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기밀이 도대체 뭐기에…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4.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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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기준 들쭉날쭉…국회 보안 장치는 의원·보좌관 ‘양식’뿐
여의도 국회 본관 지하 108호 국방부 연락관실. 10평 남짓한 이곳에 육군·공군·해군 등 각군 연락관들이 근무한다. 국방위원회와 예결산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요구하는 관련 자료를 해당 부서와 연결해 주는 것이 주요 업무다.

연락관 사무실 안쪽에는 간이벽을 설치한 또 다른 공간이 있다. 소파와 간이 탁자만 놓인 4평 남짓한 공간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속은 훨씬 넓다. 벽 한쪽에 대형 금고가 있다. 금고 안쪽에는 군 관련 기밀문서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곳의 공식 명칭은 국방자료열람실. 흔히 ‘비문실’(비밀문서열람실의 약자)로 불리는데 주로 국회의원 보좌관들이 이용한다. 국방부가 국회의원들이 요청한 자료를 비치해 두면 국회의원이나 보좌관이 와서 열람한다. 그래서 비문실은 자료 요구가 빗발치는 국정감사를 앞두고 자주 이용된다.

지난 9월, 국방위원회 소속 박 진 의원실의 한 보좌관도 비문실에 들렀다. 국방연구원의 미군 2사단 재배치 현안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전쟁여건 변화 모의 분석> 보고서를 열람하기 위해서다. 보고서 번호 모03-1965, 비밀 등급 2급 자료였다. 국방연구원에 자료를 요청하자, 비문실에 비치했으니 열람하라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박의원 보좌관은 비문실에 들어가 비밀취급인가증(2급)을 담당자에게 보여주었다. 담당자는 인가증을 확인하고 3중 금고 문을 열고 나서, 보고서를 가져다 주었다. 원칙적으로 열람만 가능하고 복사나 메모는 할 수 없다.

2급 비밀 자료에 비문·평문 뒤섞여

연구보고서 겉에는 2급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내용은 비문이 아닌 평문이 뒤섞여 있었다. 비문에 해당하는 페이지에는 크게 음영으로 ‘Ⅱ’라고 전체 페이지에 새겨져 있었다. 연구 보고서를 본 이 보좌관은 박 진 의원에게 보고했고, 박의원은 연구책임자를 따로 불러 대면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지난 10월4일 박의원은 이 연구보고서를 인용해 “한국군 단독으로 북한 침략을 막아야 할 경우 보름 만에 무너진다”라고 말했다. 국가 기밀 유출 논란의 시작이었다. 10월11일 박 진 의원은 또다시 군 기밀인 탄약보유량을 공개한 보도 자료를 냈다가 회수하는 소동을 벌였다.

국가 기밀 유출 논란은 고의든 실수든 국정감사 때마다 벌어져 왔다. 정보위원회·통일외교통상위원회·국방위원회에서 빈번하다. 통상 기밀은 문서 자료로 제출하지 않고 의원에게 직접 대면 보고를 한다. 국가 기밀 논란의 또 다른 당사자인 정문헌 의원도 대면 보고를 받은 경우다.

정문헌 의원은 통일부에 비상계획 업무 부서와 인원에 대한 자료를 요청했다. 통일부가 북한 체제 붕괴에 따른 대비를 축소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충무계획과 을지훈련 내용도 요구했다. 지난 9월30일 통일부 관계자는 1시간 동안 의원실에서 대면 보고를 했다. 정의원과 함께 비밀취급인가증을 가진 보좌관도 함께 보고를 받았다. 정의원은 초선이지만, 보좌관은 14대부터 국방위에서 활동한 베테랑이다. 충무계획에 대해서도 개략적으로나마 이미 알고 있었다.

10월4일 정의원은 질의 과정에서 북한 피난민 수용계획인 충무 3300과 유사시 통일부장관이 총독의 권한을 가지는 충무 9000계획 일부를 공개했다. 정동영 통일부장관은 국가 기밀에 해당한다며 속기록에서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고, 정의원도 동의했다. 하지만 다음날 일부 언론에 충무계획이 크게 보도되면서 국가 기밀 유출 논란에 휩싸였다. 정의원측 보좌관은 “보도한 언론사로부터 취재 요청을 받은 바 없다. 언론사가 독자적으로 취재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10월8일 오전 10시 열린우리당은 박 진 의원과 정문헌 의원을 국회 윤리위원회에 제소했다. 재외공관 국정감사를 위해 출국했던 정의원은 급히 귀국해, 같은 시각 국회 기자실에서 반박 기자회견을 열었다. 정의원은 “통일부의 요청에도 협조했고 1991년에도 충무계획은 공개된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가파른 전면전은 그 날 저녁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회동하면서 휴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전선이 바뀐 채 국지전은 계속되고 있다. 피감 기관들이 국가 기밀을 방패 삼아 자료 제출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당 의원도 예외가 아니다. 국방위원회 소속 열린우리당 의원 보좌관은 “지금도 열 번 자료를 요청하면 여덟 번은 비밀로 묶였다면서 제출을 거부한다”라고 말했다.
인터넷에 공개된 자료도 국가 기밀

비문 기준도 들쭉날쭉이다. 국방위원회 국감에서 논점이 되었던 북한의 장사정포 자료만 해도, 일부 의원은 비문이 아니라며 문서 자료를 받았고, 다른 의원은 비문이라며 받지 못했다. 이유는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자료 요구에 장사정포에 대한 ‘국방부의 대처 방안’이 포함되면 비문이었고, 현황만 요구하면 비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비문이 아니라며 받은 자료도 제각각이었다. 한나라당 소속 한 보좌관은 “똑같은 자료를 요청했는데 한 장짜리 답변서를 받은 의원실이 있고, 두 장짜리 자료를 받은 의원실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유를 알아보니 다름아닌 군대 문화에 있었다. 국방부는 끊어지는 답변서를 선호해, 한 장이 넘어가면 다른 내용을 채워서라도 2장을 만들어 제출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각잡기 문화’다.

베테랑 의원 보좌관들은 자료 요청 단계에서부터 치열하게 두뇌 싸움을 한다. 흔히 쓰는 전법이 ‘성동격서’다. “자료를 요청하면서 이쪽 의도가 간파당하면, 비문이라고 주지 않는다. 최대한 의도를 감추면서 여러 자료를 요구해야 핵심을 뽑아낼 수 있다”라고 한 보좌관은 말했다.

통일부장관으로 있는 정동영 의원은 1997년 국정감사 때 군사 기밀 설정 기준이 지나치게 광범위하다고 지적했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59만8천1백17건이 군사 기밀로 묶여 있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미 인터넷에 공개된 자료가 비밀로 묶여 있기 일쑤다. 초선인 열린우리당 임종인 의원도 황당한 경험을 했다. 지나치게 낮은 사병 월급을 지적하기 위해 사병과 장교 숫자를 언급하려 했지만 2급 비밀에 묶여 있었다. 임의원은 ‘국군의 77%를 차지하는 사병과 9.56%인 장교’ 식으로 피해갔다.

국방위원회뿐 아니라 정보위원회에도 국회 안에 정보열람실이 있기는 하다. 1999년 한나라당이 안기부의 정치인 사찰 분실이라며 폭로했던 525호실이 바로 정보열람실이다. 의원들만 출입이 가능하고, 보고 사항이 있으면 주로 대면 보고를 한다. 그러나 서면 답변서를 제출하더라도 담당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정보위 소속 한나라당 보좌관은 “더 묻고 싶어도 누구한테 물어야 하는지 모른다. 한마디로 정보위 관련 업무는 없다고 보면 된다”라고 말할 정도다.

외교부 문서는 거의 100%가 대외비·기밀

국가정보원과 함께 외교통상부도 국가 기밀을 방패 삼은 난공불락이다. 외교통상부는 매일 1천개가 넘는 문건을 생산하지만 거의 100%가 대외비나 기밀로 묶여 있다. 통외통위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실은 정공법을 택했다. 앉아서 대면 보고를 받기보다 직접 부딪치자는 전략이었다. 지난 9월 국정감사를 준비하며 보좌관이 외교통상부를 방문했다. 문서철을 요구해 용산기지 이전 협상과 관련한 세 상자 분량의 각종 회의록 등 관련 문서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지난 9월22일 노회찬 의원실이 용산기지 이전 협상과 관련한 2급 문건을 공개한 뒤부터 문전박대를 당하고 있다. 현장 실사를 나갔던 권영길 의원실 이용승 보좌관은 “자료 제출을 거부한 이유라도 밝히라고 했는데 아무런 대꾸도 없다”라고 말했다.

언론 플레이를 위해 국가 기밀을 다루는 의원이나 보좌관도 있기는 하다. 한 군 출신 보좌관은 “국가 기밀을 다루는 데 국회는 허점투성이다. 원칙적으로 국가 기밀은 메모도 금지되어 있지만 대부분 허용된다”라고 말했다. 국회 사무처에 따르면, 상임위원회와 무관하게 국회 보좌관은 2급 비밀취급인가증을 받을 수 있다. 국회의원 1명당 보좌관을 6명 채용할 수 있으니, 의원실당 최대 6장까지 배포되는 셈이다. 인가증은 2년마다 한 번씩 갱신된다. 국회 사무처 관계자는 “비밀 엄수에 대한 서약서를 받지만 제대로 지키는지는 양식에 맡길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국정감사 때마다 연례 행사가 되어버린 국가 기밀 논란. 그래서 이번 기회에 국가기밀법을 정비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10월11일 참여연대는 국가 기밀을 정쟁의 도구로 삼지 말고 정책적으로 접근하라고 쓴소리를 했다. 국가기밀보호법을 제정해 이번 기회에 논란의 종지부를 찍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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