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전자는 90년 6월1일 창업한 이후 8년여 동안 국내 최대 멀티 미디어 제조 업체로 성장했다. 자산 운영을 건실하게 하고 기술력을 탄탄하게 쌓아 국내외에서 갖가지 포상을 서른 번이나 받았고, 기술 인증도 많이 받았다. 지난해 4월까지만 해도 가용 여유 현금이 80억원에 이를 정도로 재무 구조도 탄탄했다.
가산전자는 자금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하여 빠른 시간 안에 세계 시장에 진출하고자 했다. 미국 재즈멀티미디어 사를 인수한 것은 그 때문이다. 미국내 유명 브랜드를 확보하기 위한 모험 투자였다. 97년 10월 말까지 상당 금액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경제가 오랫동안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고 국가 신인도가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자, 10월 중순부터 가산전자가 가진 모든 외환 여신이 일시에 중단되었고 이미 오를 대로 오른 환율로 인해 자재를 조달하는 데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결국 2천만 달러에 이르는 주문이 적체해 전세계 대리점들에 제품을 공급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져, 재무 상태가 급속히 나빠졌다.
가산전자는 증자하거나 해외 투자를 유치해 부족한 재원을 확보하려고 노력했으나 국내외 여건이 여의치 않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무리한 투자가 오늘의 참담한 사태를 불렀지만, 한국 벤처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우뚝 서야 하며 그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에 서둘러 해외 투자를 감행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좀더 빨리 세계 무대에 뛰어들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경영자는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경영 실패에 대한 책임은 최고 경영자인 내가 져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한국은 기술력이 탄탄한 벤처 기업들이 성장할 여건을 갖추지 못했다. 우선 투자 금융이나 정부 차원의 기술 투자 인프라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벤처 기업에게 한국은 아직도 황량한 사막
우리나라에서 벤처 기업이 5년 동안 생존할 가능성은 5% 미만이고 10년은 0.5% 미만이다. 따라서 가산전자나 두인전자 같은 기업이 생기려면 10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하다. 이 점을 간과한 채 정부와 금융권은 창업하는 벤처 기업을 지원하는 센터를 세우고 갖가지 금융 지원을 하겠다고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경쟁력을 지닌 중견 벤처 기업에 대해서는 매우 인색하여 벤처 기업들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가산전자가 갖고 있는 국내외 지명도와 기술력, 그리고 해외 전략 제휴선들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회사 가치는 최소한 4천만 달러가 넘는다고 평가된다. 그동안 강도 높게 구조 조정을 실시하고 대표자 지분을 모두 헌납할 것을 약속하고 정부 부처와 기술신용기금에 긴급 자금 50억원을 지원해 달라고 설득했다. 자금 지원이 될 듯했다. 하지만 지난 10월2일 오후 상황이 급반전해 지원이 힘들다는 통보를 받았다. 추석 연휴 기간에 요로에 탄원하기도 하고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으나 10월7일 최종적으로 불가 통보를 받았다.
가산전자는 한국의 멀티 미디어 산업을 이끄는 시장 선도 업체이다. 가산전자가 생산을 중단하면 국내 멀티 미디어 산업의 경쟁력은 크게 후퇴할 것이고 국내 시장도 외국 기업에게 내주어야 할 형편이다. 가산전자가 어떠한 형태로든 살아 남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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