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준 ‘대권 멍석’ 깔까
  • 이숙이 기자 (sooksisapress.com.kr)
  • 승인 2002.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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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바람 타고 ‘정치 주가’ 급등…‘월드컵 효과’ 대선까지 이어질지 관심



붉은 악마 옷을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는 대권 주자가 있는가 하면, 선거 구호를 아예 ‘정치권의 히딩크’로 바꾼 후보도 등장했다. 전국민의 관심이 월드컵에 쏠리면서 정치권의 풍속도도 빠르게 바뀌고 있다.
하지만 ‘월드컵 정치’의 최대 수혜자는 역시 정몽준 의원이 되리라는 데 이견이 없다. 그는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한 주역이자 히딩크 감독을 영입하는 과정에서 견인차 역할을 했다.



한국과 스코틀랜드 평가전이 열린 다음날 한 신문에는 이런 만평이 실렸다. 전광판에 4-1 스코어가 적혀 있고 환호하는 관중 아래 정몽준 의원과 히딩크 감독이 나란히 앉아 있다. 히딩크가 “8강도 가능!”이라고 큰소리치자, 정의원은 “너만 믿는다”라고 말한다. 그 아래 작은 글씨로 ‘대선 출마 확실’이라고 쓰여 있다.



인터넷에서는 요즘 ‘정몽준과 히딩크’라는 제목의 유머가 ‘인기 짱’이다. ‘(한국팀이) 16강에 오르면 히딩크 귀화설이 나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가슴에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히딩크는 고국으로 돌아간다. 8강에 오르면 히딩크는 강제로 귀화하게 된다. 한글로 된 히딩크 위인전이 나오게 된다. 4강에 오르면 히딩크는 정몽준과 축구당을 만들어 정계에 진출한다. 정몽준은 대통령으로 나오고 히딩크는 당수가 된다.…’



월드컵 붐이 정몽준 의원의 대권 도전과 밀접하게 연관되리라는 점을 여론이 먼저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정치권 안팎에서도 ‘이러다 정몽준 의원이 정말 대권 주자로 나서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심각하게 거론되기 시작했다. 선거 전략의 귀재로 알려진 한나라당 최병렬 의원은 최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정의원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했다. “한국이 16강에 오르고 만약 8강까지 간다면 (대권 가도에)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게 된다. 정의원은 지금도 어느 정도 정치적 위상을 확보하고 있는데, 월드컵 스타로 떠오르면 시끄러워질 것이다.” 민주당의 한 중진 역시 “정의원이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나 대권 둘 중 하나에 도전하겠다고 했는데, 국제축구연맹 회장 선거에 안 나갔으니 결국 대권에 뜻이 있다는 것 아니냐”라며 대권 도전에 무게를 실었다.



이에 대해 정의원의 한 측근은 “정의원은 축구를 정치에 이용한다는 얘기를 가장 싫어한다”라고 말했다. 대권 얘기만 나오면 ‘당분간 월드컵에만 전념하겠다’고 말꼬리를 자르는 것도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이 측근의 설명이다. 정의원은 5월9일 대구 영진전문대 특강에서도 “대권 도전 여부는 월드컵이 끝난 후에 여러분과 상의해 결정하겠다”라고 미루었다.



하지만 정의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그는 여러 측면에서 ‘월드컵’을 정치 자산으로 삼고 있다.
우선 이번 월드컵을 통해 정의원은 자신의 이미지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다. 5월31일 개막식을 지켜 보던 40대 여성은 “인물 좋고, 능력 있고, 젊고…정몽준이 나오면 무조건 찍겠다”라고 말했다. 이날 정의원은 흰색 두루마기를 차려 입고 전세계 60억 인구에게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다. 정의원과 주변 인사들이 월드컵의 부가 가치가 수십 조원에 이른다고 거듭 강조하는 것도 그 주역이 ‘정몽준’임을 간접 홍보하려는 전략이다.



정의원은 이번 월드컵을 정치권 내부의 신망을 얻는 계기로도 활용하고 있다. 월드컵 개막식을 2시간 앞둔 5월31일 오후 5시30분. 국회 본관 앞에는 관광버스 7대가 줄지어 서 있고, 그 사이를 정의원의 보좌관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개막식에 참석하려는 국회의원들을 ‘모시러’ 온 버스였다. 이날 정치인들은 경기를 보면서 간단한 다과를 나눌 수 있는 스카이 박스에서 개막식과 프랑스-세네갈전을 구경했다. 이에 앞서 정의원은 국회의원 전원에게 공짜 표를 돌렸다. 개막전·조별 리그 가운데 한 경기, 16강 이상 한 경기 등 모두 세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정의원 방에는 요즘 월드컵 표를 ‘청탁’하는 정치인들의 전화가 쇄도하고 있다.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정의원은 대북 문제에 상당히 개방적이다. 월드컵을 북한과 공동으로 개최하자는 제안이나 북한 기술위원과 선수들을 월드컵 경기에 초청하려 했던 것이 모두 그런 개방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록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월드컵을 대북 교류의 연결 고리로 삼으려 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월드컵 효과가 2002년 대선전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월드컵 효과가 2002년 대선 판도를 좌우할 핵심 변수로까지 이어지리라고 보는 사람들은 ‘정몽준’이라는 상품 가치와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라는 국민 정서에 주목한다. 부패 게이트와 정쟁에 찌든 양당 대결 구도에 식상한 국민들이 월드컵을 통해 떠오른 새 스타에게 희망을 걸 수도 있다는 얘기다.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개막식을 지켜 본 50대 운전기사는 대뜸 ‘돈’ 얘기를 꺼냈다. 정몽준은 돈이 많으니까 남의 돈 먹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동안 정의원의 대권 가도에 걸림돌이 되리라고 여겨졌던 ‘재벌 출신’이라는 한계가 아이러니컬하게도 강점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 정치학 교수는 정의원의 특화되지 않은 성향을 지목했다. 노무현 후보는 너무 왼쪽이고, 이회창 후보는 너무 오른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정몽준이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월드컵 효과가 단발성으로 끝나리라는 관측도 만만치 않다. 국민들 사이에 ‘축구는 축구, 정치는 정치’라는 이분법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한 선거전략가는 “한국 정치는 제3 세력이 틈새를 찾기 힘든 전통을 가지고 있다. 처음엔 제3 세력에 대한 기대가 만만치 않다가도 막상 선거전에 들어가면 결국 양강 구도로 굳어진다”라고 말했다. 그는 1997년 대선 초기에 29%까지 올랐던 조 순 후보 지지도가 여야 후보 확정 후 10% 아래로 내려간 것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다.



IJP(이인제-김종필)와 박근혜·정몽준, 이른바 4자 연대가 쉽지 않다는 것도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한 여론조사 분석가는 “네 사람이 똘똘 뭉쳐서 정의원을 밀어도 20% 정도를 얻을까 말까다. 그런데 JP는 결국 승산이 있는 후보에게 베팅할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셋은 다 자기가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어서 연대가 어려울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요컨대 정몽준 개인의 상품 가치는 상승세를 타고 있지만, 대선 구도 자체가 제3 후보에게 원천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결국 ‘정몽준 대망론’이 죽느냐 사느냐는 월드컵 성적과 지방 선거 이후 정치판이 어떻게 요동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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