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돈잔치, 월드컵의 경제학
  • 成耆英 기자 ()
  • 승인 1998.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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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억 시청, 황금알 낳는 최고의 이벤트… 한국 기업들, 과감한 투자 절실
“슛,고오오올인!”

선제골을 넣은 한국 선수가 미친 듯이 그라운드를 가로질러 한국 응원단 쪽으로 달려간다. 성난 파도처럼 일렁이는 붉은 색 물결의 한국 관중석 한복판에 태극기와 함께 나부끼는 응원 깃발은 축구협회 깃발이 아니다. 삼성이나 현대의 깃발도 아니다. 코카콜라 깃발이다.

지난해 말, 한국 축구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붉은 악마들을 당사자의 허락 없이 광고에 사용했다가 소송에 휘말릴 뻔한 기업은 10개가 넘었다. 그러나 최근 텔레비전에서 붉은 악마들뿐만 아니라 한국 선수들이 벌이는 모든 경기를 자기 회사 CF에 독점 사용하는 기업이 있다. 코카콜라이다. 이는 코카콜라가 한국 축구 대표팀 공식 후원 업체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 광고가 나간 뒤 코카콜라의 판매량이 얼마나 늘었는지는 좀더 따져 봐야 하겠지만, 코카콜라가 축구 대표팀을 후원하기 위해 들인 공은 엄청나다.
월드컵 공식 후원자 되려면 2천5백만달러 내야

얼마 전 대한축구협회와 한국코카콜라는, 코카콜라가 앞으로 5년 동안 축구 대표팀 후원금 23억원을 내놓는다는 조건으로 공식 후원사 계약을 맺었다. 금강기획이 주관해 국내 기업들을 축구 대표팀 후원 업체로 모집하고 있는데, 그 후원금 규모가 연간 약 1억5천만원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액수이다. 그 대가로 코카콜라는 코카콜라·파워에이드 등 자사 제품을 대표 선수들에게 독점 공급하는 것은 물론 경기장 광고·엠블렘이나 마스코트 사용권 등 다양한 권리를 갖게 된다. 이와 별도로 코카콜라는 프랑스 월드컵 응원단 7백77명 모집 행사를 벌이고, 회원이 1천5백명인 차범근 축구교실을 2003년까지 공식 후원할 계획이다. 코카콜라 관계자는 “이러한 각종 행사 지원에 드는 경비는 축구협회를 통한 23억원 지원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라고 귀띔했다.

‘7백77명의 코카콜라 응원단을 프랑스로 보낸다’는 코카콜라의 대형 이벤트에는 삽시간에 50만명이 넘게 응모해 주최측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코카콜라는 94년 미국 월드컵에도 응원단 1백50명을 보낸 바 있다. 해외 응원단 7백77명 모집은 사상 최대이다. 연대급 규모의 대이동에는 아시아나 항공 전세기 2대가 동원되고, 응원단이 프랑스에 체류하는 4일 동안 버스 20대가 무리 지어 이동한다.

프랑스 월드컵 공식 하드웨어 공급 업체로 선정된 휴렛팩커드가 6월부터 월드컵 경기장을 찾는 선수·축구 관계자·언론인 들에게 선보일 자사의 로고는 30만개나 된다. 컴퓨터는 물론 도핑 테스트용 계측기기까지 모두 휴렛팩커드 제품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그 대가로 약 천만달러를 월드컵조직위원회에 기부했다.

‘공식’이라는 접두어가 붙는다고 해서 월드컵 후원 업체들이 모두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국제축구연맹의 위임을 받아 세계 각국 기업들을 상대로 스포츠 마케팅을 벌이는 국제스포츠레저기구(ISL)는 후원 업체를 등급을 매겨 여러 단계로 분류하는데, 각 등급을 구분하는 기준은 후원금 규모이다. 공식 후원자(Official Supporters)로 선정되려면 2천만∼2천5백만 달러를 내야 한다. 코카콜라·후지필름·맥도널드 등 12개 공식 후원사는 2∼4개 면의 경기장 펜스 광고를 낼 수 있고, 대회 명칭 사용권과 엠블렘·마스코트 사용권을 갖는다. 후원금 규모는 4년 전에 열린 미국 월드컵에 견주어 무려 1.5배나 뛰었다. 그 다음으로 공식 공급자(Official Suppliers)·공식 상품서비스권자(Official Products/Services) 그리고 5천달러 이상의 최소 보증액을 내는 공식 상품화권자(Official Licensee)로 구분된다. 국내 37개 기업이 상품화권자로 참여한다. 그러나 그 기업이 생산하는 모든 제품에 엠블렘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라면·소주·비누 같은 한 가지 상품에만 사용할 수 있다. 국내 업체 중에는 LG전자가 유일하게 3단계 협력업체 격인 공식 상품서비스권자로 선정되었으나, 이 역시 가전 분야에 한정된 것이다.

1달러가 아쉬운 마당에 기업들은 지구 저쪽에서 벌어지는 월드컵에 엄청난 뒷돈을 대면서 어떤 이득을 노리는 것일까. 프랑스 월드컵의 경우 시청자만 37억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결승전은 무려 14억명이 동시에 시청할 것이라는 통계도 있다. 수십억 개의 눈동자를 자사 브랜드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 스포츠 마케팅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 ‘21세기 최고의 유망 산업’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월드컵은 세계 최대 스포츠 이벤트이다.

서울대 체육연구소 권시형 박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월드컵 주경기장 신축을 놓고 지루한 논란을 벌일 것 없이 주경기장의 명칭을 짓는 데 글로벌 스포츠 마케팅을 벌이는 유명 기업들의 이름을 붙여 주기로 하고 이름값을 받는다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라고 제안한다. 미국 프로야구(MLB)나 미식 축구(NFL)에서 유사한 사례를 발견할 수도 있다. 이름만 써 주고 2천만달러를 챙긴 ‘쿠어스 필드’나, 6천만달러를 보조받고 이름을 붙인 ‘퀄컴 스타디움’과 같은 것들이다.

기업들이 이만한 돈을 쏟아붓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텔레비전 중계가 뒤따라야 한다. 월드컵과 텔레비전의 함수 관계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사례가 있다. 이탈리아 월드컵이 열린 90년 전세계 텔레비전 판매량은 89년보다 3%나 상승해 80년대 중반부터 계속되어 온 마이너스 곡선을 뒤집어 버렸다. 미국 월드컵이 열린 94년에도 텔레비전 판매량이 6.6%나 급증해 90년대 들어 가장 높은 판매 상승률을 보였다. 특히 90년의 경우 축구 열기에 관한 한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중남미 지역의 판매 상승률이 16.2%로 다른 지역을 압도한 것을 보면 월드컵과 텔레비전의 상관 관계는 더욱 확실해진다. 금강기획 마케팅전략연구소 김영태 주임연구원은 “과거에는 스포츠용품을 선수들에게 입히거나 경기장 광고를 통해 브랜드를 알리는 정도였으나 이제는 아예 스폰서십을 획득해서 방송 중계와 경기장 광고 등을 일괄 대행하는 추세다”라고 분석했다.

“2002년 월드컵 마케팅 전쟁 이미 개막”

프로 스포츠의 천국인 미국에서는 스포츠가 국민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따져 국민 스포츠 총생산량(GNSP)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 결과 지난해 미국의 GNSP는 6백억달러 규모로 항공산업이나 담배산업을 능가해 2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쯤되면 한국이 프랑스 월드컵을 통해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16강 진출 여부만이 아닌 것은 분명해진다. 설령 16강에 진출하지 못하더라도 프랑스 월드컵의 경험은, 21세기 최초이자 최대의 스포츠 이벤트인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는 한국에는 살아 있는 교과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막연한 환상은 금물이다. 스포츠 마케팅을 전공한 수원대 김 종 교수는 “어느 나라에서 개최하느냐가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서울올림픽 당시 우리 기업이 돈을 많이 번 것은 아니다. 문제는 어느 기업이 스포츠 마케팅에 대한 관심과 투자 의욕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현장을 뛰는 스포츠 마케팅 전문가들의 견해는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2002년 월드컵은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준비하기 때문에 한국 기업이 참여할 여지가 더욱 줄어들게 된다. 그런 면에서 2002년 월드컵 마케팅을 향한 쟁탈전은 이미 개막되었다.” 금강기획 스포츠마케팅팀 황정우 차장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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