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리 저지를 만 한 인물도 없데이”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3.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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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당선자 친인척 20여 명 점검/ 대부분 순박한 서민, 유혹에 약할 수도
대통령에 당선되고 맞는 첫 휴일인 지난해 12월21일. 노무현 당선자는 제주도로 1박2일 가족 여행을 떠났다. 이들이 묵은 펜션 ‘숲속의 궁전’의 불은 새벽까지 꺼지지 않았다. 이 날 가족 네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새벽 3시까지 회의를 했다. 주요 의제는 아들 건호씨와 딸 정연씨의 거취와 친인척 관리 문제였다. 5년 간은 사람들 만나는 것을 삼가고 불필요한 일을 하지 말며, 친척들이 좀 불편하더라도 철저한 감시 시스템을 작동한다는 것이 이 날 가족 회의의 요지다. 얼마 후 당선자는 국정 청사진을 내놓는 자리에서 친인척 관리 문제를 또 한번 강조했다. “(당선 이후 친인척들의) 불편이 이루 말할 수 없고 전화가 많이 와서 못살겠다고 하는데, 취임 즉시 확실한 감시 시스템을 만들겠다.”





사실 노무현 당선자는 친인척 문제에 관한 한 역대 대통령보다는 훨씬 홀가분한 처지다. 자식은 아직 어리고, 친척 가운데 정치와 권력 언저리에 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선 때도 청중 속에서 박수치는 것으로 선거운동을 다 한 친척이 대부분이었다. 당선자는 종종 “우리 집안에는 잘 나가는 사람이 없어 부정한 돈 몇 천만원만 들어와도 금방 표시가 난다”라고 말했다. 당선자의 처남 권기문씨도 “집안 남자들은 다 죽고 사람도 몇 없다. 그나마 어렵게 살아가는 서민이어서 정치권 주변에 접근할 인사도 없다”라고 했다.



변호사 조카 “정치권에 나설 뜻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친인척 비리로부터 자유로웠던 경우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현철씨는 구속되면서 “많은 사람이 나를 만나기를 원했고, 그것이 잘못된 일인지 몰랐다”라고 말했다. 이 광경을 똑똑히 지켜본 김대중 대통령 역시 직접 친인척을 관리하겠다고 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그는 두 아들을 감옥에 보내고 국민 앞에 사죄해야 했다. 친인척에게 날아드는 부나비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것이 불행의 씨앗이었다.



당선자 친인척 가운데 세간의 이목이 가장 쏠리는 인물은 외아들 건호씨(29)다. 건호씨는 최근 전화기 한 대를 더 마련했다. 아버지가 대통령 후보가 된 후로는 모르는 사람들의 전화가 하도 많이 걸려와 예전 전화기는 잘 받지 않는다. 낯선 번호도 거의 받지 않고 있다. 주로 누구를 소개해 주겠다는 내용인데, 부산에서 많이 걸려온다고 한다.



그가 재벌 기업인 LG전자에 다닌다는 것도 관심거리다. 온라인에서는 논쟁까지 벌어졌다. 대통령의 아들일지라도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지만 정책 결정 과정에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LG전자의 한 임원은 “회사 내에서는 건호씨도 신입 사원일 뿐이다. 똑같이 대할 뿐 해외 지사 파견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경영자 쪽에서 보자면 건호씨는 특별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건호씨의 결혼식에서 LG전자 구자홍 회장과 정병철 사장은 당선자의 형과 누나가 앉은 바로 옆자리를 차지했다. 결혼식 전에 건호씨는 회사 홍보실의 주선으로 기자회견을 갖기도 했다.



밖에 나서기를 꺼리는 건호씨에 비해 딸 정연씨(27)는 부모님과 함께 나서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국민 경선 때도 열성적으로 당선자를 돕는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 종종 잡혔다. 그래서인지 정연씨는 국민경선 때부터 함께 사진을 찍으려는 대의원들의 등쌀에 몸살을 앓기도 했다. 정연씨는 주한 영국대사관에 근무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셨지만 계속 이 일을 하고 싶다”라고 했다. 그러나 대통령 딸이 특정 국가의 대사관에 근무하는 것에 대해서도 걱정하는 시각이 있다.



범위를 넓혀 당선자의 친척을 훑어보아도 정치권에 힘을 쓸 사람은 거의 없다. 노당선자는 3남2녀 중 막내다. 아버지 노판석씨와 어머니 이순례씨는 작고했다. 큰형 영현씨는 5남매 중 유일하게 대학(부산대 법대)을 나왔지만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떴다. 큰 누나 명자씨(74)는 교사인 딸과 함께 부산에 살고, 작은 누나 영옥씨(64)는 김해에 산다. 둘 다 남편과 사별했다. 농사를 짓는 둘째형 건평씨(60)는 당선자와 각별한 사이다(32쪽 상자 기사 참조). 당선자의 조카 8명은 학생·주부·농부·교사·취업 준비생 등 모두 평범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친척 중에서 둘째 누이 영옥씨의 사위 정재성씨(43)가 눈에 띄는 인물이다. 그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 법무법인 ‘부산’의 변호사로 있다. 법무법인 부산은 노당선자의 절친한 친구인 문재인 변호사가 대표 변호사로 있다. 정변호사는 민주당 부산지역선대위 법률지원단장을 맡아 이번 대선에서 노후보를 직접 지원한 유일한 친척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선 이후 그는 정치권과는 바로 담을 쌓았다고 한다. 정변호사는 “개혁당 당원으로서 임명직이든 선출직이든 정치권에 나설 생각은 절대 없다. 문재인 변호사가 정계로 진출하면 대신 법무법인을 맡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권력 부나비들의 접근은 이미 시작됐다



처가 쪽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부인 권양숙씨(55)는 1남3녀 중 둘째. 장인 권오석씨는 작고했고, 장모 박덕남씨(82)는 아들 기문씨(48)와 부산에 살고 있다. 처형 창좌씨(57)는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과 함께 서울에 산다. 아들은 최근 회사를 그만두고 변리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처제 진애씨(52)는 남편 이승남씨(57)와 함께 부산에서 구멍가게를 하다가 얼마 전 그만두었다.



처남 기문씨는 우리은행 부산 범천지점장으로 이 집안에서는 가장 출세한 인물이다. 기문씨는 권여사 집안 사람 중 당선자와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기문씨는 “1년에 서너 번 서울에 출장가면 누나집에 묵으며 매형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곤 했지만 따로 정보를 수집한다거나 경제적으로 도움 준 일은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 만나는 게 직업이어서 부담스럽지만 중·고등학교 때부터 당선자를 지켜보며 당선자의 성격과 생각을 분명히 알고 있다. 누를 끼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외조카 7명 가운데 5명은 학생이고, 나머지는 각각 회사원과 교사다. 권양숙 여사는 “우리 친척은 많지도 않고 평범한 서민이다. 비리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당선자의 친인척이 평범한 사람들이어서 권력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나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통령의 권력에 다가서려고 하는 부나비들이 대통령과 가까운 친인척들을 놓칠 리 없다. 이런 모습은 지난 12월25일 오후 3시에 있었던 건호씨 결혼식에서 엿볼 수 있었다.



김해를 출발한 관광버스 2대가 오후 1시50분에 도착하면서 행사장은 북적이기 시작했다. 이 버스는 노당선자의 고향 마을인 세실에서 온 친척들과 김해의 내로라 하는 유지들로 채워져 있었다. 조수석을 포함해 빈 자리는 없었다. 자리를 잡으려고 로비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전날 올라와 당선자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건평씨가 오후 2시부터 예식장 현관 앞에서 김해 사람들을 챙겼다. 하객 중 여러 사람이 건평씨에게 “텔레비전에서 봤다. 나중에 꼭 뵙고 싶다”라는 말을 남기고 식장으로 올라갔다.



당선자는 이 날 오후 2시25분께 식장에 도착해 하객을 맞았다. 고향에서 온 손아랫사람에게는 “왔나. 고생 많제”, 윗사람에게는 “먼저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데이”라며 반겼다. 김해에서 온 사진사는 당선자와 악수하는 김해 사람을 향해 연신 셔터를 눌렀다. 어떤 이는 인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섰다. 또 옆걸음으로 세 걸음이나 다가가 당선자 옆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도 보였다. 그 중에는 당선자에게 명함을 건네며 전화를 부탁하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결혼식 뒤 가족 사진 촬영 때에는 사람들이 몰려나갔다.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당선자 뒤에 자리를 잡았다. 예식장측은 “가족이 아닌 분들은 나가 주십시오”라는 방송을 두 번이나 했지만,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당선자의 조카는 “앞에 한 스무명 빼고는 모두 처음 보는 사람이다”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혼 기념 촬영을 마친 후 당선자 부부는 경호원에 둘러싸여 사라졌다. 그러자 딸 정연씨가 표적이 되었다. 정연씨가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인사하려고 밀려드는 사람들의 경쟁은 뜨거웠다. 정연씨를 향해 플래시를 터뜨리는 사람은 수없이 많았다. 기자가 정연씨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는데 한 사람이 계속 주위를 서성이고 옆에 붙어 서기도 했다. 그 사이 사진사는 반대편에서 이 장면을 렌즈에 담고 있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당선자 친인척은 하나같이 때묻지 않은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 점이 대통령에게 반드시 이로운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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