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고지를 선점하라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2.08.1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TV토론 둘러싼 노·창 신경전 치열…“기회 잡자” “군기 잡자” 맞불
노후보가 과연 이회창 후보를 이길 수 있습니까?”
기자들이 노무현 후보 진영에 자주 던지는 질문이다. 그러면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두고 보십시오. 텔레비전 토론만 시작되면 금세 뒤집힐 겁니다”.
나이·이미지·말솜씨 등 여러 측면에서 노후보가 유리하기 때문에 텔레비전 토론만 시작되면 지지도가 급상승하리라는 것이다. 노후보 측근들은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이인제 후보를 이긴 것도 텔레비전 토론 덕이 크다고 주장한다. “이인제 후보의 정체성을 집요하게 물고늘어진 3월6일 YTN 토론 때 승기를 잡았다. 그 흐름이 광주 이변으로 이어진 것이다.”





텔레비전 토론에 대한 노후보의 기대감은 최근 몇몇 사례를 겪으면서 더욱 커졌다. 7월24일과 25일 서울 한 호텔에서는 전국 영양사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회창·노무현 두 후보는 25일 축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후보가 갑자기 24일로 일정을 옮기는 바람에 두 후보의 연설 대결은 무산되었다.
7월26일과 27일 제주도에서 열린 전경련과 중소기업협회 세미나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두 후보가 둘째 날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후보가 26일 참석으로 일정을 앞당긴 것. 이번에는 노후보도 뒤따라 일정을 변경해 결국 두 후보가 한 행사장에서 마주쳤다.
이를 놓고 노후보측은 이후보가 일부러 노후보를 피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두 사람이 한 화면에 잡히는 것만으로도 이후보에게 손해라는 판단에 따라 한나라당이 전략적으로 일정을 조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노후보에게 최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내놓은 선거개혁안은 엄청난 호재다. 선관위는 정당연설회 등 돈이 많이 드는 선거운동 대신 텔레비전 합동연설회와 방송 광고 등 미디어 선거운동을 늘리는 선거법 개정 의견을 내놓았다. 노후보측 표현대로라면 그야말로 ‘노무현을 위한 굿판’이 열리는 셈이다.
하지만 노후보 진영의 바람대로 텔레비전 토론이 역전의 계기가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우선 텔레비전 토론이 노후보에게 반드시 유리하다는 근거가 불분명하다. 한 선거 전문가는 텔레비전 토론은 변수가 많아 섣불리 유·불리를 단정짓는 것이 위험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더 큰 걸림돌은 한나라당이 텔레비전 토론에 소극적으로 나올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한나라당은 당장 중앙선관위의 선거법 개정 의견에 냉소적이다. 원칙에는 찬성하지만, 관련 법을 개정하는 데 시간이 촉박해 이번 대선에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한나라당은 기존 텔레비전 토론 횟수마저 줄일 태세다. 남경필 대변인은 “텔레비전 토론에 대해 이회창 후보만큼 준비된 사람도 없다. 노후보든 가상의 적이든 누구와 맞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다”라고 큰소리치면서도 공정성이 담보되지 않는 텔레비전 토론은 거부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공정한 텔레비전 토론은 공정한 텔레비전 보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한 자락을 깔았다. 여기서 남대변인이 지적한 ‘공정한 텔레비전 보도…’는 MBC를 겨냥한 것이다. 한나라당은 지난 5월5일 MBC가 민주당의 ‘국민경선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프로그램을 내보내자 편파 방송이라며 언론중재위에 제소했다. 지도부는 또 소속 의원들이 MBC가 제작하는 프로그램에 일절 출연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얼마 전부터 라디오 방송에 대한 규제는 풀었지만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여전히 통제하고 있다.






물론 한나라당 지도부도 언론과 이렇게 각을 세우는 데 부담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언론계에 발이 너른 서청원 대표 체제가 들어선 후 한나라당과 MBC 상층부 사이에 한동안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회창 불가론’ 문건이 공개되면서 상황은 오히려 악화하고 말았다. 민주당 일각에서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 문건 가운데 ‘텔레비전과 인터넷, 시민단체 등을 통해 이회창 불가론을 확산해야 한다’는 대목을 문제 삼아 한나라당이 ‘문건 내용대로 방송이 편파 왜곡 방송을 주도하고 있다’며 총공세를 펴고 나섰기 때문이다.



노후보 “창이 TV토론 피하려 한다”



한나라당은 이번 기회에 평소 취약점으로 여겨왔던 ‘방송’에 대해 단단히 군기를 잡겠다는 계산이다. 따라서 한나라당의 강경 기류는 한동안 계속될 조짐이다. 문화관광위 소속 의원들은 MBC 사장을 상임위에 불러내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강경파 일각에서는 공정 방송 의지가 안 보일 경우 모든 당원이 MBC 시청 거부 운동을 전개할 수도 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민주당은 이런 한나라당의 ‘MBC 때리기’를 텔레비전 토론을 최소화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라고 보고 있다. 일찌감치 방송이 불공정하다는 점을 부각해 텔레비전 토론을 회피할 명분을 쌓으려 한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만약 개별 방송사가 주관하는 텔레비전 토론을 모두 거부할 경우, 이후보는 선거법에 규정된 ‘공영 방송이 합동으로 주관하는 최소 세 차례 텔레비전 토론회’에만 출연하면 된다. MBC말고 다른 방송사가 주관하는 토론회에는 참석한다 하더라도 패널이나 질문을 고를 때 해당 방송사들이 이후보 진영에 더 신경 쓰게 만드는 간접 효과도 노릴 수 있다.



민주당이 총력을 다해 맞불 작전을 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낙연 대변인은 7월28일 논평을 내고 한나라당의 특정 방송 출연 거부는 대통령 후보 텔레비전 토론을 축소하려는 음모라고 문제 삼았다. 이를 받아 노후보는 7월31일 재·보선 지원 유세에서 “텔레비전 토론을 하면 자신 있다. 그런데 이회창 후보가 텔레비전 토론을 피하려고 한다”라고 논쟁의 불을 지폈다. 민주당이 1997년 대선 당시 신한국당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선 기획 문건까지 동원해 반격에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문건에는 ‘방송사의 기획 캠페인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등 언론 활용 방안이 자세히 담겨 있다.



선거 전문가들은 5년 전 처음 도입된 대선 후보 텔레비전 토론이 2002년 선거판을 좌우하리라고 관측한다. 그럴수록 방송을 손에 쥐려는 대선 후보간 샅바 싸움도 치열해질 전망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