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 한국전력에 ‘예정된 빙하기’
  • 고제규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0.12.1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효율·방만 경영이 ‘구조 개편’ 자초… 처방전 놓고 정부·노조 맞서
‘한해 예산 26조8천억원·사원 3만4천명·총자산 64조원·부채 31조7천억원·당기 순이익 1조4천억원.’ 한국전력(한전)의 규모다. 민간 기업이라면 재계 2∼3위를 다툴 만한 거대 기업이다. 한전은 그동안 전력산업을 독점해 오면서 덩지를 키워 왔다. 발전 부문에 한화·LG 등 민간 기업이 참여하고 있지만 6%로 미미한 수준이다. 한전은 발전뿐 아니라 송전·배전·판매를 독점했다. 두뇌는 작고 덩지는 커서 환경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공룡처럼 비효율적인 한전의 경영 문제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다. ‘전력산업 구조개편 촉진에 관한 법률’안 통과는 이러한 논란에 마침표를 찍었다.

한전의 가장 큰 문제는 ‘방만한 경영’으로 집약된다. 전력산업 구조 개편을 추진하는 산업자원부는 공적자금을 주머니 돈처럼 사용하는 주인 의식 부재를 방만한 경영의 1차 원인으로 꼽는다. 실제로 공기업인 한전은 전력 사업과는 무관한 각종 사업에 무분별하게 투자했다. 대기업의 문어발 확장을 공기업이 그대로 따른 것이다. 한전은 주력 산업과는 무관한 신세기통신·하나로통신·온세통신 등에 7천5백억원을 출자했다가 지난해 말 모두 매각했다. 또한 한국중공업과 가스공사에도 3천1백억원을 투자했었다.

한전의 방만한 경영은 정부와 정치권에도 책임이 있다. ‘공영부담금’ 명목으로 투자하는 자금은 정부의 요구로 억지 조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부담금은 과거 정권뿐 아니라 공기업 개혁을 주장했던 김대중 정권에 들어서도 개선되지 않았다. 지난해 한전은 YTN에 5백90억원을 지원했다. YTN 경영이 어렵게 되자 공기업들이 품앗이하듯 돈을 댄 것이다.
방만한 운영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또 다른 의혹은 정치권과의 커넥션이다. 국회 산업자원위원회 소속 한 국회의원은 “과거 한전은 정치 자금 금고 역할을 했을 것이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충분하다”라고 주장했다. 한전은 연료의 80% 이상을 해외에서 수입한다. 외국 회사들이 정치권의 실세를 업고 계약하면서 공급가를 일부러 높게 책정하고, 실세들에게 대가성 뭉칫돈을 쥐어 주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정치권 입김에 따라 휘둘리는 한전의 방만함은 미국의 개인 휴대통신 회사인 넥스트웨이브 사에 출자하는 과정에서도 여실히 입증되었다. 한전은 김영삼 정권 때 1백57억원을 투자했다가 1998년 이 회사가 파산해 투자액을 그대로 날렸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위인 이병로씨가 국내 업체들에 투자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정권 교체 이후 제기되었지만,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한전의 비효율 경영은 사장의 역할과 임명에서도 엿보인다. 자산 규모로 따지면 한국 2∼3위 대기업인 한전의 사장은 오직 한 사람이다. 1인 지배 체제라는 재벌의 ‘왕회장’도 계열사 사장단 10여명의 도움을 받아 투자를 집행하는데, 한 사람뿐인 한전 사장은 모든 투자를 챙길 수 없어 처장급 임원들이 수십억원을 주물렀다.

한전 사장 직은 낙하산 인사의 대표적인 사례로 치부되는 정권의 노른자위 자리다. 김대중 정권에서도 낙하산 인사는 여전하다고 한전 노조 이경호 국장은 꼬집었다. “지난 정권 때는 군화 대신 등산화가 내려왔다. 이번에는 낙하산 대신 호남선을 타고 왔다.”

1998년 5월 사장 임용 방식에 변화가 있기는 했다. 전문 경영인과 학자를 비롯한 35명이 응모한 공채에서 민주당 장재식 예결위원장의 친형인 장영식씨가 사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공채 형식으로 채용된 장사장마저 정부와 갈등을 빚다가 중도 하차했다. 당시 정확한 사퇴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박태영 산업자원부장관과 불화해 그만두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장사장은 정부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한전 사장의 처지를 보여준 셈이다.

한 한전 관계자는 “한전 사장은 이윤을 많이 내서도 안되고, 적게 내서도 안된다”라고 한전 사장의 처세술을 설명했다. 지나치게 이윤이 높으면 이듬해 전기 요금을 올릴 수 없고, 이윤이 낮으면 경영 능력을 의심받기 때문이다. 한전은 투자 비용이 전기 요금에 반영되어 회수되는 수익 구조여서 전기 요금을 올리지 않으면 수익률이 증가하지 않는다. 결국 적당한 이윤을 유지하면서 조직을 키우는 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자리가 한전 사장인 셈이다. 책임 지지 않는 윗사람의 경영 방식은 실무자급의 무사안일주의를 방치했다. ‘비리에 연루되지 않으면 58세 정년까지 월급을 받을 수 있다’ ‘부서원이 10명이라고 하면, 2∼3명만 일해도 회사는 움직인다’라고 한 관리직 사원은 털어놓았다.
무사안일주의 업무로 인한 한전의 문제점은 국정감사 때마다 제기되었고, 이번 국정감사에서도 도마에 올랐다. 국회 산자위 소속 김방림 의원(민주당)은 보령복합화력발전소의 잘못된 계약 문제를 따졌다. 보령발전소는 한전이 1996년 4월부터 3년 7개월 동안 총 9천1백50억원을 들여 준공한 복합 화력 발전소다. 문제는 발전소의 주기기인 가스 터빈을 프랑스 알스톰 파워 사에서 3천1백30억원에 도입하면서 일어났다. 알스톰 파워 사의 가스 터빈은 수분이 없는 연료 조건에서 가동하는 최신 설비다. 수분이 포함된 가스를 연소시킬 경우 치명적인 손상을 유발할 수 있어 최소한 가스 연료가 40°C 이상 유지되어야 한다.

한전은 가스공사에 40°C 이상의 가스를 공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가스공사는 20°C가 넘는 가스는 공급하기 불가능한 실정이다. 한전은 계약 때 가스 터빈의 가스 공급 최적 온도를 확인하지 않은 채 계약을 체결한 셈이다. 한전은 알스톰 파워 사에 요청해 20°C에서 가스 터빈을 운전하더라도 안전하다는 동의를 얻었다. 알스톰 파워 사는 한전측에 수분량이 증가할 경우 가스 온도를 높여야 한다고 주의를 환기했다. 보령발전소는 불안정한 상태에서 시험 운전을 하다 지난 3월 터빈의 공기 배관이 파손되어 시운전을 중단했다.

이미 건설된 발전소뿐 아니라 앞으로 건설될 발전소와 관련해서도 잡음은 끊이지 않는다. 앞으로 발전소 건설은 한전의 장기 전력 수급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 계획은 경제발전 5개년 계획처럼 막대한 설비 투자 자금이 소요되기에 정확한 예측이 필수 조건이다. “장기 수급 계획은 부처간 밥그릇 싸움의 복마전이다”라고 한전 관계자는 비꼬았다. 투자 결정의 합리성과 투명성이 결여되어 부처간 이권다툼으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원자력·화력·수력 발전 건설을 둘러싸고 관련 부처에서는 치열한 로비를 벌인다.

그러나 부처간 갈등으로 인한 재원 낭비를 감시할 방법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미래 수요 예측을 높게 잡고 투자를 많이 해도 문제되지 않는다. 부족하지만 않으면 성공했다고 자화자찬한다.”

전력 구조 개편에 대한 상이한 주장처럼 방만한 경영에 대한 처방 역시 엇갈린다. 정부는 분할 매각해 독점 구도를 타파하고 경쟁을 도입하는 ‘대수술’을 처방책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한전 노조는 책임경영제를 도입하는 ‘주사약’ 정도의 처방을 주장했다. 12월3일 노조의 파업 철회로 한전의 구조 개편은 정부안대로 이루어질 전망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