 길에서 핵심으로 내세우는 평등(부·권력·남녀·선진국과 후진국·인간과 생태계)과, 이를 정치 노선으로 채택한 이른바 블레어리즘의 실용주의는 DJ의 그것과 닮은 점이 적지 않다.

물론 국내에서도 그동안 학술 차원에서 DJ 정부의 노선을 제3의 길로 보고 탐색하는 수준의 논의가 없지 않았다. DJ 정부에 ‘현실 참여’하고 있는 황태연 교수(동국대)는 ‘서구 좌파 정당의 제3의 길과 새 정치’(〈담론 21〉 99년 봄호)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DJ가 이끈 새정치국민회의의 형성과 이 당의 정책 프로그램을 제3의 길로 해석했다. 그러나 상당수 학자들은 여전히 좌파 정치의 전통이 강했던 서유럽에서처럼 중도좌파 정부가 집권해야만 비로소 제3의 길이 가능하다는 판단에 기초하여, 이런 조건이 결여된 사회에서는 제3의 길이 의미가 없다는 논거를 펼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상황이 서유럽의 그것과 다르다고 해서 한국에서 제3의 길은 불가능하다거나, DJ 정부와 제3의 길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둘 사이의 ‘암묵적인 관계’를 현실에서 작동하는 정책 프로그램을 통해 주체적인 시각으로 탐색한 학자는 한상진 정신문화연구원장(전 서울대 교수)이다. 같은 사회학자로서 기든스가 주창한 제3의 길 이론을 국내에 소개하고, 김대중 정부의 핵심 이데올로그로 활동하고 있는 한원장으로서는 당연한 관심사이다.

“DJP 연합·햇볕정책 등도 제3의 길”

한상진 원장은 아태평화재단(이사장 한승주)이 DJ 정부 집권 한 돌을 맞아 주최한 ‘국민의 정부 1년의 평가와 전망’이라는 주제의 학술회의에서 ‘제3의 길과 민주적 시장경제’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를 해 DJ 정부 1년을 평가했다. 그는 “제3의 길의 본질적 의미와 과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양극 대립 극복과 대타협, 그리고 이에 기초한 새로운 파트너십 사회 건설에 있다”라고 전제하고, 비록 국민의 정부가 한번도 제3의 길을 주창한 적은 없었지만 양극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들을 통해 사실상 제3의 길을 추구해 왔다”라고 진단했다. 한원장은 △이념 대립을 넘어선 DJP 연합 △냉전 구조를 탈피하려는 대북 햇볕정책 △성차별을 넘어서는 남녀 평등 정책 △지역 감정을 해소하려는 국민 화합 정책 △노·사·정 협력 모델과 민주적 시장 경제 추구를 대표 사례로 들었다.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친 이같은 실험은 대부분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가치 판단이나 성공 여부를 떠나 거기에 ‘DJ식 제3의 길’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요소는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민관 합작 경향성과 시민 참여 민주주의라는 인식 체계이다.

사실 DJ 정부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로 지적되는 것은 ‘위원회 정부’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인민위원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민관 합작 기구를 지칭한다. 또 이것이 정부 조직·직제 상의 위원회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물론 과거 정부와 달리 기획예산위·금융감독위 ·공정거래위 같은 위원회 조직이 정부·금융·재벌 개혁을 주도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점에 비추어 보면 이것도 ‘위원회 정부’라는 범주에 포함할 수 있다. 특히 개방형 임용제를 도입해 구성된 기획예산위는 사실상 건국 이후 처음으로 민간이 주도하는 공공 부문 개혁을 시도함으로써, ‘철밥통’으로 지칭되는 관료 사회에 경쟁 시스템을 도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44쪽 상자 기사 참조).

DJ 정부가 지향하는 제3의 길의 요소는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노사정위원회(노사정위·위원장 김원기)·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상임의장 한광옥)·제2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제2 건국위·대표공동위원장 변형윤) 같은 실험적 기구에서 더 많이 찾을 수 있다. 민관 합작의 실험적인 협의체 성격을 띤 이같은 기구들은 각각의 영역에서 민간 참여를 확대하고,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하여 국가 정책을 수행하려는 김대중 정부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제2건국위, 물갈이 통해 시민단체 참여 유도

그 중에서도 노사정위는 DJ 정부만의 독특한 ‘등록 상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실제로 노·사·정 협력 모델은 ‘아시아적 가치’가 지배하는 권역에서는 유일하게 DJ 정부만이 추구하고 있는 모델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유럽에서도 신자유주의 노선이 강력한 곳에서는 이 모델이 작동하지 않는다. 갈등과 대립의 소모적인 노·사, 노·정 관계가 지배했던 현실에서 노·사·정 3대 주체가 역사적 대타협에 합의한 지난 1년 간의 실험은, 지지 기반이 취약한 DJ 정부가 30년간 누적된 고비용 저효율 구조와 정경 유착에 의한 부패 구조를 청산하기 위한 금융·공공 부문·노사 관계 분야의 수술을 단행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민화협은 한국전쟁 이후 보수와 진보, 정당과 사회단체가 한데 모여 통일 문제를 협의하는 최초의 기구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 정부가 주도적으로 개입해 구성한 이 협의체는 보수 우익 단체들을 대거 포섭함으로써, 남북 대화 이전에 남남(南南) 대화의 장을 마련했다는 데도 의의가 크다. 민화협은 현재 가입 회원 단체 수가 2백개를 넘어섬으로써, 그동안 관변 단체의 전유물이었던 통일 안보 분야의 논의 구조를 전면 개편하고 있다. 아직은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나 민화협은 48년 김 구 선생이 주창한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같은, 통일을 준비하기 위한 새로운 대의기구의 모체에 비견되기도 한다.

출범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제2건국위는, 정부 주도가 아니라 시민 참여 개혁을 내세운 DJ 정부의 또 다른 제3의 길이다. 인적 구성에서 민간 참여 비율이 80%를 넘지만 핵심 조직인 기획단에 정부 인사가 많아 새로운 형태의 관변 단체라는 의혹을 받은 제2건국위는, 최근 기획단 조직을 민간인으로 교체하는 등 그동안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들이 참여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던 요구 사안을 대부분 수용해 조직과 운동 방식을 크게 손질했다. 좌파 정부의 전통과 노동운동의 뿌리가 깊은 사회민주주의 기반 위에서 제3의 길을 추구한 유럽과 달리, 한국에서는 중산층을 핵심으로 한 시민 사회의 조직화한 개혁 세력과 결합하지 않고서는 개혁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DJ식 제3의 길’ 아직은 모호

그런 점에서 이같은 실험의 성공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정부의 설득과 동참 호소에도 불구하고 야당과 일부 시민단체들은 민화협과 제2건국위에 불참하거나 거리를 두고 있다. 최근에는 진보적인 단체를 중심으로 한 제2의 민화협을 결성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게다가 민주노총이 노사정위를 탈퇴해 정부가 사용자측의 양보를 요구하자 이에 반발한 경총이 탈퇴할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이같은 양태는 ‘DJ식 제3의 길’이 여전히 또는 아직은 신자유주의만큼이나 모호한 얼굴로 인식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개발연구원 장하원 연구위원은 “노동의 유연성은 신자유주의의 특성 중의 하나이지만, 한국의 노동 시장은 이미 유연해질 대로 유연해졌다. 다만 관행과 의식이 유연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을 유연화한 법과 제도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장연구위원은 “그런 점에서 DJ 정부의 정체성에 제3의 길을 투영할 수는 있지만, 왼쪽에서 보면 신보수이고 오른쪽에서 보면 신좌익으로 보일 만큼 DJ 정부의 정체성 혼란은 상당 부분 지속될 것이다 ”라고 지적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