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된서리에 신명 잃은 ‘LA 아리랑’
  • 로스앤젤레스·최명찬 주미특파원 ()
  • 승인 1998.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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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타운 관광사·호텔, 한국인 발길 끊겨 ‘휘청’… 할인·새상품 개발 등 생존 몸부림
IMF한파가 해외 동포가 가장 많이 몰려 사는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까지 덮쳤다.

가장 추위가 심한 곳은 관광업계이다. LA 코리아타운의 관광회사는 모두 백개에 가깝다. 그 중 한국의 자매사로부터 단체 관광을 공급받아온 15개 회사의 피해가 특히 크다.

한미관광의 경우 지난 1월 서울로부터 열두 팀을 받기로 계약했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 위기 여파로 100% 취소되었다. 한미관광 대표 김창일씨는 ‘문 닫기 일보 직전’이라며 고통스러워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빌 것 아닌가. 한국에서 단체 관광을 받지 못하게 됐으니 더 버틸 재간이 없다. IMF 한파가 최소한 1년반이 지나야 풀릴 모양인데 그때까지 어떻게 회사를 운영하겠나?” 김씨는 하루빨리 전업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재미 동포들을 상대로 영업해 온 관광회사 역시 모두가 어렵다. 재미 동포 대부분은 사느라고 바빠서 선뜻 여행을 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에서 가족이나 친지가 찾아오면 그제서야 마지 못해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IMF 한파가 닥치면서 재미 동포 친척을 찾아오는 한국 손님이 거의 끊겼다.

캘리포니아의 대형 재미 동포 관광회사 몇 곳은 문을 닫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관광 버스를 할부로 들여놓았는데, 만약 할부금을 내지 않고 폐업하면 신변이 위험할 수 있다. 버스 회사 정도면 마피아를 해결사로 고용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식당·선물가게·유학생도 ‘돈 가뭄’

관광회사 몇 곳은 그러한 악조건에서 살아 남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특히 달러화 초강세에 맞추어서 마련한 한국 관광 상품이 돋보인다.

삼호관광 대표 신성균씨는 한국 관광 사업에 대해 ‘실리와 명분이 맞물린 해볼 만한 사업’이라고 밝혔다. “예전에는 한국 관광을 하려면 1천7백달러쯤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절반이면 가능하다. 우리 회사는 서울의 코오롱·롯데·자유·국일 여행사와 업무 협약을 맺고 있다. 서울·부산·설악산·제주를 관광하는 데 8백∼9백 달러 선이다. 어쨌든 관광도 하고 침체된 한국 경제에 보탬도 줄 수 있어 더없이 좋은 상품이라고 생각한다.”

신씨는 ‘재미 동포 사회의 반응이 괜찮아 앞으로 한국 관광 개발에 더욱 힘쓸 예정’이라고 말했다. 아주관광은 서울과 설악산의 2박3일 상품을 왕복 항공료를 포함해 8백달러에 내놓았다.

한국 관광객을 주요 고객으로 하는 선물가게·호텔·식당 등도 큰 타격을 입고 있다. 관광회사와 연계해 영업하던 선물가게는 더 타격이 심하다. 선물가게들은 올 겨울 성수기 전에 외상으로 물건을 잔뜩 들여놓아서 피해가 더욱 막심하다.

이에 따라 LA 코리아타운의 선물가게 상당수는 재미 동포들을 상대로 할인 판매에 나섰다. 일부 품목은 70%까지 할인해 팔고 있다. 한국에서 온 손님이라면 거의 한번쯤 들르는 코리아타운 플라자의 경우, 이미 폐업한 선물가게까지 생겼다.

호텔업계도 IMF 한파를 피하지 못하고 있다. 관광객뿐만 아니라 출장객과 무역업자 등 일반 손님의 발길까지 끊겼기 때문이다. 호텔 직원인 ㅇ씨는 한국으로부터 출장객이나 무역업자가 오더라도 상당수가 알뜰 숙박을 한다고 밝혔다. “호텔이라면 1박에 50∼1백 달러를 받는다. 그런데 하숙집 서너 곳이 아침·저녁 두 끼 식사를 제공하면서 1박에 35달러 정도 받는 모양이다.”

IMF 한파의 영향으로 파리를 날리고 있는 식당도 꽤 있다. 관광회사에서 단체 손님을 받아 장사하던 식당은 그야말로 벼랑 끝에 몰렸다. 식당은 조금 나은 편이다. 관광회사·선물가게·호텔 등에 비해 LA 코리아타운 일대의 재미 동포 손님을 쉽게 끌 수 있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 식당 몇 곳은 우선 거품부터 제거했다. 반찬 가짓수 줄이기 등으로 식단을 짜서 싸게 받는 것이다. 그뿐인가. 서비스의 질도 높였다. 일례로 소용궁식당은 ‘밤 12시까지 무료 배달 서비스’에 들어갔다.

상사 주재원 역시 대부분 IMF 한파에 시달리고 있다. 달러화로 월급을 받아온 상사 주재원은 피해가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원화로 월급을 받아온 상사 주재원은 살기가 힘들게 되었다. 달러화가 급등해 월급의 반 이상을 잃었기 때문이다.

유학생 또한 IMF 한파의 영향을 피할 수가 없다. 대부분의 유학생이 학교측에 등록금 납부 기한 연장을 요청했다. 일부 유학생은 유명 브랜드 옷이나 시계·자동차를 팔아 가며 버텼으나, 금방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귀향 보따리를 싸고 말았다. 보따리를 싸지 않은 유학생은 거의가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들었다.

95년 미국으로 유학온 ㄱ씨는 IMF 한파가 불고 나서 하루 4시간밖에 못 잔다. ㄱ씨는 아침 8시에 일어난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듣는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저녁 8시에 귀가한다. 저녁 식사를 마치면 코리아타운의 한 나이트클럽으로 출근한다.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새벽 4시. 침대에 쓰러져 세상 모르고 잠이 든다. 그러나 아침이 오면 알람 시계는 어김없이 그를 깨운다. ㄱ씨는 “몇달 전만 하더라도 현재 내가 일하는 업소는 나의 단골집이었다”라고 말했다.

유학생이 LA 코리아타운 일대에서 할 만한 아르바이트는 나이트클럽과 음식점의 종업원을 비롯해 청소·페인트 칠하기·택시 운전 등이 있다. 여자 유학생 일부는 학비를 벌기 위해 몸까지 파는 것으로 알려졌다.

LA 코리아타운 재미 동포 사회는 IMF 한파가 닥치자 지난해 꾸준히 벌여 오던 북한돕기운동을 일시 중단했다. ‘고국의 위기 극복이 먼저’라는 생각 때문이다.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의 LA 지점이 지난 1월 중순 폐쇄 통보를 받고 긴급 대출금 회수에 나서 재미 동포 사회는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다. 두 은행의 대출금은 약 4억달러쯤 된다. 두 은행의 지점 폐쇄로 특히 지사와 상사 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들은 미국내 다른 은행으로부터 신규 대출 받기가 불가능한 실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YS 무능이 경제 망쳤다” 분노

재미 동포들 모두가 ‘어떻게 해서 고국이 이 모양이 되었냐’며 분노하고 있다. 재미 동포 서병현씨는 ‘언젠가 한번쯤 겪어야 할 일’이라며 씁쓸해 했다. “그동안 한국에서 친지가 여러 사람 찾아왔었다. 그런데 어쩌면 한결같이 돈을 물 쓰듯 하는지, 한국이 어렵던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 와서 다른 민족과 생존 경쟁을 하며 살아온 나는 한심하다 못해 화가 났다. 그렇게 몰지각한 사람이 부지기수였을 텐데 나라 경제가 무슨 수로 견디겠나?” 재미 동포 ㅇ씨는 “YS가 무능해 이렇게 되었다”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러나 한켠에서는 그래도 내 조국인데 나 몰라라 할 수 없지 않느냐는 분위기가 일고 있다. 코리아타운 교민회 등이 앞장서 ‘조국에 달러 보내기 운동’을 펼치고 있고, 한인 은행업계는 송금 수수료를 면제해 주고 있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번씩 널뛰는 환율 변동으로 문제가 많이 생기기도 한다.

ㅈ씨는 환율이 2천원대까지 치솟은 지난해 12월23일 한국으로 만달러를 송금했다. 달러가 오른 김에 동생의 아파트 구입 자금에 보탤 생각이었다. 약소하나마 조국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자부심도 가졌다. ㅈ씨는 한국의 동생이 며칠 내에 2천만원을 찾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생은 12월27일 인천의 은행에서 1천4백만원밖에 못 받았다.

ㅈ씨는 은행이 고의로 환율이 떨어질 때를 기다린 후에 환전해 주지 않았나 의심하고 있다. 코리아타운의 은행업계는 환차손 피해에 대한 재미 동포 사회의 불만이 높아가자 대책을 마련했다. 송금액이 찍히는 순간의 환율을 적용키로 한 것이다.

한국의 직업 여성, 밤 업소에 몰려

LA 코리아타운의 ‘고국에 달러 보내기 운동’은 각계에서 최근까지 계속되고 있다. 금 모으기 운동도 펼치고 있다. 또한 생활용품 전문점인 김스전기 등은 한국 상품 판매에 신경을 쓰고 있다. 정스백화점은 아예 한국 상품만 판다.

LA다저스의 박찬호 선수도 송금을 했다. 지난해 11월 한국에 갔을 때 충남도청에서 열린 달러 모으기 행사에 참가했던 박찬호 선수는, 12월1일 LA로 돌아온 후에 한국의 외환 사정이 나빠지자 즉시 30만달러를 보냈다. “나는 경제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외환 사정으로 한국의 경제가 어렵다기에 보탬이 될까 해서 갖고 있던 돈을 모두 부모님한테 보내드렸다.” 박찬호 선수는 앞으로도 계속 달러를 송금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밖에도 IMF 한파는 LA 코리아타운에 새로운 풍속도를 몇 가지 더 만들었다. 우선 한국으로 역이민갔던 재미 동포 일부가 다시 돌아오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감원 여파로 한국계 기업에 취업하는 재미 동포 수도 부쩍 줄었다. 밤업소 주변에 한국에서 온 직업 여성이 상당수 몰리는 것도 눈에 띈다.

현재 재미 동포 사회에서는 코리아타운의 앞날에 대한 의견이 양분되어 있다. 우선 외채 협상 타결 등으로 한국 경제가 곧 좋아져 LA 코리아타운 역시 머지 않아 활성화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의견이 있다. 다른 의견은 IMF 한파가 아직 LA 코리아타운을 완전히 강타한 것이 아니라면서, 올 상반기 중에 더 큰 시련을 겪을 것으로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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