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준은 동문서답의 달인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2.10.0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토론회에서 핵심 비켜가기 전술로 활용…중언부언하고 말꼬리 붙잡기도



'글쎄, <목민심서>에 보면 코끼리는 열대 동물이다, 그런 말이 있는데요. 잘 길들이면 코끼리가 온대 지방에서도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여간에 코끼리가 한반도에서 살 수 있다면 냉장고 문제도 잘 풀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냉장고에 코끼리를 집어넣는 방안을 듣고 싶다는 패널의 질문에 대해 정몽준 의원이 했다는 답변이다. 물론 실제 상황은 아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신종 ‘썰렁 유머’이다.
“글쎄, 하여간에 ~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런 ‘정몽준 유머 시리즈’가 나돌 정도로 텔레비전 생방송 토론에서 보여준 그의 화법이 화제다. 우선 지적되는 것이 동문서답이나 핵심 비켜가기 같은 것들이다. 앞에 소개한 유머처럼,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을 묻는데 코끼리와 냉장고만 이야기하고 정작 넣는 방법은 말하지 않는 식이다. 말끝을 흐리거나, ‘~하는데요’, ‘~라고 생각하는데요’ 식의 자신감 없는 말투도 끊임없이 거론되고 있다.


생방송 텔레비전 토론으로는 데뷔 무대 격이었던 9월19일 MBC <100분 토론>에서 그는 ‘글쎄’와 ‘하여간에’라는 단어를 10여 차례씩 사용했다. 두 단어 모두 자신감이 없거나 논의를 비약시킬 때 쓰는 말이다. ‘소명’ ‘정치 개혁’ ‘초당파적’ ‘국민 통합’도 그가 입에 달고 다니는 단어다.


MBC <100분 토론>과 9월25일 ‘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를 중심으로 그의 화법을 살펴보았다.
<100분 토론> 때 패널인 이필상 교수(고려대·경영학)는 공적 자금 특혜 등 현대그룹에 쏠리는 의혹을 소개한 뒤 ‘재벌 2세의 대권 출마’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정의원의 긴 답변을 요약하면 이렇다. “현대는 공적 자금을 받았지만 우리나라 경제에 도움을 준 기업이다. 그리고 현대중공업은 공적 자금을 전혀 받지 않은 건실한 회사다.” ‘재벌 2세의 대선 출마’에 대한 답변은 어디에도 없다.


이런 동문서답은 정몽준식 화법의 가장 큰 특징이다. 물론 듣기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민감한 질문이 나올 때 이런 식의 답변이 자주 나온다는 점을 보면 다분히 전술적인 계산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지엽적인 것을 꼬투리 삼아 논의를 변경하거나 지나치게 흥분하면서 위기를 탈출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





가령 <100분 토론> 때 패널로 참가한 손광운 변호사가 “1990년 지역구 주민 2천5백명을 인공 해수욕장에 초청해 접대한 일이 있죠”라고 물었을 때다. 정의원은 즉각 “인공 해수욕장이 있나요?”라며 반격했다. 패널의 실수를 틈타 ‘주민 접대 논란’을 ‘인공 해수욕장 유무 논란’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손변호사가 해수욕장 이름을 정확하게 밝힌 뒤에야 그는 사실을 시인했다.


방송기자클럽 토론에서도 말꼬리 잡기식 동문서답이 재연되었다. 패널로 참가한 김경한 YTN 경제부장이 “1991년 현대중공업 주식 6백53만주를 증여받았는데 정당한 증여였느냐”라고 묻자 그는 “1970년대부터 현대중공업 주식을 매입했다. 현재는 재산이 4, 5년 전보다 3분의 1 가치로 떨어졌다”라면서 ‘증여의 정당성’에 대한 논점을 ‘증여 시점’ 문제로 슬며시 바꾸었다. 결국 패널이 “1991년도에 국세청이 (정의원이) 6백53만주를 변칙 상속받았다며 44억원을 추징했는데 기억 못하냐”라고 확인하고 나서야 논의가 제 궤도로 돌아왔다.


이런 핵심 비켜 가기는 개인적인 질문뿐 아니라 정책이나 정견을 묻는 질문에서도 이어진다. 여기서는 여러 차례 추궁을 당하다가 “연구해 보겠다”라고 마무리짓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공적 자금 문제의 해법을 묻자, 그의 첫 답변은 이랬다. “잘 짚고 넘어가야 될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짚으실 것이냐고 재차 질문하자 이번에는 “책임 규명을 철저히 해야 되겠죠”라고 말했다. 책임을 어떻게 묻겠다는 것이냐고 또 묻자 그의 최종 답변은 이랬다. “우선 조사를 해야겠죠.” 패널은 끝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개혁 입법에 대한 입장을 물었을 때도 그는 “더 관심 갖고 연구해서 말씀드리겠다”라고 넘겼다. 다음은 아파트값 안정에 대해 장황한 논란을 벌인 뒤 나온 그의 최종 답변. “하여간에 아파트를 싼 가격으로 더 많이 공급하려면 토지에 관한 정책을 검토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몽준식 화법의 또 다른 특징은 ‘반복’이다. 그는 조금 어려운 질문이다 싶으면 사회자의 질문을 거의 다시 한번 반복한다. “~라고 여쭤보셨는데요, 아주 좋은 지적입니다”라고 말한 다음 답변을 시작하는 식이다. 시간을 끌면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간접 화법으로 질문의 예봉을 피하는 것도 그의 발언 특징 중 하나다.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에 대한 답변을 요구받았을 때, 그는 이리저리 말을 끌다가 패널이 “지금 말씀은 검찰 수사를 기다려보자, 이런 얘기로 정리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고서야, “네, 그러시죠”라고 응답했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대해서는 원론적인 언급만 하다 ‘개인 생각을 말하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기성 정치인과 달라 좋았다” 호평도


월드컵이나 축구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는 점도 특징이다. 현대전자 주가 조작에 대한 그의 해명 첫마디는 “세계청소년축구대회를 참관하고 오는 길에 그 뉴스를 들었다”였다. 자신의 정치 경험에 대한 이야기도 “세계적인 축구 선수도 후보로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라는 말로 시작했다. 국민들이 정의원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는 “축구협회장, 부유한 아버지를 둔 사람, 정치인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축구협회장이라는 직함을 가장 앞세웠다. 방송기자클럽 토론회 모두 발언에서는 한국 정치를 축구에 비유하며 “그들만의 리그였던 정치를 우리들의 리그로 돌리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통령 후보의 말이 모두 일관되고 논리적일 필요는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 토론회에서 ‘아름다운 지하 자원’ ‘우루과이 사태’ 같은 오발 발언을 연발했고, 전술 핵과 원자력 발전을 혼동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는 김대중씨와의 대결에서 승리했다. 텔레비전 토론이 활성화한 후에 벌어졌던 지난 봄 민주당 대통령 후보 토론회 때도 이인제 후보가 노무현 후보보다 토론을 잘한다는 평을 들었지만, 결국은 ‘인간적’이라는 평을 들은 노무현 후보가 승리했다.


정의원 캠프는 몇 번의 생방송 토론에서 일단 합격점을 받은 것으로 본다. 최근 캠프에 참가한 박범진 전 의원은 “대중은 토론에서 무슨 말이 나왔나를 따지기보다 전체적인 이미지를 중시한다”라면서, 정의원의 소박한 모습이 국민에게 긍정적으로 비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양한 사례를 들면서 가파르지 않게 토론을 이어가는 모습이 기성 정치인과 달라 좋았다는 평도 있다. 한나라당 관계자도 “이회창 후보의 답답한 모범생 스타일과 대비되면서 서민들에게는 플러스 효과가 나고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토론이 거듭될수록 이미지보다는 말의 내용이 부각될 수밖에 없다. 그가 80여 일에 걸친 ‘말의 터널’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토론을 잘한다고 후보의 자질이 높게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지도자라면 자기 의견을 분명한 소신을 가지고 밝힐 수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 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장에서 만난 한 정치 평론가의 지적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